"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밤새 눈이 내렸다. 여자의 집도 눈 속에 고스란히 들어앉았다.
여자는 섬에 살면서 뭍에 오를 때마다 신간을 사들이곤 했다. 그마저도 성에 안 찼던지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이 책장에 빼곡했다. 보름 전부터 여자는, 소장한 도서 대부분을 육지로 부쳤다. 그리곤 일부를‘당근’ 사이트에 내놓았다. 사이트에 접속한 후로 며칠이나 지났을까. 굶주렸던 토끼 한 마리가 설원에서 당근을 찾은 것처럼, 여자의 폰 속에서도 연신“당근” 소리가 요란했다. 한 여성작가의 소설책 여덟 권을 모두 구입하겠다는 문자가 핸드폰에 떴다.
“다 구입하고 싶은데요. 얼마죠?”
“그럼….”
짧은 카톡과 함께 수일 내로 제시한 금액을 보낸다는 말을 남기곤 여자도 구매자도 대화방을 나갔다. 며칠이 지나도록 돈을 보낸 흔적도 별다른 말도 없었기에 여자는 나름 포기한 거로 결정하곤 명절이 가까이 온 터라 육지로 여자는 올라왔다. 한창 명절 준비로 바쁜 중에 벽공碧空님께서 입금했다는 문자가 떴다. 그제야 여자는 지난 기억을 돌이키며 육지에 있으니, 제주도에 내려가면 보내주겠다며 대화를 마무리 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여자는 구매자한테 문자를 보내곤 당근 사이트의 규칙대로 언제 방문하겠냐고 물어봤다. 그때 남자는 반값 택배를 원했지만, 여자는 망설이다 보름이나 기다려 준 게 고마워서 그랬는지 선뜻 가져다주겠다며 약속했었다. 하필이면 그 약속한 날이 오늘이다.
“나갈 수가 없어요.”
“여기도 함박눈이~~”
“남자분인가요?”
“네.”
“다른 책도 있는데, 하필이면?”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나요?”
그 문자를 읽는 순간, 여자의 마음이 바람에 날리는 눈꽃 송이처럼 가벼워지고 있다.
젊은 날에 남편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남편에게 어디가 그리 좋아서 나와 결혼을 결심하게 됐냐며 곱씹어 물어보곤 했다. 그때 남편도 남자와 같은 말을 했었다. 나는 확실한 사유가 있어야 했고, 남편은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남편도 남자처럼 내가 마냥 좋았던 거였다. 갑작스레 남편을 소환하게 해 준 남자가 궁금했다. 내 호기심이 언 땅에 고개를 내민 새싹처럼 슬며시 발동했다. 폭설로 고립된 내 마음도 조금씩 녹고 있었다.
남자가 구매한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작가처럼 살고 싶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비상하길 갈망했지만, 실행해 옮기지 못한 채 오랫동안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둘의 대화는 한라산 언저리에 겹겹이 쌓인 눈처럼 소복하게 쌓여만 가고 있었다. 서로가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남자는 SNS에 올린 최근의 글을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왜 제주도에 내려왔는지, 현재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넌지시 자연스레 알렸다. 그리곤 술 없이는 버티기가 힘들다는 말도 했다. 한동안 나도 지난날을 술로 보내야만 했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 속박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슬며시 이야기하며, 눈이 그치는 날을 기약하며 두 사람은 대화방을 나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한라산이, 폭설로 통제됐다는 뉴스가 티브이 화면을 도배하고 있다. 여자는 지난해 폭설에도 꿋꿋했었다. 그러나 오늘, 여자는 숨 고르는 일조차도 버거워 보인다. 갑작스레 내린 폭설로 여자는 깊숙한 바닷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다. 여자는 언제나 혼자였지만, 매양 씩씩했었다. 그러던 여자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내 여자의 얼굴에 외로움의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내렸다. 여자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거실 주위를 뱅뱅 돌다 끝내 울부짖다가 겨우 소파에 걸터앉았다. 들숨과 날숨을 들이쉬며 여자는, 누굴 위하여 잠수함에서 머물러야 하는가. 이 안에 산소는 얼마나 남아 있는가. 하는 생각의 늪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제주도에 내려올 즈음에 나한테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다. 일찍부터 남편은 사랑놀이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날지도, 깊이 천착하지도 못하며 살고 있었다. 단호하지 못한 내 성격도 한몫했던 게 분명했다. 미궁에 갇히는 것에, 길들어지는 것에, 참는 것에 익숙한 터라 남편도 그게 내 본심일 거로 믿고 있었다.
이틀이나 지나고 여자가 사는 타운하우스의 빨간 지붕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오의 볕이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진 노란 벽의 물기를 걷어냈다. 연일 내린 눈 때문에 산송장처럼 여자는 침대 속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때마침 남자에게서 카톡이 왔다.
“지금, 산책하러 나갈 건데 오늘 시간 괜찮아요?”
여자가 이불 속에서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밖에 있는데요.”
여자의 거짓말이 능수능란하다. 남자는 말이 없는 듯, 핸드폰 속이 조용하다. 이번엔 여자가 먼저 카톡을 했다. 해 질 녘쯤에 만나자며 꽤 뜸을 들이면서….이어 남자가 약속 장소를 카톡으로 보냈겠다고 했다.
“오후 5시, 000읍에 카페에서 만나요.”
오후 4시에 여자는 급하게 욕실로 들어간다. 거울 속에 비친 또 다른 누군가와 여자는 마주하고 있다. 섬뜩해하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 이내 긴 한숨을 들이킨다. 다시 고개를 들어 축 늘어진 가슴과 불룩한 배와 허벅지에 붙어 있는 살덩어리를 쳐다본다. 여자는 비상하지 못한 새의 날갯죽지를 보듯, 여자의 겨드랑이를 쳐다보고 있다. 이미 퇴화한 날개를, 꺾인 날개를 보며 쌓였던 먼지를 털어 내듯 지난날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여자는 여느 때와 다르게 고루고루 기초화장을 한 후 아주 연한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입술에 살짝 바르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빠빠빠” 한다. 그리곤 보조개를 만들며 웃는다. 거울을 보며 입을 동그랗게 모으곤 고개를 45도로 갸우뚱 숙이면서 “안녕하세요? 00 님이시죠? 만나서 반가워요.”라고 콧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여자는 달게 웃고 있다. 옷장에서 짙은 회색 외투를 골라 입곤 머플러를 휘휘 목에 둘렀다. 거실 모퉁이에 쌓여 있던 소설책을 에코백에 주섬주섬 담았다.
나는 남편과 연애할 때처럼 삼십 분이 지나서야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커피숍 안쪽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사람일 거로 확신하지만, 부러 모른척하며 들어서자마자 전화를 걸어본다. 그러자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의 핸드폰이 빙그르르 탁자 위에서 돌고 있다. 남자가 보고 있던 신문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핸드폰을 집어 든다. 이내 여자는 핸드폰의 꺼짐 버튼을 누른다. 남자는 울림이 멈춘 핸드폰을 들여다 보다 고개를 갸웃 뚱 하더니만 이내 출입구 쪽을 쳐다본다. 남자는 출입구 쪽의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일어서며 가볍게 목 인사를 한다. 여자는 남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앉는다.
시골 골목길에 있는 자그마한 카페, 남자는 반쯤 마신 물이 담긴 컵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남자가 앉으면서 먼저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마타하리님 님이신가요?”
“네 맞아요.”
통성명이 끝난 두 사람은 멀뚱멀뚱 탁자만 쳐다보고 있다. 남자가 메뉴판을 들추더니 여자 쪽으로 들이 밀고 있다. 여자는 캐러멜 마키아토를 남자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이번엔 여자가 말을 건넨다.
“산책 자주 하시나요?”
“매일 하려고 하는 데~~”하며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
남자는 매일 같은 시간에 산책하는 칸트처럼 살고 싶어서 규칙적으로 걷는다고 말한다. 이어 여자도 며칠 동안 폭설로 고립됐던 이야기를 들먹이며 빈곤했던 마음을 쏟아낸다. 남자는 첫째 할 일이 있고, 둘째 사랑할 사람이 있고, 셋째 희망이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라는 칸트의 행복 조건을 전하며 여자를 쳐다보며 웃고 있다. 순간 여자는 세 가지 조건 중의 두 가지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툴지만 내면을 그려 내는 일을 하고 있었고, 진즉에 남편을 용서하지 않았던가. 마지막 칸트의 조건이 여자의 머릿속엔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여자에게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만 일어날까요?”
남자가 보았던 신문을 가방에 잡어 넣곤 계산대 앞으로 간다. 그제야 여자는 풀었던 목도리를 두르곤 일어나 출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다. 휑하니 나가고 닫힌 문의 풍경소리만 요란하다. 땅거미를 재우며 스쳐 가는 바람 소리에 어렴풋이 남자의 뒷모습이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걸어가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여자가 쳐다보고 있다. 남자의 오른쪽 어깨가 한 자나 기울어져 있다. 그제야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우두망찰하게 서 있다. 허탈한 웃음과 긴 날숨을 내뱉곤 운전석에 앉는다. 여자가 조수석의 창문을 내린다.
“같은 방향이니 타세요.”
“그럴까요.”
“눈이 많이 올 것 같아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발이 굵어진다. 올 겨울은 긴 여행이 될 것 같다. <수필가 최연실>
* 이글은 <수필과 비평 8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소설같은 이야기~~^^
그 남자. 그 여자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