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실의 문학산책] (2)기억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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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실의 문학산책] (2)기억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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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이른 아침, 한라산에도, 애월읍의 바다도 안갯속에 숨었습니다. 중산간에 위치한 내 집은 폭풍의 언덕을 연상케 합니다. 어젠 반공일이라 시원한 바람을 벗 삼아 굽이굽이 동네 한 바퀴를 다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꽃을 건네며 “나리꽃 닮은 여자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얼굴은 홍조가 되고 몸은 짜릿한 설렘으로 감전된 것 같더군요. 들뜬 마음으로 집에 와 텃밭 한구석에 나리꽃을 심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아이오와 주 매디슨 카운티에 초록색 트럭 한 대가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초침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작은 도시, 차에서 내린 로버트는 프란체스카한테 로즈먼다리가 있는 곳을 물었습니다. 다리가 있는 곳으로 동행한 두 사람은 둘만의 우주를 만들었지요. 그 우주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찾아왔어요. 로즈먼 다리 위에서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꽃을 꺾어 답례했습니다. 꽃을 받으며 프란체스카는 “그건 독초인데요.” 농담으로 건넨 말이 만남의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영화가 상영되었던 것 같아요. 마음을 졸이면서 보았지요. 혹여 내 이런 성향을 들키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며 수줍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주도에 내려오기 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라는 영화는 뮤지컬로 다시 우리 부부에게 찾아왔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방송이나 영화, 심지어 뮤지컬까지 불륜을 주제로 다루지 않는 것이 없다면서요, 차 안에서 내내 귀에 딱지가 앉는 줄 착각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백합과에 속하는 나리꽃은 종류가 많습니다. 내가 선물 받은 나리는 ‘날개하늘나리’입니다. 주황색 꽃잎에 검은색 주근깨가 수를 놓았습니다. 긴 선형의 초록 잎사귀가 빙 돌아가며 줄기를 감싸고 있고요. 여섯 개의 수술은 암술 주위를 뱅그르르 돌아가며 원을 만들었어요. 미끈하게 잘 빠진 보랏빛 수술이 훈풍에 흔들릴 때마다 암술에 말을 건네는 것 같군요. “귀여운 아가씨 춤 한번 추실까요?” 고고한 자태로 한가운데 자리한 암술은 사랑을 속삭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옵니다. 수술과 암술은 바람을 타고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한 곡을 멋들어지게 춥니다. 먼 거리에서도 나리꽃은 참으로 귀엽더군요. 가까이 가면 톡톡 쏴붙일 것처럼 토라져 있는 듯 보이는 것 같지만, 찬찬히 보니 웃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새초롬하게 웃는 게 나를 닮은 듯합니다. 나는 누구에게나 잘 웃어주는 여자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내가 웃는 모습에 반해 결혼했는지도 모릅니다. 남편은 아직도 내가 나리꽃을 좋아하며 나의 웃는 모습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요.

언제쯤 한라산 봉우리가 보일까요? 하는 생각으로 내 시선은 창밖을 향해 멈췄는데, “톡” 하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최 선생, 어제 심은 나리꽃은 잘 있나요?” 아침을 장식하는 다정한 메시지. 바람이 불어옵니다. 간단하고 명확하게 “넵.” 싱숭생숭한 마음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봅니다.

“여보, 당신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먹는지 알아요?”

식전 댓바람부터 뜬금없는 질문에 기막힌 모양입니다.

“당신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현금을 좋아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거나 다 잘 먹는 여자란 말입니다. 좀 더 비하하면 식성이 잡식성이고, 속물이란 말처럼 들렸습니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십여 분이 지났을까요. 나는 남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알고 있는데 어쩌면 저리도 무심할까요. 서운한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습니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요.

“여보! 나는 보신탕도, 닭똥집도 못 먹어, 내가 나리꽃 좋아하는지도 모르지?” 큰 소리로 말하고 핸드폰의 버튼을 꾹 눌렀습니다.

부엌 작은 창으로 어제 심어 놓은 나리꽃이 보이는군요. 액자에 담겨있는 한 폭의 풍경화처럼 내 눈이 호사를 누립니다. 영화 속의 프란체스카처럼 지인과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고, 젊은이들처럼 서로 추파를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남편에게 무덤덤하지 않은 내가 좋았습니다. 소파에 앉아 문우의 수필집을 읽어봅니다. ‘솔직해진다는 것은 의외로 상대에게 책임과 부담을 떠넘기는 행위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나의 투정이 남편에게 피곤한 여자로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 밖에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해 바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어요. 삼십 여분이나 지났을까요.

“나리꽃 당신!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른다오. 내가 기억하는 것은 6·2 사태뿐이요. 곧 보러 가리다.” 내가 남편한테 결혼기념일을 매번 6·2 사태라 말했던 것을 남편이 기억하고 있더군요.

하늘나리꽃의 꽃말은 ‘변치 않는 귀여움’ ‘길들지 않음’이라고 하지요. 삼십 년 전, 나도 길들지 않았던 때가 있었지요. 오랜 세월 아무개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살다 보니 내가 누군지도 가끔은 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창밖에는 안개가 걷히는 것이 보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갯속에서 한라산의 봉우리도, 운무에 감춰졌던 애월읍의 바다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더군요. 돌아오는 주말에는 남편과 함께 나리꽃을 심어야겠어요. <수필가 최연실>

최연실 수필가. ⓒ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 ⓒ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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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2022-04-08 14:58:22 | 219.***.***.68
우와, 고사리를 뜯으며 가족애와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했군요. 감동입니다

나리꽃 2022-03-25 19:58:37 | 119.***.***.32
나이가 들면서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록새록 느낍니다. 작은 것에 고마움을 갖게하는 예쁜 글 잘 일고 갑니다

제주오늘 2022-03-25 18:17:42 | 112.***.***.220
오늘처럼 바람부는 날과 잘 어울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설렘과 추억과 귀여움이 느껴지네요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