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새벽녘부터 내리던 비는 아침까지 진행형이다. 창에 부딪힌 비는 어린아이처럼 미끄럼을 타듯, 또르르 떨어진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듣는다. 오늘과 다르게 그날은 한낮의 더위를 샤워해 주듯 소나기가 한바탕 퍼붓고 있었다.
오래전 봄이 저물어 갈 무렵으로 기억된다. 나는 때아닌 홍역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도 때론 나도 모르는 감정이 이입되어 뜻하지 않게 인연을 맺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인연이 시작된 그날, 더위를 달래려고 집 앞에 있는 작은 카페를 찾았다. 며칠 전부터 뚝딱거리더니만 어느새 문을 열었다. 카페 내부는 소박했다. 서너 개의 테이블과 케이크를 보관하는 쇼 케이스, 개업 화분 몇 개 그리고 스무 권도 채 안 되는 책을 꽂아 둔 자그마한 책꽂이가 전부였다. 물론, 공간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꽉 채워 넣을 필요는 없지만, 차 한 잔을 주문하고 오랜 시간 앉아 있기에는 낯설었다. 그녀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시곗바늘이 거꾸로 가는 듯, 여주인의 옷차림은 내 학창 시절을 불러들였다. 그녀는 하얀색 남방과 빛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더불어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 것이 또 있었다. 우윳빛 같은 피부, 짧은 단발머리도 한몫했다. 중년임에도 불구하고 단발머리가 유난히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연한 핑크빛 립스틱만 바른 채, 쌍까풀 없는 옴팍 눈을 가진 그녀에게 자꾸만 나는 눈길이 갔다. 조명 아래에 턱을 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은은하고도 고혹적이었다. 그녀에게 홀린 듯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런 상상을 했었다. 손님이 없는 날에 그녀는 카페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을 거라고 나름 말이다.
뜨겁던 아스팔트를 식히는 단비가 내렸지만, 여전히 바깥은 30도를 웃돌고 있었다. 반면 카페 안은 에어컨에서 뿜어내는 시원한 바람과 더불어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녀의 묘한 향기가 어우러져 최적의 온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반이나 읽은 것처럼 보이는 단편 한 권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는데 통성명하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읽던 책의 제목이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것을.
한때 나도 탐미주의 사강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여러 번 그 소설을 읽었던 적이 있다. 대충 생각나는 줄거리는 이러했다. 이혼한 서른아홉 살의 여주인공 폴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폴은 운수업을 하는 연상의 사업가 로제와 몇 년째 사귀고 있다. 둘은 서로 다른 매력에 끌려 사랑했지만, 오래된 연인에게 찾아오는 권태 때문에 무덤덤하게 지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질 수 없는 이유는 서로에 대한 익숙함이다. 그런 까닭에 가끔 폴은 로제의 외도를 눈감아 주곤 한다. 외로운 날을 보내는 폴에게 열네 살이나 어린 시몽이란 남자가 적극적인 구애를 한다. 그로 인해 불안과 당혹감을 느끼던 폴도 시몽에게 조금씩 끌리게 된다. 로제와 폴은 일시적으로 이별을 하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폴은 로제를 용서하고 재결합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다.
그날 그녀가 읽던 책을 접었다. 슬며시 다가가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 저 ~~ 앞집에 살고 있고, 여기 커피 향이 참 좋은 것 같아요.”하고 말했던 것 같다.
좀 더 멋지게 쐐기를 박는 말이 있었을 텐데 고작 한다는 첫 마디가 이런 거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가볍게 목인사로 답례하는 그녀의 볼이 발그레했다. 수줍은 그녀의 자태와는 달리, 목소리는 가벼웠던 거로 기억한다. ‘어머 정말요? 재료가 좋아서 그래요.’라고 말하면서 고조된듯한 음성과 비음이 섞인 콧소리로 흥분되게 웃었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커피 향을 잘 알던가. 그저 무심결에 튄 침의 파편처럼 툭 튀어나온 말이건만. 그 당시 나도 솔직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와 나는 한 시간이 채 안 돼 오래전부터 알았던 친구처럼 마주 앉았다. 세상살이의 반 정도는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중년이었고, 그리고 사랑이란 난제 앞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는 현실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단초가 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녀의 생활은 독특했다. 이층 양옥에서 네 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자녀들을 유학 보내고 나니 부부만 집에 덩그러니 남았다고 했다. 이층에 세를 놓을까도 생각했지만, 1층은 그녀가 2층은 그녀의 남편이 사용한다고 했다. 더 늙기 전에 혼자 살아보는 게 꿈이었고, 따로 살림을 낼 수 처지가 아닌지라 경제적 여건을 고려하여 위층과 아래층으로 공간을 분리해서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폐쇄하고 철저하게 끼니도 공과금도 각자 부담하면서 산다고 했다. 그래서 생활비를 마련코자 카페를 운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 그 순간, 나도 가슴에 품었던 내 작은 소망이 생각났었다. 혼자 살고 싶은 꿈. 혼자이기에 할 수 있는 것, 자신 내면이 그 어느 때 보다 잘 보인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한술 더 떠 진정한 고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사랑하는 감정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종종 몸속에서 권태라는 작은 불씨가 앉았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라고 소곤거릴 때마다 나는 남편에게 변했다고 말했었다. 허울 좋은 빈껍데기에 연연해하는 내 모습이 싫어 자신을 학대하던 때도 있었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길을 나서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을 때마다, 세기의 바람둥이 카사노바를 원할 때마다 연속극으로, 소설로 나를 달래곤 했었다. 그때 나는 그렇게 그 여자의 방에서 그해 여름 내내 상대를 바꿔가며 간접적인 바람으로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는 하늘이 뉘엿뉘엿 회색빛으로 물들 때 입안에서 난 내가 날 정도로 지친 몸을 하곤 집으로 들어가곤 했었다.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닌 사랑하는 감정에 몰입되어 사랑에 찌든 채 말이다. 혼자여서 생기는 지독한 외로움 때문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말이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삼십 년이란 긴 세월을 그녀의 방에서 냉탕에서 온탕으로 온탕에서 냉탕으로 옮겨가며 지냈다.
나는 이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시몽의 말이 생각났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그런 이유로 고독형을 선고한다는 말은 과연, 그녀는 자기의 남편에게 고독이란 실형을 선고한 걸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 부부는 누가 실형을 받은 걸까.
점심이 돼서야 구멍 난 하늘이 메워졌다. 빛바랜 기억을 쏟아내어 한 편의 소설을 쓰고 퇴고를 거친 것처럼 말이다. 때마침 핸드폰에서 ‘톡’ 소리가 난다. 딸이 엄마 괜찮은 거지? 하고 묻는다. 나는 짧게 ‘뚝’이라며 문자를 보내고는 괜스레 나도 모르게 보조개가 생긴다. 그녀가 내게 아직도‘브람스를 좋아하시나요?’하며 묻고 있는 것 같다.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들이켰다. 내 방에 들어앉은 내가, 오늘따라 그 여자의 방이 궁금해진다. <수필가 최연실>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