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실의 문학산책] (22) 그녀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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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실의 문학산책] (22) 그녀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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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오늘도요?” 평일 오전 11시, 아메리카노에 헤이즐넛 샷을 추가합니다. 커피가 넘칠 정도로 투박한 머그잔에 담아 나왔습니다. 일주일이나 된 것 같아요. 매일 육지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일상이랍니다.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여 오소록하게 파묻혀 있는 카페 3층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꺼내고, 의자에 앉아 창밖을 쳐다봅니다. 옷 벗은 지가 서너 달은 된 것 같네요. 아직도 겨울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 같군요. 그런데도 창을 통해 보이는 세상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태연하고, 한산해 보였습니다. 서점에서 구입한 책을 꺼내 첫 장을 넘겨봅니다. ‘배가 고프다.’라는 첫 문장으로 작가는 독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배가 고팠던 때가 나도 있었습니다.

어머님 집에는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내가 시집오기 전부터 머물렀으니 꽤 오랫동안 어머님과 동고동락하며 지내고 있었답니다. 바람이 차지면 동백나무는 현관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들고나는 현관에서 새빨간 꽃을 피웠습니다. 어머님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도 된 양 눈인사하며 한 잎 두 잎 닫았던 꽃 문을 조심스레 열곤 했답니다. 그런 동백꽃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며 어머님은 긴 숨을 쉬곤 했습니다. 당신의 처지를 하소연이라도 하듯, 먼저 간 아버님을 그리워하듯, 그렇게 말입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애가 탔습니다.

쉰도 되기 전에 혼자 된 어머님의 밤은 늘 고단하고, 외로웠습니다. 지난날, 아버님하고 다정스레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배웠던 술이 홀로 된 어머님의 작은 위로였답니다. 모든 것을 당신 마음대로 결정하던 어머님이셨지만, 그런 어머님께 남기고 간 시할머니는 옮기지 못하는 산이었으니까요. 그런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슬퍼했다가도 이내 돌아서는 나였기에 어머님하고 가까워질 수 없었답니다. 어머님의 답답한 속내를 동백나무에 쏟아 냈던 건지도 모릅니다. 손수 씻기고, 입히고, 젖을 물리는 유모처럼 살뜰히 보살폈습니다. 초경 하는 계집애의 젖가슴처럼 살구나무의 꽃봉오리가 봉긋해질 때면 현관에서 겨울을 보냈던 동백나무는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늦게까지 목숨 줄을 부여잡고 있는 동백꽃이 떨어질세라 종종걸음으로 옮기시던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나는 살구꽃 피는 사월을 좋아했습니다. 봉숭아 물들인 손톱처럼 살구꽃 봉오리는 봄 햇살을 맞으며 긴 겨울잠에서 기지개를 켰습니다. 밤새워 연해하느라 몸살을 앓았는지 이른 새벽부터 이슬을 머금으며 잎보다 꽃을 먼저 피웠답니다. 정오가 되면 살구꽃의 수다는 절정에 다다르곤 했답니다. 집 앞을 지나는 행인조차 살구꽃 수다에 한 번 씩은 놀란 토끼 눈을 하며 쳐다봤으니까요. 현관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꽃들의 사연을 듣고 있으려니 나도 봄바람에 꽃비가 된 꽃잎처럼, 훨훨 이 높은 담장을 넘고 싶었으니까요.

동백꽃처럼 조용하고 단아했던 어머님과 살구꽃처럼 처음 보는 누구에게나 잘 웃는 내가 한 집에서 하루를 무사히 지내는 것은 쉽지 않았답니다. 오랜 세월 어머님은 동네에서 터를 잡고 사셨지만, 오히려 나보다도 이웃의 속내를 몰랐으니까요. 아마도 어머님은 담장 밖을 두려워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어머님의 심부름을 하는 날은 으레 것 삼십 분 정도 한눈을 팔다 귀가하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그런 나를 종종 지켜봐야 했던 어머님의 속은 편치 않았습니다. 먼발치에서 어머님을 지켜보는 시할머니의 느긋함을 가끔 즐기곤 했답니다. 남편을 먼저 여윈 여인들의 권력 싸움에서 나는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니 나는 철없고, 한창 호기심 많았던 새댁이었으니까요.

시집와 잘 웃는 덕에 이웃이 생겼습니다. 작은 옷도 늘려주는 세탁소 아저씨, 잘 익은 홍시를 건네주던 슈퍼 아줌마, 자식을 낳지 못해 양자들인 성씨 할머니, 골목 모퉁이에서 가래떡을 뽑는 사장님. 그분들의 영업장은 집에 가는 길에 들리는 방앗간이었고, 탈출하고 싶을 때 유일하게 가는 마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구꽃 집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딸처럼, 여동생처럼, 자매처럼 나는 그분들의 마음을 토닥이곤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벙그는 살구꽃처럼 살고 싶었기에 말입니다.

어느 해 봄, 사나흘 정도 곡기를 무르시더니 어머님한테 작은 속삭임 없이 시할머니는 그리 먼 길을 훌쩍 나섰습니다. 그날, 통곡하는 어머님을 보았습니다. 어머님의 눈물은 동백꽃잎처럼 붉었습니다. 그리 몇 달이 지나고 어머님은 당신이 탄 버스가 차선을 벗어나 한강에 빠지는 섬망을 봤다며 믿기지 않는 이상한 꿈을 꾸었노라고 하시더군요.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우연한 기회에 건강검진을 하게 되고, 직장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날의 섬망이 어머님의 불행을 예견한 걸까요? 어머님은 오 년 동안을 병마에 시달리다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되었지요. 어머님께서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어렵게 핀 동백꽃은 불안해 보였습니다. 안간힘을 쓰며 금방이라도 만지면 으스러질 것처럼 푸석한 모양으로 대롱대롱 가지에 매달려 있더군요. 나는 검지로만 살짝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힘없이 떨어질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어요? 어머님께서 병마와 싸우는 긴 시간 동안 힘들었던 속내를 애먼 동백꽃에다가 화풀이를 한 셈이 되고 말았답니다. 그렇게 나도, 어머님도, 시할머니도 풀지 못한 고부간의 갈등을 동백은 다 알고 있었기에 시들어 버렸습니다. 때가 되었기에 떨어졌다는 것을, 순리라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도 어머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 허기 때문에 항상 혼자라는 생각으로 고독했었거든요. 배고픔을 채우려고 얼마 전까지도 방황 속에 살았습니다. 도시가 싫어 멀리 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가슴에 있는 통증 때문에 도망가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더 먼 곳으로, 어머님이 사셨던 곳에서 가장 멀리 떠나있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시할머니 옆에 나란히 앉아 늘 어머님을 외롭게 만들었던 그때의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집으로 오는 길목에 키 작은 동백나무가 오종종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고만고만한 동백꽃은 그리 화려하지도 않고 빛깔도 그 옛날만큼 붉어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도 오늘 동백나무 한 그루를 들일 생각입니다. <수필가 최연실>

최연실 수필가ⓒ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 ⓒ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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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맑음 2023-03-02 10:58:12 | 112.***.***.220
오랜만에 작가님 글을 보니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 사이 서울로 귀소를 하셨나봅니다. 제주생활이 작가님의 집필과 일상에 좋은 영양소가 되었기를 그래서 또다시 동백처럼 아름답게 피어나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제주에서 늘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