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실의 문학산책] (26)월하 수작 (月下 酬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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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실의 문학산책] (26)월하 수작 (月下 酬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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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애당초 제주도를 마음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 우리도 제주에 내려가서 살아볼까?”

무심결에 툭 던진 말에 내가 흔들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승냥이처럼 말꼬리를 물었다. 물론,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도 한몫했으리라.

제주 구도심 근처에 연세 年歲를 얹어 지냈지만, 내 몸 구석구석에 뭍의 일상이 잔재했다. 연고가 없는 제주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곤 한다. 아침이면 퉁퉁 부어 오른 눈 주위를 쳐다보며 이런 날도 어쩌다 한 번으로 족하지 싶었다. 그래서 숨어든 곳이 한라산 중산간 중턱에 위치한 애월읍이다.

둥지를 툰 곳은 인적이 드물었다. 약속이 있는 날을 제외하곤 두문불출하는 것에 익숙한 터라 이보다 더 나은 곳이 없지 싶었다. 밤이 되면 저 아랫녘 갈치 배에서 바람을 타고 술 익는 냄새가 스멀스멀 어둠을 동반하고 산 중턱까지 올라오곤 했다. 그새 은은한 달 하나가 밤바다를 깨우고 살며시 내 가슴 한 복판에 들어앉았다. 반짝이는 갈치 배의 불빛에 취해 나는 이성은 이내 감정의 닻을 내리고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정신없이 엑셀을 밞으며 곤 쉬지 않고 언덕을 내려갔다. 달도 내 달리는 나와 함께 숨이 가빠오곤 했다. 그렇게 십여 분을 달려 품에 술을 안고 집으로 오곤 했다.

‘나를 위한 만찬을 준비하리라.’ 중얼거리면서도 항상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닭 가슴살을 집어 든다. 안주는 소소할지라도 한껏 분위기를 띄운다. 「베토벤 Beethoven의 월광 소나타Moonlight Sonata」LP 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넘기지도 못한 술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이내 도화꽃물이 서서히 발끝부터 물들고 있다. 마치 바다를 처음 본 소금인형처럼…. 이젠 점잖을 떨 나이도 됐건만, 아직까지도... ‘쯧쯧’ 나도 모르게 실소가 달맞이꽃처럼 벙글고 있다. 이에 질세라 손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남편에게 전화하면 열에 아홉은 ‘응, 낼 통화해.’ 말할 테고, 까칠한 둘째 언니에게 걸면 ‘너 또 술 마셨니?’하며 목사님처럼 설교할 게 뻔하다. 핸드폰을 위아래로 훑어봐도 한밤중에 통화할 사람이 없다. 달 아래 홀로 독작하는 ‘이백 ’을 떠올리며 나도 〈월하독작〉이라도 읊조리는 게 나을 성싶다.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술 마신다.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잔을 들어 달을 맞이하니 그림자와 셋이 되었구나.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달은 술 마실 줄 모르고 그림자는 그저 나를 따르기만 하네.

이내, 교우와 응대하지 못한 외로움의 부스러기가 얼굴에 흩어지고 있다. 초대한 적 없는 달이 이미, 술잔 속에 자리를 잡는다. 술잔에 들어앉아서 나와 함께 슬픔을, 사랑을, 고독을 공유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벗이 어디 있으리오. 투덜거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리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은은한 달빛 속에서 한바탕 춤 한 번 추는 게 뭣이 그리 손가락질 받을 일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에서 홀로 지내는 밤은 쓸쓸하고 외롭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리오. 코끝에 스치는 바람에도 흔들렸고, 소리 없는 몸짓에 가끔 떨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를 감싼 몸피가 조금씩 얇아지는 것 같았기에 봄이 오기 전, 짐을 꾸렸다.

늦은 밤, 추레한 복장으로 골목 편의점을 찾아 들어간다.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와 안방 창가에 놓곤 밖을 내다본다. 도시의 소음과 골목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메케한 그을음으로 바람은 멈춘 듯하다. 수작할 친구를 찾다 보니 하루살이도 괜찮을지 싶어 방충망을 연다. 살구꽃은 떨어진 지 오래였고, 푸릇한 연두는 메말라 가고 있었다. 한때 만개한 웃음으로, 몸짓으로 살아보고 싶었던 그날을 상기하며 빈 잔을 채운다. <수필가 최연실>

* 2023년 제 88호 가을 표현에 실린 글입니다.

최연실 수필가ⓒ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 ⓒ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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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지기 2024-04-14 10:25:53 | 1.***.***.83
참 재밌는 글이네요. 월하수작? 수작이란 단어는 수작질하다 ~~ 그런 뜻인데
작가님의 외로운 마음을 스스로 술을 벗 삼아 수작하고 있다는 말이네요.

제주싸람 2024-03-17 12:22:09 | 112.***.***.220
제주에서의 생활이 작가님에게 좋은 거름이 되었기를 바래봅니다 어디서든 늘 건강하시고 재밌고 공감가는 글로 계속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