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김해 공항 근처에는 ‘작은 마루’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가끔 그곳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며 나의 어린 시절을 꺼내곤 한답니다. 한여름의 태양열이 팔차선 도로를 달궈 뿜어낸 열기처럼 내 유년의 추억이 아른거립니다. 때마침, 스피커에서는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가 흐르고 나는 평상에 앉아 창밖으로 상영되는 영화 한 편을 관람하고 있습니다.
상도동과 봉천동이 이어지는 지점을 봉천고개라고 불렀습니다. 그 언저리에 아담한 빨간 벽돌집이 있었지요. 집 마당 한 가운데 아버지가 만든 평상이 있었고, 마당 끄트머리에는 시멘트로 만든 단상이 있었습니다. 회색의 콘크리트 단상에는 세 개의 깃발을 꽂는 구멍이 있었지요. 하나는 태극기, 다른 하나는 새마을기, 세 번째는 확성기를 달아 놓은 깃대였습니다. 매월 1일이면 새마을 노래가 확성기에서 나와 온 동네를 휘감곤 했답니다.‘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노래였죠. 아버지는 마이크를 들고 평상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며 주민들을 깨우곤 했답니다. “상도동 주민 여러분 오늘은 새마을 청소 날입니다.”라는 멘트로요. 아버지는 마을의 통장님이셨거든요.
청소가 끝나갈 무렵, 마을의 새마을 부장인 성씨 아저씨가 반 토막 난 발음으로 ‘두민 여러분,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마무리를 했습니다. 곧 이어 어머니가 평상으로 간식거리와 차를 가지고 나오셨고, 아저씨는 홀짝거리며 차를 마시곤 했답니다. 그렇게 빨간 벽돌 집 평상에서의 하루가 시작되곤 했습니다.
가끔 평상에서 아버지는 조반을 들곤 하셨지요. 상을 물리신 후, 포마이카 상을 펴고 한쪽 구석에다 옥편을 올려놓았습니다. 나무로 만든 펜대에 펜촉을 끼우고 잉크를 적셔가며 주민등록 카드를 만들곤 하셨어요. 그때는 해마다 주민 카드를 수작업으로 만들 때였으니까요. 노란색의 두껍고 빳빳한 종이 좌측 위에는 한글 이름을 썼고, 그 아래에는 한자를 썼지요. 법을 전공한 아버지는 평상에서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들어주기도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 꼭 어울리는 닉네임을 붙여주는 재주로 웃음을 선사하기도 하고, 이모부와 바둑돌 놀이도 했어요. 평상에서 해거름을 보며 밥때를 놓치기가 일쑤였답니다.
긴 마당에 그늘을 만들어 주던 등나무의 잎이 오색 물을 들일 때면 가끔 어머니가 김치전을 만들어 내 왔습니다. 반짝이는 반딧불도,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풍광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대여섯 명이 평상에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 시냇물 소리, 낙엽 지는 소리, 소복소복 눈 쌓이는 소리 심지어는 아버지의 한숨과 껄껄 웃던 소리를 평상은 담아냈습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는 평상에서 이모부와 장기를 두셨고, 나는 평상 한구석에 엎드려 책을 읽다 잠이 들었지요.
“형님 그럼 ㅇㅇ이가 타는 자전거는 뭔 돈으로 샀대요?”
“자네! 내가 그럴 사람이야?”
아버지의 거친 목소리에 나의 단잠은 달아났고, 바둑판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크고 작은 집들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꼿꼿한 아버지 자존심에 생채기를 낸 이모부가 줄행랑치듯 황급히 사라지고, 나는 깊은 시름에 잠겨 있던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그날 아버지가 화를 낸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러했어요.
아버지는 평안북도 관료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지요. 남하하여 학업을 마치고 군대에 머무셨어요. 중정부에 계실 때도 아버지는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 만년 대위로 남았던 일을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있는 이름이 또 하나 있었지요. 최 통장 말고 최 대위라는…. 그런 아버지가 예편한 뒤로 통장 일과 건축업을 병행하며 지내고 계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재개발 바람이 상도동까지 불어왔어요. 통장 일을 보시는 아버지한테 조합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혼자 깨끗한 척하고 살면 누가 돈을 갖다 준다고, 애들 생각도 해야죠?”
아랫동네에 살던 이모부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아버지를 부추기곤 했어요. 그러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목숨만큼이나 아버지가 중히 여기는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곤 했지요. 마침내 아버지는 조합장 자리를 수락했고 간간이 속 시끄러운 일에 앞장서는 일이 다반사였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이 아버지에게는 헤스터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 같은 것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는 일요일에도 자식들이 늦잠 자는 것을, 아파도 조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어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범주를 벗어나는 것을 못 견뎌하셨지요. 그러나 아버지한테도 예외라는 것이 있었지요. 겉으로는 네모반듯하며 딱딱한 건빵처럼 텁텁하고 무미건조하게 보일는지는 모르지만, 입안에 넣으면 스르륵 녹아들 듯 자식한테만은 다정다감했으니까요. 그런 아버지가 그날 이후로 평상에 앉아 있는 일도 뜸해졌습니다. 평상에서 동네 사람들의 속사정을 들어주던 최 통장도, 이모부와 바둑돌 놀이도, 그늘을 만들던 등나무도 그해 겨울을 마지막으로 마당에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심 속 평상에 앉아 꺼내 보았던 내 유년의 기억도 이젠 막을 내릴 때가 되어갑니다. 상도동의 빨간 벽돌집 마당에서 아버지 무릎을 베고 평상에 누워 있던 내 모습이 희미해집니다. 봉천동과 상도동 언저리에 들어 선 아파트 속으로 추억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군요. 깊은 시름에 잠겨 있던 아버지와 단잠에서 깨어 놀란 토끼 눈을 한 어린 딸만 무대에 남았습니다. 이제야 어린 딸이 어부바 자세로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꺼냈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수필가 최연실>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