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요즘 날씨는 변덕스러워 종잡을 수가 없다. 이번 한파와 폭설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 같아 두문불출할 남편과 나를 위해서 작은 나무판 위에 희로애락을 그려 본다.
한의 대륙 통일 이후, 유방이 한신을 감옥에 가뒀을 때 장기는 간수를 통해 전해졌다는 일설이 있다. 유방은 통일하고도 뭐가 그리도 겁이 났을까. 폭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와 준 그이의 속내가 궁금했다. 한나라의 유방과 초나라의 항우가 돌아와 장엄한 자세로 설원 속에 앉아있는 듯, 남편과 나는 거실에 마주 앉아 있다. 남편은 붉은색의 한漢을 쥐고, 나는 남색의 초楚로 장기판에 수繡를 놓듯 사뿐하게 움직여서 장기 말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수手가 높은 사람이 붉은 것을 취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혹여 내가 몇 수 위라 할지라도 그에게 붉은 한漢을 쥐게 할 거다.
“당신, 연속해서 세 판 지면 포包 떼고 두는 거 알지? 남편이 으름장을 놓는다. 나는 장기의 포진 법 중, 양귀마를 택했다. 이 상차림은 계속해서 공격하지 않으면 힘든 방어이기에 먼저 포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공격하는 장기를 두고 있었다. 실수한 척하며 일부러 상象을 내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이가 취할 거로 생각했으나 그냥 지나쳐버리는 게 아닌가. 이미 내 수數를 다 읽어 버린 게 분명했다. 결국 나는 남편에게 세 판을 연달아 지고 말았다.
남편은 포를 하나 떼고 다시 장기를 두자고 나에게 청했다. 실력이 모자란 내게 일침을 놓은 것이다. 그이는 궁 앞으로 모으는 면상面象장기로 말을 움직이고 있다. 선수비 후 공격인 면상 장기는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쉽게 할 수 없는 포진법이다. 후수後手는 약점이 많이 노출되어 집안 단속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나무판 위에 다, 현란하게 직사각형을 그리며 정신없이 상이 움직이고 있다. 주절주절 이론을 꿰고 있어도 워낙 실전에 약한 나는, 남편의 손놀림에 길 잃은 아이처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쉴 새 없이 좌·우로 움직이고 있는 눈. 말을 잡고 주춤하고 있는 검지와 중지. 잠시 고민하는 틈을 타 그이가 “ 장이야.”하고 장기판을 내리쳤다. 나는 궁宮 살릴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집단속을 하는 사士의 부재로 속수무책이다.
“두나 마나 한 판인데…. 또 세 판 지면 다음에는 차車 떼고 두는 거야.”
남편은 내게 남은 알량한 자존심마저 건드리고 있다.
한여름, 상도동 언덕에는 폭이 좁고 긴 마당이 있었다. 마당의 모양새는 장기 말 중에 상象이 가는 길을 닮은 듯했다. 대문 앞에 늘어진 등나무의 시원한 그늘이 뜨겁게 달궈진 바닥의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퇴역 장교인 아버지, 밤무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던 이모부, 두 분의 유일한 놀이는 바둑과 장기 두기였다. 그날도 아버지와 이모부는 양반다리를 하고 평상에 앉아 계셨다. 조반을 들고 난 후, 바둑으로 시작하여 이모부가 직장에 갈 시간이 임박하면 장기로 마무리하곤 했다. 공격과 방어의 추격전으로 지친 두 분에게 내가 드린 미숫가루 한 잔은 위로였었다. 어깨너머로 본 장기판 위에 인생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나에게만 장기와 바둑을 가르쳤던 아버지의 속내를 지금에서야 조금 알 것 같다.
아버지는 이기고 지는 것을 마음에 품지 않으셨기에 장기를 둘 때 말씀이 많으셨다. 장기판 앞에서 아버지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가 되곤 했었다. 뭐가 그리도 궁금한 일이 많으셨을까. 장기를 둘 때 항상 여유가 있었기에 손가락 사이에서 아버지의 장기 말은 오래도록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와 달리 매번 이모부의 손끝은 허공에서 지휘하듯이 고심하는 게 역력해 보였다. 이모부는 장기 말을 장기판에 놓다 말고“형님, 한 번만.”이란 말을 단골 삼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또 야!” 하며 목소리를 높이셨지만, 이내 “아이고 큰일 났네.” 그러시며 슬쩍 살아남는 묘수를 흘렸다. 이때를 놓칠세라 “이런 수도 있었네요? 왜 몰랐지요?” 하며 멋쩍게 웃으시며 위기를 모면한 그날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실력을 겸비한 아버지는 아니지만, 남편에게 말을 걸어 교란작전을 펴 볼 생각이다.
“여보! 저녁에는 뭐 해서 먹을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장기나 둬.”
“….”
속내를 틀긴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이는 내가 묻는 말에 응수도 해야 했고, 머릿속으론 수數도 생각해야 한다. 그이는 궁의 왼쪽에서는 차車장을, 궁 옆에 있던 포로 막게 되면 오른쪽에서는 또 내 상장이 대기하고 있다. 남편의 정신없는 틈을 타 간신히 한 판을 건졌다. 못내 아쉽던지 그이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다.
아버지는 사위 셋 중에서도 막냇사위를 각별하게 생각했다. 막내는 생각이 복잡하지 않아‘좋아라.’하셨다. 그땐 남편이 진중하지 못하다는 말씀처럼 들렸으나, 살다 보니 두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장기를 둘 때 상대의 성격이 보이고, 살아온 세월이 그려진다고 하셨다. 몇 수 앞을 내다보던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세 판 정도는 져 주셨다. 부러 장기 말을 실수로 놓아 상대를 이기게 해준 것이다. 막냇사위는 더 특별했기에 기를 세워주고 싶었으리라. 그이도 그때는 장인어른의 깊은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으나 한참 뒤에 알았노라고 이제야 실토하고 있다.
가로 열 줄, 세로 아홉 줄인 설원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립다. 남편은 그때 장기판에서 장인어른의 인생을 보았던 게 확실했다. 다행히도 포를 떼고 둔 세 판 중, 이승 일패로 끝이 났다. 두 판을 이기게 해 준 것은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일 게다.
장기를 두다 보면 여기로 가야 하나, 저기로 가야 하나 장기 말을 손에 쥐고 고민할 때가 많다. 어느 쪽으로 가든 장기 말을 놓는 순간에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한다. 단 한 번의 선택이 두던 판을 갑작스레 접기도 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묘수가 있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장기를 두었다면 내가 걸어가는 삶의 방향이 조금이나마 달라지지 않았을까. 성현의 말씀처럼 인생은 단순한 것인데 나 스스로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다. 내 삶의 매 순간이 갈림길을 만나지만, 그때마다 그이에게 오늘처럼 훈수를 청할 수 있으니 이만하면 족하지 않을까 싶다. <수필가 최연실>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