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4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4.3 소용돌이' 김호진 제주신보 편집국장, 처형 당한 이유는 '4.3 소용돌이' 김호진 제주신보 편집국장, 처형 당한 이유는 그렇다면, 제주신보사에서 제주도 인민 유격대 사령관 이덕구 명의로 인쇄되어 살포되었다는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자. 김호진 편집국장이 이덕구 명의의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인쇄해 주었기 때문에 처형당했다는 기록을 맨 처음 남긴 사람은 김봉현과 김민주(金奉鉉·金民柱 共編, 1963, 濟州島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 일본 대판: 文友社)다. 그 후 많은 연구자들이 의심없이 그들의 주장과 기록을 베끼고 있다. 우선 그들이 서술한 주요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에 따라 濟州島 人民遊擊隊 제주4.3, 김호진 편집국장 생애 | 고영철 | 2020-04-29 11:25 독립신보 기자 김호진, 1948년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등장 독립신보 기자 김호진, 1948년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등장 그가 1947년 8월 27일 독립신보 기자(사회부차장)를 그만둔 후, 제주신보 제2대 편집국장으로 영입될 때까지, 그의 행적에 관해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 후의 이력도 마판가지이다.그에 관해 궁금한 사항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김호진을 편집국장으로 기용한 분으로 알려진 박경훈 사장이 등장하기까지의 제주신보사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간략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를 보면 제주신보 창간·등록 당시의 운영체제는 주식회사도 개인기업도 아니었다. 제주민보(제주신보 전신)의 창간멤버는 김용수(金瑢洙, 20세), 이기형(李 제주4.3, 김호진 편집국장 생애 | 고영철 | 2020-04-25 15:50 1947년 독립신보 기자시절 김호진, 어떤 기사를 썼나 1947년 독립신보 기자시절 김호진, 어떤 기사를 썼나 독립신보는 1946년 5월 1일 서울 을지로 1가에서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창간된 일간신문이다. 사장은 장순각(張洵覺), 주필은 고경흠(高景欽), 편집국장은 서광재(徐光齋)였다. 창간멤버이면서 논설위원과 주필을 역임하였던 고경흠은 제주출신이다. 그는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안광천 · 한위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사회주의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한겨레 신문사, , 1992, 79쪽).이 신문에 제주관련 뉴스가 처음 보도된 것은 1946년 6월 5일자에 실린 “제주도는 명랑한 곳 /러치 장관 시찰 예찬 일석(一席)”이라 제주4.3, 김호진 편집국장 생애 | 고영철 | 2020-04-18 07:15 제주4·3의 재물이 된 김호진 편집국장의 생애를 더듬어 본다 제주4·3의 재물이 된 김호진 편집국장의 생애를 더듬어 본다 김호진(1920.∼1948. 11.)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그에 관한 기록도 거의 없다 시피하다. 그것은 그가 어느 날 제주언론계에 불현듯이 나타나, 별똥별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제주 4·3사건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하던 1948년 10월 24일 좌익무장대 최고 지휘관 이덕구(李德九) 명의의 대정부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제주신보사에서 인쇄해주었다는 혐의로 군정당국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그해 10월 31일경에 처형당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그러면 이러한 문건을 인쇄해준 혐의로 군정당국에 의해 제주4.3, 김호진 편집국장 생애 | 고영철 | 2020-04-11 07:15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