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실의 문학산책] (16)양파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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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실의 문학산책] (16)양파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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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봄비 내리는 목요일 오전으로 기억된다. “최 선생, 집에 계시는가요?” 하며 지인이 전화를 했다. 마침, 빈속을 채워달라며 배꼽시계가 앙탈을 부렸다. “점심 같이할래요?” 식사를 마친 후에 지인에게 양파 한 자루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자루에서 양파 몇 알을 꺼내 바구니에 담았다. 물끄러미 양파를 보고 있노라니 오래전에 알고 지냈던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어림잡아 십 년이나 된 것 같다. 봄이라 말하기도, 선뜻 가을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중간한 중년인 그녀는 유난히 생머리가 잘 어울렸다. 눈에 비친 그녀의 겉은 오래되고 사연이 많은 듯했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목소리로 소곤대며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했지만, 귀를 기울여 골짜기로 들어갈수록 나는 미아가 되곤 했다. 한나절이나 그녀와 함께 있어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시종일관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태생이 그랬는지, 나는 단 한 번도 그녀가 껍질 벗기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수줍어하며 미소 띤 얼굴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보이곤 했다. 한편으론 겹겹이 에워싼 철옹성을 보며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 이해하면서도 그녀가 궁금해 안달 난 사람처럼 혼자서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래서 그녀를 볼 때마다 양파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나도 양파가 되고 싶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해 봄, 나는 그녀와 또 다른 지인과 함께 서울 근교에 나들이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날 그녀가 동행한 지인에게 대나무로 만든 머리빗을 선물 받은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때 내가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침묵했던 건, 그 둘만의 이야기가 있을 거야 하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날 그녀의 볼은 낮술에 취한 복사꽃처럼 발그레했다. 동화 속 유리 구두의 주인이 된 신데렐라처럼 자그마한 머리빗을 쥐고 행복해하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녀가 그날 겹겹이 껴입고 있던 옷을 내 앞에서 벗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후로 나는 그녀와 그날 동석한 지인과 함께 서너 번 본 것이 전부였다.

행복하고 달콤해 하던 그녀를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밀봉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 영원히 묻혀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내 세 치 혀로 열고 만 것이다. 언제나 호기심의 단초는 눈目에서 시작했다. 그녀의 속을 보고 싶어 고개를 쳐들었고, 혼자 간직하고 싶어 했던 뚱뚱한 속내를 드러내라고 다그치던 내 행동에 그녀는 내 곁을 떠났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알싸한 한 방을 얻어맞고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그리 많은 옷을 입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개수대에 양파를 놓았다. 속에 감춰진 진실을 보려고 유채색의 장막을 걷어냈다. 그리고 자연과 한솥밥을 먹었던 고리도 인간의 욕심으로 단숨에 잘렸다. 다음은 오늘의 의식을 치르려고 구석구석 깨끗하게 오욕을 씻어 냈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단두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자신의 운명이 시퍼런 칼로 결정 날 것을 알고 있기나 한 건지 명상에 잠겨 있다. 이내 뚱뚱한 몸의 중심축이 흔들렸다. 그리고 속을 보이라고 채근하는 날카로운 날에 체념하고 그리도 단단하고 견고하던 철옹성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파편처럼 튕겨 나간 조각들이 내게 말을 건넸다. 살아내는 것은 쉬운 게 아니라며 무언의 원망과 묵언의 암시로 내 눈과 코를 자극했다. 토막 난 육신의 조각들이 백도를 넘나드는 작은 옹기 안에서 죄명도 모르는 채, 그렇게 한마디의 말도 못 한 채, 사그라들었다.

제대로 우려 났을까. 양파를 넣고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식탁에 놓았다. 구수하게 우려 난 양파의 단 내음이 내 코를 자극한다. 한때 나도 양파가 돼보고 싶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지금 나에게 말한다. ‘ 나는 양파가 될 수 없어,’하며, 또 한 편의 소설을 쓰는 중이다. <수필가 최연실>

최연실 수필가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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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남 2023-03-09 14:56:54 | 110.***.***.15
가끔 그렇게 생각될 때가 있어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요. 그러나 있는 그대로 봐주고 기다려야 하나 봅니다. 그것이 관계의 기본일까요? 자연처럼요. 양파를 벗겨봐도 아까보다 더 깨끗하고 달콤한 양파의 한 단면~~ 더 깊은 뜻은 무얼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양파링 2022-11-01 09:33:45 | 112.***.***.220
살아내는 것은 쉬운게 아니라며 눈물 핑돌게 한방 먹이고 가는 양파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