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실의 문학산책] (23) 나의 꽃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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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실의 문학산책] (23) 나의 꽃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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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티브이 속에 꽃이 핀 걸 보고서야 봄이 온 걸 알았습니다. 서울서는 봄소식을 듣기에는 아직 부족했거든요. 겨울의 잔재가 남아 있음에 ….

매화 축제에 동참하고 싶어 경남 양산으로 향했습니다. 원동면 영포리 매화마을 순매원에 도착하니, 매화는 서울깍쟁이 아낙네를 기다려 주지 않았답니다. 매화는 거의 다 지고 입소문에 때를 놓친 사람들로만 북적였습니다. 삼삼오오 길을 거닐며 봄날을 맘껏 노래하고 있더군요.

매화를 좋아한 나는, 언 땅에 뿌리를 내리고, 고운 꽃잎을 수줍은 듯 당차게 피어나는 것을 볼 때면, 춘고초(春告草)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들곤 합니다. 꽃말은 인내, 고결한 마음이라고 한다지요.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고, 은은한 향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런 매화를 순결한 처녀에 비유하기도 하면서요. 매화의 잎은 행운과 운수를 보는데 사용됐다는 일화도 있는 것 같았어요. 사군자 중 으뜸인 매화는 군자의 덕과 선비의 기품을 나타내곤 한다지요. 그런 이유인지 옛날 선비들의 그림이나, 글에 등장한 걸 종종 보곤 했습니다.

매화의 종류가 참 많기도 하더군요. 일곱이나 된다고 하네요. 그중에서도 백매화, 홍매화, 황매화로 여인네의 사랑에 비유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백매화가 피어 있는 걸 볼 때마다 갓 시집온 새색시가 떠오르곤 합니다. 손끝만 닿아도 수줍고 가녀린 여인의 사랑이 생각나더군요. 나도 백매화같이 앳되고 수줍음이 한창일 때, 붉은 볼에 연지곤지를 찍고 백년가약을 맺었답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라고 남편이 타박을 주면 얼굴에는 붉게 홍조가 생기곤 했답니다. 그리곤 괜스레 며칠씩 고집을 부리기 일쑤였기에, 보채는 어린아이 달래듯, 봄이 되면 남편은 매화 축제에 나와 어머니를 데리고 다녔답니다. 그땐 내가 아이였나 봅니다. 지난 일은 까맣게 잊은 채 속없고, 철없는 어린애가 되곤 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홍매화는 사랑의 깊이를 조금 느낄 수 있는 여인의 모습이랄까요. 남편은 좋은 남자였습니다. 아들이 귀한 집안으로 시집와 마음이 척박했던 내게, 한없이 관대했고, 시어른들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든든한 울타리였다는 것을 어찌 모를까요.

꽃말처럼 황매화는 굴곡을 다 겪은 숭고한 사랑으로 비유해 봅니다. 지나친 건 아니겠지요. 이젠, 모든 게 조심스럽습니다. 남편과 나는 가야 할 길은 멀고, 넘어야 할 산도 몇 고비가 남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황매화처럼 농익은 빛을, 숭고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요. 어찌해야 이 사랑을 잘 빚어낼 수 있을까요. 그게 내게 남은 마지막 그림입니다.

오래전에 어머님을 모시고 갑사에 다녀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나긴 겨울을 이겨내고, 푸릇한 잎과 함께 핀 황매화가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가는 길에 만발하였답니다. 일찍이 홀로되어 자식들을 키우고, 당신 손으로 살림을 내신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그 누구보다도 각별했지요. 그래서인가, 나 모르게 아들의 팔짱을 끼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빙그레 웃으시면서 슬그머니 팔을 빼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날, 어머님의 웃는 모습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내게 미안한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며느리 속이나 좀 태워나 볼까 하는 심사였을까요? 어머님을 모시고 여행하는 날만큼은 아들 역할에만 충실했던 남편으로 속상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요. 그땐, 어머니를 여자로 생각했던 게 아닐까요. 아이가 생기고, 품에 보듬으니 자식이 얼마나 애틋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어리석음도 조금씩 치유가 되고 있습니다. 매화를 좋아하셨던 어머님이 우리 부부 곁을 떠 난지도 올해로 십 년째 접어들었습니다. 남편은 어머님 산소에 홍매화와 청매화를 몇 그루 심어 드렸습니다. 어머님의 그리워하는 남편의 선물이겠지요. 아마도, 어머님과의 추억을 그리워하고픈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거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습니다.

차고지로 돌아가는 길이 꽃비를 맞으며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한결 가볍습니다. 지금껏 잘 살아내진 못했지만, 사는 동안 버거웠지만, 앞으로 남은 날을 헤아릴 순 없지만. 한 번 살아 내려합니다. 미나리와 딸기도 한 바구니 담았습니다. 집에서 기다리는 남편을 위해 미나리 초무침으로 솜씨를 좀 부릴까 합니다.

남편에게 ‘이 해인’님의 매화 옆에서’란 시구를 내 머리 위에 살포시 앉은 꽃비처럼 핸드폰에 얹습니다.

해마다/첫사랑의 애틋함으로/제일 먼저 매화 끝에/피어나는 나의 봄/ 살아갈수록 겨울은 길고/봄이 짧더라도 열심히 살 거란다. <수필가 최연실>

최연실 수필가ⓒ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 ⓒ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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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영 2023-03-27 13:37:43 | 112.***.***.220
향기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벚꽃이 한창이지만 벚꽃보다 매화를 좋아하는 저는 초봄부터 매화를 만나면 너무 기분이 좋고 항상 인사를 나눈답니다. 향기롭고 사랑스럽고 귀한 매화를 닮은 삶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