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을 추억하면서 음악을 듣다 보면 불현듯 그 음악을 들었을 때의 계절이나 주위 환경등이 떠오르곤 한다. 고전음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한참 고전음악에 심취되었던 청년시절, 맑고 싸늘한 겨울 공기를 맞으며 듣곤 했던 곡들이 주로 라흐마니노프 곡이었기 때문인지 겨울엔 꼭 라흐마니노프를 만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영롱하게 빛났던 시절이었고 사랑을 꿈꾸고 정의를 부르짖고 실존을 논하던 청춘에 들었던 곡들이라 더욱 가슴 한켠에 떨어질 수 없이 달라 붙어 있는 곡들이다.
명동의 고전음악다방 티롤의 나무 계단은 항상 삐끄덕거렸고 문인들이 다녀간 탁자는 온통 담뱃불로 상처 투성이었다. 사각거리는 눈소리와 함께 겨울이 깊어갈 무렵, 티롤에서 처음 만났던 라흐마니노프는 십대 말의 소녀에겐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 무렵 화제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라흐마니노프로 도배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의 곡, 교향곡 1,2,3번과 교향시 죽음의 섬을 비롯해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피아노협주곡 1,2,3번 등 거의 모두 외우다시피 들으면서 그가 추구했던 종교적 색채와 우울함이 감도는 죽음의 문제 그리고 러시아적 애수를 깊이 탐닉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처음 만났던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는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설렘과 환희를 안겨주었다. 분명히 슬픈 애수가 담긴 음률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슬픔의 밑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투명한 선율인데 환희라니... 그런데 이 또한 맞다. 그 당시엔 설레임이 이는 슬픔이었으니까.
보칼리제는 가사가 없는 성악곡으로 가사대신 모음(아에이오우)의 한두 개를 가지고 부르는 곡을 말한다. 바로크나 고전주의 시대에는 거의 없던 형태로 낭만주의로 넘어오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형태의 곡이다. 따라서 꼭 라흐마니노프만 보칼리제를 작곡한 것은 아니다. 가브리엘 포레나 라벨 또는 스트라빈스키 등의 작품에서도 보칼리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보칼리제는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다. 1912년 라흐마니노프는 열 세곡의 가곡을 모아 작품번호 34번으로 출판했고 하나를 더 보태 마지막 곡 14번을 보칼리제로 작곡해서 올리게 된다. 가사가 없는 노래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악기들의 연주가 자연스럽다. 반주도 피아노반주 뿐 아니라 관현악반주도 잘 어울린다. 흐르는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가장 잘 어울리는 악기를 만날 수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은 첼로의 선율을 따라 올 악기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슬픔의 내면을 노래하는 선율의 악기이므로 그렇다.
손의 사이즈가 보통 사람보다 확연히 컸던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다. 1873년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났지만 뉴욕과 캘리포니아를 오가며 활동했고 베버리힐즈에서 사망한 낭만주의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 작곡가다. 잘 알려진 일화로는 교향곡 1번 발표후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이로 인해 우울증이 극도로 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극복하게 해준 곡이 세기의 역작 피아노협주곡 2번이고 결국 이 곡은 그의 우울증을 치료해 준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되었다. 피아노협주곡 2번은 많은 고전음악 애호가들에게 사랑받는 곡일 뿐 아니라 영화에 삽입된 음악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라흐마니노프를 대표하기에 손색이 없는 곡이다. 1악장의 처음 부분을 들으면 추억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곡이다.
그런데 보칼리제는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 라흐마니노프의 스승이었던 아렌스키의 손길이 그림자처럼 스치는 곡으로 슬라빅한 애수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곡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아렌스키의 피아노3중주의 3악장 엘레지(Elegy)를 연상시킨다면 그리 틀리지 않은 표현일 것이다. 음 하나하나는 다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너무 흡사하다. 특히 이 곡, 보칼리제가 이 시기에 떠오른 이유는 지난 3년간 유명을 달리한 주위의 지인들을 기억하면서다. 아프지도 않았고 다치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진 사람들. 아직도 우리의 기억엔 또렷이 존재하고 전화기의 컨택리스트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름들,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그들을 보내야 하며 그들과의 좋았던 추억을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남은 자로서 우리 자신의 슬픔을 달래야 한다. 이때 떠오른 곡이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였다.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연주는 언제 들어도 일품이다. <정은실/ 칼럼니스트>
*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와 제휴를 맺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뉴욕일보>에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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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실 칼럼니스트는...
서울출생. 1986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감.
2005년 수필 '보통 사람의 삶'으로 문학저널 수필부문 등단.
2020년 단편소설 '사랑법 개론'으로 미주한국소설가협회 신인상수상
-저서:
2015년 1월 '뉴요커 정은실의 클래식과 에세이의 만남' 출간.
2019년 6월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산책' 출간
-컬럼: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클래식이 들리네' 컬럼 2년 게재
뉴욕일보에 '정은실의 영화 속 클래식' 컬럼 1년 게재
'정은실의 테마가 있는 여행스케치' 컬럼2년 게재
'정은실의 스토리가 있는 고전음악감상' 게재 중
-현재:
퀸즈식물원 이사, 퀸즈 YWCA 강사, 미동부한인문인협회회원,미주한국소설가협회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소설가협회회원, KALA 회원
뉴욕일보 고정 컬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