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의 질문: 이것은 예술입니다
올해는 일찍 개화했던 제주의 벚꽃이 거의 질 무렵, 고영훈 예술가의 서울 작업실을 방문했다. 오름 높이의 정상에 있는 작업실을 올라가는 자동차 안, 북악산 언덕에 활짝 핀 벚꽃이 드러나고 있었다. 벚꽃을 오래 보았던 봄날이다.
고영훈 예술가(b.1952, 제주)는 의미와 가치를 갖게 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왜’라는 화두를 던진다. 찰나에서 출발하여 시공간을 연결하고 순환고리를 만들어서 예술정신을 형상화하고 있다.
화두의 주제는 ‘존재(예술의 본질)’이다.
이것은 ‘실존’으로 출발하는데, ‘인간은 무엇인가’ - ‘이것은 무엇인가’ - ‘존재는 무엇인가’ - ‘나는 무엇인가’로 이어지고 있다.
고영훈의 근원이 되는 작품은 홍익대학교 3학년 때로 1974년부터 시작하여, <군화, 코트, 청바지, 코카콜라> 등을 그렸다. 현상에 관하여 ‘실존’을 묻는 것이다.
허공에 떠 있는 <코트>를 그렸다. 코트는 인간에게 의복의 역할로 물체이지만, 그 코트를 입은 사람의 역사적 의미로서 구체적 사실과 형상을 만들고 실존이 된다.
파랗게 나열한 <코카콜라> 중간에 매우 사실적인 코카콜라 한 병이 그려 있다. 팝아트의 형식을 취한 이 작품은 획일적인 사회에서도 한 개인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가 <이미지들의 배반>(1929년)에서 파이프를 그리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적은 작품은,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파이프의 재현일 뿐이지 실재 파이프와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술에서 재현(representation)은 사람이나 장소 또는 사물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을 말한다]
1974년도 고영훈 작가는 미술에서 ‘재현’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 출발하여 ‘일루전(환영)’을 통한 예술의 본질을 다룬다.
[일루전(illusion. 환상/착각)은 예술 작품을 볼 때 일어나는 심적 과정의 하나로 의식적인 자기 착각 / 회화는 평면 위에 그린 것이지만 마치 실재의 사물에 있는 입체감, 원근감, 공간감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일루전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돌’을 그리고 <이것은 돌입니다.>라고 하면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자신의 예술철학을 찾게 된다. 예술의 본질을 질문하게 되는데, 고영훈의 작품을 들여다보는 시작 지점을 만난다.
“잠시 드러나는 것들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석했을 때 비로소 돌로 존재합니다.”
잘 그려진 돌로 인식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호소하는 돌의 존엄성을 발견해야 한다. 정신세계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존재한다. 사전적 의미의 돌이 아니라 예술가인 고영훈이 명명한 진짜 돌이라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합하여 정신적인 개념을 만들어 내며, 돌은 ‘인간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고영훈의 작품을 주요 소재별로 분류하자면,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십 년 주기의 연대별로 나뉜다.
1970~1979년 - 돌을 그린 시기로 <This is a Stone. (이것은 돌입니다.)>
1980~1989년 - 책 위에 있는 돌 <Stone Book (돌 책)>
1990~1999년 - 책 위의 돌과 함께 새의 깃털, 타자기 등 다양한 오브제 <자연법>
2000~2009년 – 책 위에 <꽃과 나비>
2010~2019년 – 한국의 <사기, 도자기, 달항아리>
2020년~ – <달항아리> (2020년대의 시작으로, 2021년 4월 개인 전시의 작품)
◇ 확장하는 일루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980~1989년도의 <Stone Book> 시리즈에서 책의 낱장들이 날아다니면서 돌과 책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낸다. 역사는 모든 것을 기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함축되고 숨겨지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표현하면서 해석하는 것이다. 구조와 체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이것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Stone Book>에서의 캔버스는 삶의 체계이자 바탕이 되고 그 위에 콜라주한 실제 책은 문명을 상징한다.
인간은 문명 속에 살아가는 돌로 드러난다.
그림자는 진동하는 끈(string theory)으로 연결하는 사회의 네트워크이자 다리 역할을 한다.
1990~1999년도 등장하는 오브제는 삶의 모습처럼 다양하다. 각기 다른 메타포(metaphor)가 드러나면서, ‘존재는 무엇인가’의 질문으로 삶에 관한 실험이 가득했다.
타자기는 글자를 만드는 도구로 문명을 만들기 위한 시스템이다.
넥타이는 샐러리맨의 고충과 무게를 표현했다.
냄비는 결혼하고 처음 라면을 끓인 것으로 그린 것이다.
새는 생명을 상징하는데 주로 한쪽 날개만 표현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과 힘듦이다. 고통은 당연한 것으로, 반복하고 지나간다. 자연의 순환처럼.
이때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한 악기 작품에서 처음으로 꽃이 등장한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징표로 그림을 그리면서, 색소폰을 그리는데 꽃을 꽂았더니 생기를 찾았다.
작가는 문명이라는 큰 바이블(bible)에서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내부의 성숙한 사고와 가치로 올린다. 기법적으로는 처음부터 구상회화로 시작하면서 이왕이면 더 구체적이고 더 사실적인 것으로 고집하고 있는데, 돌을 찍은 사진과 같다고 착각하는 게 당연하다. 고영훈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극사실주의 회화의 선두에 있다.
“나는 위대한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중요성을 얘기하다 보니 가족과 주변 그리고 관계 맺는 것을 작품으로 했어요.”
고영훈은 끊임없이 예술의 본질을 질문한다.
한라산이 지금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처럼 느끼지만, 한라산은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 관념의 미술: 통찰
2000년도 이후의 화면은 자연의 색을 강조하여 시야가 밝아진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나는 무엇인가’의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다. 본격적으로 책 위에 호박넝쿨, 작약, 수국 등의 꽃과 함께 나비를 그렸다. 고영훈 작가가 아버지의 존재를 예술로 변화시키면서, 대상과 소재에 대한 인식의 폭을 ‘고르게, 하나로, 가지런히’ 하는 것으로 왔다.
이제 책이 사라지고, 대상(존재)은 캔버스를 채운다. <This is a Stone> 시리즈의 작품 경향과 비슷한 시기로 한국의 사기, 도자기가 등장한다.
고영훈의 작품에서 대상을 표현하는 미술 기법은 극단적인 사실적 묘사이다. 그런데 2010년대에 와서는 대상을 흐릿하게 표현하는 기법을 함께 사용한다. 사기, 도자기, 달항아리를 그린 이 시기에는 단순하고 투박한 그릇과 함께 용 문양이 있는 화려한 도자기도 눈에 띈다.
이 시기는 보이지 않았던 존재를 정신으로 해석하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입한다. 희미해진 기억을 뚜렷한 것과 배치하여 존재의 실체가 흘러가게 두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의 존재를 앞면과 뒷면, 위와 아래에서 보는 방향까지 다양하게 혼합하면서 시선을 입체화시켰다. ‘나는 무엇인가’의 질문이 발전하여 입체적인 개념으로 변화하였다.
2020년대가 시작했다.
이제, 존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고 시간과 공간의 모든 것으로 자유롭게 확장한다.
<This is a Stone> 시리즈에서는 오늘, 바로, 지금의 찰나를 표현했다면, 입체적인 개념의 ‘나’는 멈춰진 순간을 넘어 시공간으로 부유한다.
흐릿하게 표현한 경우, 세 개의 오브제가 함께 있는 것이 있다. 매우 흐리고, 매우 뚜렷한, 조금 흐린 상태로 나열한다.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면서, 드러남과 사라짐을 통해 존재의 시공간 변화를 설명한다. 또한, 각 존재의 개념을 보여주면서, 결국에는 하나의 존재(일원론)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동시성과 관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고영훈 작가가 화두를 던진 순서의 질서처럼, ‘실존’에서 출발한 질문이 ‘나는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것과 같다. 존재의 형상들은 무엇이 속에 가려져 있거나 잘 보이지 않았다가 잘 보이게 되는 ‘드러나는’ 시점의 형식이다.
고영훈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2020년도는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작품 속에 사용한 모든 대상(오브제)을 대하는 상황이 변화했다.
2020년도에 완성한 <만월>의 달항아리는 실체가 없다.
제주의 돌은 반출이 되지 않는 관계로 주변에 있는 돌을 가져와 그렸지만, 정신은 제주와 함께한다. <만월>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렸지만, 작가의 예술세계에서 시공간을 넘나들고 있다.
붓으로 흙을 밟고, 불을 지펴서, 깨지지 않는 아름다운 달항아리를 만든(그린) 것이다. 이러한 작품을 지속한다면 고영훈 작가에게 ‘새로운 시대’의 전개가 펼쳐질 텐데, 구상 속 추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구상에서 ‘관념과 개념’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이 세상은 기로 가득 차 있다.
쉽게 말하면, 기는 에너지의 바다이다. 에너지의 바다는 이 세상이다.
존재가 뚜렷하게 손에 잡힐 듯이 잠시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사람도 잠시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고영훈의 작품에서 ‘존재’가 변화한 흐름으로 보자면,
1970~2009년까지 공간과 체계에서 보이는 것을 뚜렷하게 그렸고, 따라서 대상(존재)은 ‘나는 여기 있다’라고 한다.
2010~2020년도는 존재가 여기 있는 것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 뚜렷한 것과 흐릿한 상태가 공존한다. 이 시기 존재는 ‘나는 공간이다’라고 얘기한다.
2020년도 이후부터는 실체의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그렸으며, 관념의 미술로 흐르고 있는데 ‘시공간을 담은 존재는 부유한다.’ 이 존재는 분명한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서 아주 연하고 흐린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다. 부유하는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장치로 당신의 자존감은 스스로 찾아야 하고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처럼.
2020년대의 새로운 시대는 꿈을 꾸는 이상의 실현을 위해 생각하는 정신적 아름다움의 가치를 만들어 냈다. 작가의 관념 표현으로 심적 상태의 운동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지만 캔버스에서는 극사실적인 작품을 확인할 것이다. 동시에 화면에서도 추상적인 표현이 등장할 수 있다고 본다. 아름다움도 변화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도 잠시 드러나는 것이다.
우주가 생성한 것을 목격한 존재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의 자연과 이 모든 아름다움은 사실이다. <한정희 예술감독>
▶고영훈 예술가는 가나아트 전속 작가로, 7년 만에 서울 가나아트 나인원과 사운즈에서 ‘관조’ 개인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먼저 시작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시대를 보는 눈 : 한국근현대미술’에서는 극사실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가로 선정되어 2022년 7월까지 감상할 수 있다.
▶198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 최초로 고영훈, 하동철 작가가 참가했다.
▶아르코예술기록원의 한국 미술작가 500인에 선정된 고영훈 작가는 미술시장에서도 스타작가이다.
▶국내·외 다수 유명 기관과 컬렉터가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네덜란드의 베아트릭 여왕과 미국 디트로이트미술관도 포함되어 있다.
▒ 고영훈 작가소개/작품/평론
* 예술자료원 : 아르코예술기록원 <미술작가 500인> - 고영훈
http://www.art500.or.kr/koyounghoon.do
▒ 추천 전시
* GANA ART NINEONE & SOUNDS
‘KO YOUNGHOON(고영훈)’ - 觀照(관조) : Contemplation
04/15/2021 ~ 05/09/2021
https://www.ganaart.com/exhibition/ko-younghoon
가나아트 나인원: 서울시 용산구 한남대로 91 고메이 494 한남 103호 (02-795-5006)
가나아트 사운즈: 서울시 용산구 대사관로35 사운즈 한남 13호 (02-395-5005)
* 국립현대미술관 - 과천
‘시대를 보는 눈 : 한국근현대미술’
2020.07.21. ~ 2022. 07. 31.(2년 예정)
장 소 : 과천 3, 4, 5, 6전시실 및 회랑
작 가 : 250여 명
작품수 : 회화, 조각, 미디어, 사진 등 전 부문 300여 점
관람료 : 무료
http://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Id=202001090001236
<한정희의 '행복한 미술'> 코너는?...
한정희의 '행복한 미술'은 다양한 기관의 전시 · 기획자 · 작품 · 작가 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문화·예술인들의 지위를 향상하면서 미술의 사회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한 취지에서 연재합니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행복을 찾는 과정에서 미술이 촉매제가 되기를 바라면서, 연재를 읽고 작품을 감상하는 계기 마련과 미술을 통해서 개인의 행복한 일상을 마주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한정희 아트 디렉터가 총괄 기획한 전시로는, 2020 아트페스타in제주(5th), 2019 제주국제평화센터 ‘평화의 꿈’ 및 'DMZ 평화 생명의 땅', 2018 제주해짓골아트페어, ICC JEJU 제주2015쇼케이스 '아트&아시아', 2015 서귀포예술의전당전시실개관기획전 '서귀포에 살다', 2015/2016 서귀포시교육발전기금마련전 등이 있다. 이와 함께 다양한 문화 기획, 언론 기고, 미술 연구조사, 미술 강의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한정희 예술 감독
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미술관·박물관학과 졸업
예문사 「학예사를 위한 소통하는 박물관」 공저
제8기 제주특별자치도 축제육성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