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사람은 덕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덕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내면의 두툼한 어떤 것을 표현한다 하지요? 봉사, 헌신, 인자함, 자애로움, 이해심, 배려 그리고 포용력 등이 덕이라는 단어의 둘레를 감쌉니다.
덕이라는 개념은 중국의 고대 주나라 때 생겼습니다. 그런데 덕이라는 건 주나라 이전의 은나라 때까지는 없던 개념이다.
그런 은나라, 즉 상제로부터 지배권을 받은 나라가 주周라고 하는 새로운 세력에게 멸망을 당한다. 모든 일을 상제가 결정하는데, 상제가 세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황당함은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에게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러니 멸망한 나라에게나 건국한 나라 모두에게 역사의 교차 지점에 서서 각각 멸망과 건국을 정당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덕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집니다. 상제의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옮겨왔다면 무엇을 근거로 옮겨 왔을까요. 바로 덕입니다. 은나라는 상제의 명령을 받아서 나라를 유지했지만 덕을 상실하여 상제 마음이 떠났다.
그런데 은나라와는 달리 주나라는 덕을 가지고 있어서 상제의 뜻이 주나라로 옮겨 왔다는 도식입니다. 이제 중국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덕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각도에서 인간을 설명하고 인간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범주로 등장했습니다. 덕이 있어서 비로소 인간이 되기 시작했다.
신의 부속물이나 신의 그림자에서 자기 고유의 존재성을 가지려고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이란 자기를 자기이게 하는 가장 밑바탕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신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자신만의 근본적인 작용능력이다.
일본에 스모의 신으로 불리는 선수가 있었다. 후타바야마다. 후타바야마는 현재까지 일본 스모 역사상 최고인 69연승의 기록을 이을 70연승의 대기록을 눈앞에 주고 좌절한다. 70연승에 실패한 후 바로 지인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쳤다. 내가 나무 닭의 경지를 지키지 못했다. 나무 닭(木鷄)은 『장자』 「달생達生」 편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투계를 좋아 하는 왕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닭을 가지고 기성자를 찾았다. 기성자는 닭을 잘 훈련시키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기성자에게 왕은 자신이 가지고 간 닭을 백전백승의 싸움닭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열흘 후에 왕은 기성자를 찾아간다. 닭이 잘 훈련되었는지를 묻자 기성자가 말한다. 아직 덜 되었습니다.
이에 왕이 왜 아직 덜 되었다고 하느냐고 묻자 기성자가 말한다. 닭이 허세가 심하고 여전히 기세등등합니다. 그래서 아직 부족합니다. 열흘 후에 다시 오십시오. 왕은 돌아갔다. 열흘 만에 와서 다시 묻는다. 이제는 되었느냐? 이제 백전백승할 수 있는 닭으로 길러졌느냐? 기성자가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이 닭은 아직도 다른 닭의 울음소리나 다른 닭의 날갯짓하는 소리만 들어도 싸우려고 덤빕니다. 그러나 아직은 안되겠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 정도라면 투계로서 굉장히 잘 길러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성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왕은 이번에도 그냥 돌아서고, 다시 열흘 후에 찾아온다.
그리고 묻는다. 이제 되었느냐? 기성자가 그때서야 이제는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러자 왕이 묻는다. 무엇을 가지고 지금은 되었다고 하느냐? 그러자 기성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닭이 울고 날갯짓하는 소리를 들어도 꿈쩍도 안 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그 모습이 나무로 만들어 놓은 닭 같습니다. 이제 덕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다른 닭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도망가버립니다. 기성자의 마지막 한 구 덕이 온전해졌다(德全)는 말은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힘이 완벽한 상태에 들어갔음을 뜻한다. <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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