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의 제주감귤 이야기] 어른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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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의 제주감귤 이야기] 어른의 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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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헤드라인제주
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헤드라인제주

일반적으로 어른이라고 하면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점차적으로 고령화 추세가 강하면서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 어른의 위상에 걸맞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어른의 덕목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장자 우언(寓言篇)에 어른에 대해서 말하기를 어른이라는 말은 질서가 안 맞고 나이가 많은 것으로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한다면 앞선 사람 즉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른이라 하면서 하는 생각이나 행동의 본말 경위가 맞지 않으면 어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른이라면 나이만 갖고 덤비지 마라. 진짜 어른 대접을 받으려면 나이만 갖고는 안 된다 연선의 이무경위본말이기년기자 시비선야(年先矣 而無經緯本末以期年耆者 是非先也). 어른이 되려면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들 보다 나은 것이 있어야 된다 인이무이선인 무인도야 (人而無以先人 無人道也). 나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장자가 보기에는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른들이 나이만 갖고 함부로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어른이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길은 모범을 보여야한다. 말로 모범을 보이려고 하면 꼰대가 되고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공공질서 잘 지키고, 독서를 하고, 신용을 지켜야 한다. 예의를 지켜야 한다. 행동거지에서 젊은 사람들 보다 더 나아야 된다. 더 단정해야 된다. 더 의연해야 된다. 더 많이 반성하고, 더 많이 경험해야 한다.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나은 것이 없고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안 지키는 사람은 진부한 사람이다 인이무인도 시지위진인(人而無人道 是之謂陳人). 아주 낡은 사람이다. 사소한 사람이다. 별것 아니다. 술잔에 담기는 술 같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하는 말을 치언(巵言)이라고 하는데, 이 치언은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등장한다. 치언일출(巵言日出).

그래서 우주의 본래 모습 사태의 진실과 잘 맞게 된다 화이천예(和以天厓). 사태가 이리 풀리고 저리 풀리고 이리 가고 저리 가고 하는 것에 따라간다. 술잔이 네모 모양이면 네모 모양이 되고, 술잔이 원뿔 모양이면 원뿔 모양으로 채우고 세상이 펼쳐지는 데에 자기를 맡긴다 인이만연(因以曼衍). 그러니까 천수를 누리는 것이다 소이궁년(所以窮年). 딱 정해서 말하지 않으면 세상의 흐름과 가지런히 잘 맞게 된다 불언즉제(不言則齊). 세상에 조화로운 일과 딱 정해서 하는 말은 일치하기가 어렵다 제여언 불제 언여제불제야(齊與言不齊 言與齊不齊也) 그러므로 딱 정해서 말하지 않는다(故曰言無言).

일반적으로 덕이란 단어를 가지고는 내면의 두툼한 어떤 것을 표현한다. 봉사, 헌신, 인자함, 자애로움, 이해심, 배려 그리고 포용력 등이 덕이라는 단어의 둘레를 감싼다.. 덕이라고 하면 흔히들 이처럼 도덕적 가치와 깊이 관련시켜서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두 두 영웅을 대비시켜 볼까 한다. 조조는 덕 보다 재주나 권모술수가 뛰어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말 유비만 덕이 있고, 조조는 덕이 없을까. 조조에도 덕이 있다. 우선 덕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것의 정체를 먼저 파악해 보고자 한다. 유비는 기존의 이념에 충실했다. 이미 가지고 있던 기존의 관념으로 변화하는 역사를 대했다. 반면에 조조는 역사의 흐름 그 자체를 수용했다. 기존의 이념과 관념으로부터 강하게 지배받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를 정확히 판단하고 역사흐름에 맞는 정확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천하를 차지했다.

덕이라는 개념은 중국의 고대 주나라 때 생긴 개념이다. 덕이라는 건 주나라 이전의 은나라 때까지는 없던 개념이다. 주나라 때 와서야 생겼다. 신(神)인 상제(上帝)가 인간이나 자연도 만들어서 지배하고, 제도나 가치도 만들어서 은나라로 하여금 중국을 지배하도록 정해준 제정일치 국가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상제로부터 지배권을 받은 나라가 주(周)라고 하는 새로운 세력에 멸망을 당했다. 상제로부터 지배권을 받은 은나라가 망하리라는 누구도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모든 일을 상제가 결정하는데, 상제가 세운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멸망한 나라에게나 건국한 나라 모두에게 역사의 교차 지점에 서서 각각 멸망과 건국을 정당하게 설명할 필요가 생겼다.

특히 건국한 나라에게는 새로운 건국의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했었다. 그 시대의 정당성 확보란, 바로 건국을 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덕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진다. 은나라는 상제의 명령으로 나라를 받아서 나라를 유지 했지만 덕을 상실하여 상제의 마음이 떠났다. 그런데 은나라와 달리 주나라는 덕을 가지고 있어서 상제의 뜻이 주나라로 옮겨 왔다는 도식이다. 덕이라는 개념의 출현은 최소한 중국 역사 속에서는 인간이 주도권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최초로 조심스럽게 연 계기가 된 것이다. 달리 말해, 신에 대하여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최초로 드러낸 것이다. 이제 중국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덕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각도에서 인간을 설명하고 인간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범주로 등장했다.

덕이 있어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기 시작했다. 신의 부속물이나 신의 그림자에서 자기 고유의 존재성을 가지려고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천명(天命)이 눈여겨보아야 할 정도로 지위가 상승했다. 공자는 주감어이대, 욱욱호문재, 오종주(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공자는 나는 주나라는 하나라와 은나라를 거울삼아 참고하였는데 인문적 특색이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주나라를 섬기고 따르겠다. 인간이 이 세계에 대한 책임성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역사·문화·문명 속에서 점점 책임감 있는 존재로 등장하게 된다. 인간이 역사·문화 속에서 책임감 있는 존재로 책임감을 발휘하고 주도권을 발휘하는 활동들을 문화라고 한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文라고 한다.

인간은 세계와 관계하는 전략을 구사하는데 불을 사용하다가 기하학적 도형을 사용하다가 혈연을 사용하다가 하느님(上帝)을 사용하다가 덕을 사용하다가 도를 사용하다가 과학을 사용하는 과정으로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지위가 상승 되어왔다. 인간은 지위를 한 번도 낮춰본 적이 없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지위 상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왜 인간의 지위가 상승되었느냐 하면 인간이 보편적 근거와 기준을 갖고 세계와 관계하는 과정에서 모든 제도와 동식물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해석하게 되었다. 제한된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자기를 이해하고 해석하여 인간의 지위가 상승되고 집단이 상승되다가 집단이 분열되어 개인이 상승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상승역사이다. 노자는 함덕지후 비어적자(含德之厚 比於赤子), 곧 두터운 덕을 가지고 있는 상태는 어린애와 같다 라고 했다. 어떤 의지나 이념이나 신념이나 가치관이 아직 틀로 형성되기 이전에 인간이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마음의 상태, 그 것을 노자는 덕이라고 했다. 바로 지식과 이념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 오로지 나로만 존재할 때의 본래적인 상태이다. 애써 꾸미거나 의도한 게 아니라 본래적인 것이라면 툭하고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 좋은데, 덕이 없어! 라는 평가는 어떤 한 사람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무너뜨리는 말인 것이다. 아주 무서운 말이다. 능력은 있으나 아직 사람이 덜 되었다는 뜻이거나, 지식은 있더라도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흔히들 덕성을 먼저 갖추는 것이 재주나 능력을 갖추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된다. 하지만 세월을 지나면서 성공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다 보면, 결정적인 것은 역시 인간됨이구나 하는 것을 느껴진다.

덕은 사실 존재하는 어떤 것의 구성물이나 근거로서 있는 게 아니다. 권위를 가지고 가만히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탱해주는 무엇이라기보다는 활동이자 향기이자 동력이다. 힘인 것이다. 덕은 지식을 지혜로 넘겨주는 힘이다. 경험을 행복과 자유의 영역으로 넘겨주기도 한다. 게다가 인격적 기품까지 제공한다. 이 인격적 기품과 지적인 성숙 그리고 인문적 통찰, 이것들은 모두 다 하나의 동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정말 자기로 존재하는 힘 바로 덕이다.

그래서 덕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힘을 발산하는 동력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이 덕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지식의 저장고가 아니라 지혜의 운용자로, 도덕연구자가 아니라 도덕실천가로, 민주주의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다. 우리는 활동을 회복해야 한다. 인문학은 정물화가 아니다. 활동이다. 그런데 왜 덕은 잘 발휘가 되지 않을까. 방해꾼들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왜 우리는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지못할까. 그것은 다른 것들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지식, 이념, 신념, 가치관, 믿음, 체계 등등이 나를 내쫓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한테 있는 프레임으로 세계의 흐름을 보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덕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지만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먹었다가 누가 요구하면 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자기는 이론과 지식이 지나가는 통로로만 존재한다. 질문은 자기 내면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그대로 튀어나오는 일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자기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자기이게 하는 내면의 힘이 발휘되게 하는 것이다. 이 힘을 덕 또는 함량이라고도 한다. 논변을 하는 사람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함량이 크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보다 시를 읊어는 사람이 함량이 크다.

시를 읊으는 사람보다 소리를 내는 사람이 함량이 더 크다. 소리를 다루는 사람 보다 몸을 다루어서 춤을 추는 사람이 더 함량이 크다. 이것이 덕의 크기이고, 함량의 크기이고 시선의 높이 차이다. <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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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함 2022-10-13 11:24:01 | 175.***.***.124
8덕의 개념이 주나라 건국 정당성 부여에서 유래되었음을 알게되는 유익한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