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5-7> 일간신문 '前(전)'과 '人民通信(인민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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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5-7> 일간신문 '前(전)'과 '人民通信(인민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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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회에 걸쳐 8·15 해방이후부터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주사회에서는 어떤 정치사회단체들이 태어나 어떤 활동하다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출현했던 좌우익의 흥망사이면서,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이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이 속에는 제주4.3사건 발발이전에 뿌려진 삐라의 생산 주체들에 관한 이야기와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과 배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에 연재되는 글들은 지난 5월 12일 ‘제주언론학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 ‘제주4·3희생자 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고영철이 발표한 내용(제주4·3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가운데, 원고분량 관계로 세미나 자료집에 다 싣지 못했던 내용들 중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이 연재는 자료집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된다. 미력하나마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필자의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처음 제시한 '글 싣는 차례'의 순서를 바꿔 '신문형 삐라'부터 계속 연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필자 주>

『前』의 존재(주1)를 처음 알린 것은 1949년 4월 19일자 『자유신문』에 실린 <불안정한 도민 생활 / 물심양면의 구제가 긴급> 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신문기사는 산쪽에서 『전』이라는 제호달린 4면지 일간신문을 발행한 것으로 명시되어있지만, 실제로 산쪽(주, 남로당 제주도당 등)에서 4면지 일간지를 발행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 진위를 따져보기 위해 『자유신문』에 보도된 기사내용을 살펴보자.

‘동란의 제주를 찾아- 불안정한 도민 생활 / 물심양면의 구제가 긴급’

【본사 이월준 기자】 ➀폭도를 소탕하고 있는 일선을 위문하고자 함(咸)연대장의 안내로 선무공작대 위문단과 한라산 주둔 부대로 향하였다. 도청 앞을 떠나 트럭으로 약 한시간 달렸다. 죽창을 들고 보초를 보고 있는 성문을 수십 번이고 통과하였다.<… 중략…>

어디서 적이 습격할 지 모르므로 호위 ○○명을 앞에 세우고 죽창을 손에 들고 경계하면서 끝도 없는 정글을 뚫고 계곡을 건너 목적지 제○중대가 주둔하고 있는

해발 1,800m의 고봉 노루오름(老路岳)에 도착한 것은 세시간 후였다. 옆에 있는 무덤을 물으니 어제 여기서 동사한 동지라 한다. 선무공작대의 노래와 무용으로 짧은 한 시간을 보냈다.

➁그리고 체포된 폭도한테 다음과 같은 산생활 상태를 들었다.

“현재 총지휘자는 이덕구(李德九․37․도당 부위원장)이며 무장폭도는 약 150명,

비무장폭도는 800명 정도이다. 소지하고 있는 무기는 기관총, M1, 카빈, 권총, 수류탄 등이고 탄환은 여기서 제조한다. 무전기 라디오 등도 있었는데 밧데리가 없어 못쓰고 있다.

그러므로 ➂작년 말까지 도외지와 연락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연 두절되었다 한다.

그리고 ➃산에서는 前이라는 4면지 일간신문과 人民通信이라는 수시 발행의 간행물이 있다. 또 수첩을 보았는데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작은 글씨로 치밀하게 비밀공문이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활동 동태의 그래프까지 기입되어 있다.

식량은 종전까지 무장폭도에는 1일 4홉씩 1개월 분을 주고 비무장폭도에는 1일 1홉 5작씩 10여일 분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갈되어 순조롭지 못하다. 폭도의 조직은 기동대, 별동대, 교육대로 되어 있고 기동대는 국군상대, 별동대는 경관상대, 교육대는 훈련과 식량보급 등의 활동을 하며 전까지는 민애청 여맹 농위(農委)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무장응원대 속으로 개편되었다 한다.”<이하생략>

이 기사내용을 다 읽고 나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밑줄 친 ④번과 관련, “산에서는 前이라는 4면지 일간신문과 人民通信이라는 수시 발행의 간행물이 있다”. 라는 시제(時制)가 불분명한 어정쩡한 인용 문장이 나온다. 기사내용으로는 과거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현재도 산에서 4면지 일간신문을 발행하고 있다는 소리인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다.(주2)

하지만 밑줄 친 ③번 “작년 말까지 도외지와 연락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연 두절되었다”라고 한 포로의 구술로 미루어 보아, ― 여기서는 말하는 ‘지금’이 포로가 기자와 인터뷰할 당시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포로로 체포될 당시를 말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이 폭도는 1948년 말까지는 산속에서 무장대원으로 활동하다가 1949년 1월경부터 전개된 귀순선무공작기간에 체포되거나 귀순한 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추론이 맞는다고 한다면, 『전』의 발행과 관련된 내용도 1948년 말까지 산속의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둘째, 여기서 말하는 4면지 일간신문이란, 어떤 형태의 신문인가 하는 것이다. 4면지는 전문용어이다. 단어의 뜻을 그대로 해석하면 한 장을 반으로 접어 두 장(4면)으로 만든 신문을 말한다. 하지만, 1949년 3-4월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발간되던 조선· 동아일보 등 모든 일간지는 전부 2면지(2페이지) 한 장짜리 신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보도한 『자유신문』도 주 6회 발간(월요일 휴간)하는 2면지 일간신문이었다. 당시 제주도에서 이틀에 한번 발간되던 유일한 신문인 『제주신보』도 2면지(2페이지) 신문이었다. 기자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산쪽에서 4면지 일간신문을 발간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치가 맞지 않은 가공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특히 1948년 11월경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군경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이리저리 쫓기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1948년 말부터는 1면 짜리 일간지의 간행은 고사하고 주간 발행도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신문의 보도내용이 사실이라고 입증할 실물과 이외의 근거자료가 없으니 『전』이라는 제호를 가진 4면지 일간신문이 간행되었다고 한 기사의 내용은 와전되거나 조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즉 『전』은 4면지 일간신문이 아니고 산쪽에서 간행 배포했던 여러 종류의 전단가운데 하나인 4절지 삐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내용을 조작하거나 왜곡한 사람은 포로보다 기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 이유는 그들은 사건을 과장· 축소· 왜곡 ·조작· 묵살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 추측이 맞다면, 『전』과 『인민통신』에 관한 내용은 이 기자가 ‘노루오름’ 현지에서 직접 포로를 만난 취재해서 쓴 것이 아니고 제주도에서 취재차 약 15일 동안 머물면서 포로수용소 등 여기저기서 보고들은 내용을 짜깁기해서 쓴 것임이 확실해 보인다.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 추론 또는 가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이월준 기자는 1949년 4월 초순경부터 4월 19일까지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6개의 기획기사를 썼다.

그 기사들의 제목과 보도 날짜는 다음과 같다.

➀ 자유신문 1949년 4월 12일 /평화의 낙토 건설 / 이 대통령 제주서 연설

【10일 제주서 본사 이월준 특파원 발】

➁ 자유신문 1949년 4월 10일/평화의 낙원 재건 / 국방ㆍ사회 양(兩)장관 제주도 시찰【제주서 본사 이월준 특파원 8일 발】

➂ 자유신문 1949년 4월 12일/평화의 낙토 건설 / 이 대통령 제주서 연설

【10일 제주서 본사 이월준 특파원 발】

➃ 자유신문 1949년 4월 15일/ 총성 잔잔한 제주 / 어부의 뱃노래 들린다

【13일 제주서 본사 특파원 이월준 발】

⑤ 자유신문 1949년 4월 17일 /민족의 비애 간직한 제주 / 군경의 유혈로 재생 / 도민은 허무와 절망서 이탈

(기자이름이 명시 안 됨)

이 기사 내용 중에 “한국의 제일 큰 섬으로 남해에 위치를 잡고 있는 제주는 신화로 유서 깊은 한라산봉을 우러러보며 파도소리에 잠이 들고 <… 중략…>. 폭풍이 지난 제주도의 힘없는 모습과 도민의 고민, 그리고 이재민 교육사태와 한편 불순분자의 그 후의 동태에 대하여 보고들은 그대로를 숨김없이 기록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기사가 나간 이틀 후인 4월 19일자 신문에 현재 논의 중인 제주현지 르포(reportage)기사가 보도된다. 이로 미루어 보아 4월 17일자 기사는 이월준이 쓴 기사라고 생각한다.

⑥ 자유신문 1949년 4월 19일/ 불안정한 도민 생활 / 물심양면의 구제가 긴급【본사 이월준 기자】

보다시피 여섯 번째 마지막 기사를 제외하고 제주발 4개 기사는 전부 제주에서 본사로 송고한 날짜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를 삼고 있는 ⑥번째 기사만, 타 기사와 달리 송고한 날짜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⑤의 기사와 같이 서울의 편집국 책상위에서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 메모장을 보면서 짜집기식 기사를 작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주>

주1) 『前』는 앞서다, 나아가다, 전진하다는 뜻을 가진 한자이다.

6.25 한국전쟁기 북한에서 발행했던 전(前)과 같은 의미를 가진 신문제호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정병준편, 2021).돌진(오대산 정치부 발행 신문, 1951. 1.31), 앞으로(1946년 북조선에서 간행된 신문), 앞으로(동부지구당·동해남부지구당 명의로 간행딘 경남 빨치산 신문,1950. 12.20), 전진(제14보련 정치부가 간행한 등사판 신문, 1915. 2.6),전진(거제도 포로수용소 친공포로 선전물, 1952, 9.15) 등.

주2)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이 기사에는 선문공작대의 위문행사가 있었던 날짜도(밑줄 친 ➀번), 폭도에게 산생활 상태에 대해 들었던 날짜도(밑줄 친 ➁번) 빠져있다. 추측하건데 그 이유는 선문공작대의 위문공연 날짜와 포로에게 산생활에 관해 취재한 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략해 버린 것으로 보인다.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필자) 약력

2023년 7월 현재 그는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홍보학과)로 활동중이고, 2019년 12월에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언론ㆍ출판부문)’을 수상한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제주언론 돌아보기1>, <제주언론의 보도방식과 수용자>(공저), <언론이 변해야 지역이 산다: 지역언론의 정체성과 과제>, <브랜드 홍보론>(공저), <고영철 사회비평집: 구라(口羅)>, <지역신문정책과 지원효과>(공저)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캠페인관련 뉴스 프레임 및 뉴스정보의 출처에 관한 연구: 국내 5대 일간지의 세계7대 자연경관선정캠페인 보도를 중심으로” , “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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