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라'를 통해 본 제주도 해방정국, 4.3사건 전에 어떤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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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를 통해 본 제주도 해방정국, 4.3사건 전에 어떤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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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및 해소

수회에 걸쳐 8·15 해방이후부터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주사회에서는 어떤 정치사회단체들이 태어나 어떤 활동하다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출현했던 좌우익의 흥망사이면서,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이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이 속에는 제주4.3사건 발발이전에 뿌려진 삐라의 생산 주체들에 관한 이야기와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과 배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에 연재되는 글들은 지난 5월 12일 ‘제주언론학회’·‘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희생자 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고영철이 발표한 내용(제주4·3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가운데, 원고분량 관계로 세미나 자료집에 다 싣지 못했던 내용들 중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이 연재는 자료집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된다. 미력하나마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필자 주>

▲글 싣는 차례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및 해소

2~3) 미군의 진주, 조선인민공화국 탄생과 좌절

4) 조선건국준비위원회 濟州島 지부 결성

5) 좌익단체 및 정당 출현

6) 우익단체 및 정당 출현

7) 좌익쇠퇴, 우익의 부상 징조들(신문광고 분석)

8) 좌익쇠퇴, 우익의 부상 징조들(남로당 탈당 성명서분석)

9) 신문형 삐라의 解題(➀∼➆)

1945년 8·15 행방직후 제주도민들의 의식(세계관)과 행동에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정치사회단체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언제 어떻게 결성되어 제주사회의 변혁을 위해 어떠한 정보를 주로 생산 유포하였는지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그런 관계로 이들의 역할을 논하기 전에, 우선 이들의 상부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이 언제 결성되어 어떤 활동을 하다가 언제쯤 어떻게 해체(또는 해소)되었는지 먼저 살펴보겠다.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결성 및 해소

경성방송(KBS의 전신)은 8월 14일 오후 9시 뉴스, 그리고 15일 7시 21분 뉴스에서 "15일 오전 중 천황이 직접 조서를 발하여 발표가 있을 예정이니, 모두 빠짐없이 잘 들으라"라고 예고 방송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서울 시내 도처에 ‘금일 정오 중대방송 일억 국민 필청(必聽)’이라고 쓴 벽보가 나붙었다. 그러나 벽보를 주의 깊게 보는 사람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1945년 8월 초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이 기정사실화 되자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무사 귀환과 정권의 안정적인 이양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 내의 치안 유지가 관건이라고 보고, 한국인 지도자에게 협력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훗날 극우 정당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이끌었던 송진우를 가장 먼저 만나서 협조관계를 맺자고 요청했다. 그 다음은 온건 ‘ML’공산주의 조직의 초기 지도자였던 김준연을 만나서 정부를 조직해 시국을 담당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들이 거절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좌우지간 이들과 교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주1) 하지만 이런 주장은 건준을 비난하기 위해 날조해 유포시킨 자가발전용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에 따라 아베총독은 1945년 8월 14일 밤에 여운형과 면담을 추진하였다.

아베총독은 여운형과 접촉하여 일본이 다음날 항복할 것이니, 그가 중심이 되어 조선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단체를 결성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여운형은 좌익이 분명하지만 그의 진정한 정치적 성향은 미군정 1년차가 끝날 때까지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주2) 1929년 이래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여운형은 조선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지도자였다. 조선총독부도 여운형을 조선의 최고 지도자 중에 한 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선구회(先驅會)의 여론조사결과를 들 수 있다.(주3) 선구회가 1945년 11월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조선을 이끌어갈 지도자>와 <일제시기 최고의 혁명가>를 묻는 설문에서 여운형이 각각 33%, 19.9%로 최고득표를 기록했다. 그 다음은 이승만(21%, 18%), 김구(18%, 16%), 박헌영(16%, 17%), 김일성(9%, 7%), 김규식(5%, 5%) 순으로 나타났다. (주4)

8월 14일 저녁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원등(遠藤柳作)이 여운형에게 사람을 보내서 내일 아침 8시에 자신의 관저로 와 달라고 했다. 8월 15일 오전 7시 50분경 여운형은 대화정(필동)에 있는 그의 관저를 찾아갔다.(주5) 한민족은 해방을 앞두고, 일제는 패망을 앞두고 여운형과 총독부는 각각의 필요에 의해 협상에 임했던 것이다.(주6)

원등은 몽양에게 비장한 어조로 “일본은 패배했소. 오늘이나 내일 중 공식으로 발표될 것이다. 당신은 치안을 맡아 주시오. 이제부터는 우리의 생명이 당신에게 달려 있소”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여운형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➀ 전 조선의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➁ 집단생활지인 경성의 3개월분(8∼10월) 식량을 확보하라.

➂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➃ 조선의 추진력인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을 하지 말라.

➄ 조선내 각 사업장에 있는 일본 노무자들을 우리의 건국사업에 협력케 하라.

원등은 이 다섯 가지 요구조건들을 주저없이 다 받아들였다.(주7)

이렇게 해서 여운형은 총독부로부터 과도 기간의 법과 질서유지를 위한 치안권과 행정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협상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권이양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8월 15일 정오를 기해 일본천황의 특별 방송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하고 라디오가 있는 집으로 모여들었다. 드디어 역사적 순간인 1945년 8월 15일 정오가 되었다. 일본천황(裕仁)은 떨리는 목소리로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한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곧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독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주8) 일본이 전쟁을 포기했다는 뉴스는 조선인들에게 엄청난 소식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일제의 패망은 조선인에게는 해방의 환희였으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 동안 이 거리에서 주인행세를 하며 활개치던 왜놈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거드름 피우던 친일파들과 그 가족들도 어디 한 놈 볼 수 없었다.(주9) 당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식인들 가운데 해방이 되어 기쁘다고 외치는 사람들보다 ‘김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여운형은 정무총감 원등과의 교섭 후에 곧바로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착수했다.

그는 건국동맹원들을 정식으로 소집해 각각의 임무를 맡겼다. 1942년 당시 YMCA체육부 간사이며 유도사범이었던 장권에게는 치안대를 조직하도록 지시하고, 이만규, 이상백, 양재하, 이여성, 김세용, 이강국, 박문규, 이정구 등 젊은 학자들은 운니동(정) 송규환의 집에 보내서 <건국>에 대한 구체안을 설계하도록 지시했다. 운니동에 임시 기획처를 두고 이만규가 총괄책임을 지도록 했다. (주10)

8월 15일 저녁에 몽양은 안재홍을 찾아갔다. 일제통치시기 명망있는 민족주의자들이 수많이 변절하여 친일의 길로 들어설 때 안재홍은 민족적 양심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건국준비>를 위한 위원회 조직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냈다.(주11) 송진우(호는 고하)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제휴를 요청했지만, 중경의 임시정부(약칭: 임정)를 봉대하려는 고하는 그 권유에 대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한마디로 일축했다고 한다.(주12)

이리하여 1945년 8월 15일 저녁 계동 임용상 소유의 양옥건물에서 여운형을 비롯해 안재홍, 이만규, 이여성, 이상백, 정백, 최근우, 이강국, 박문규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조직하였다.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만들어진 최초의 건국준비단체이다.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이 추대되었다. (주13)

건준은 여운형의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과 안재홍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 이영·최익한·정백 등을 중심으로 한 장안파 공산주의 세력과 박헌영·이강국·최영달 등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 공산주의 세력 등이 연합한 조직이었다. (주14)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출발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자신의 임무를 치안유지에 한정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활동까지 전개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구성원들은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정치활동까지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주15)

언론과 라디오방송 통제권을 갖게 된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질서 유지에 책임을 질 것이고 정부의 주요 기능을 맡을 것이라고 국민들에게 방송하였다. 반면 경찰은 경찰서를 방치하거나 지서의 물품을 횡령했고, 무기력하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인들이 기업, 공장, 철도, 도로를 접수하는 동안, 학생들은 무기를 건네받고 조직되어 질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주한미군사 3 > 제5장 사법부> 2절 조선총독부의 붕괴).

여운형 등이 건준 대표로 수행한 최초의 공식 업무는 일제 말기 총동원체제 하에서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과 경제범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주16)

8월 16일 오전 10시를 기해 전국 각 형무소에서 독립투사들이 일제히 석방되었다. 일부 지방에서는 8월 15일에 석방된 곳도 있었다. 그들은 오랜 형무소 생활로 안색이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들이었지만 의기는 넘쳤다.

이날 오후(8월 16일) 오후 1시 몽양은 휘문중학교 운동장에 모인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어제 오전에 있었던 원등과의 교섭 내용을 직접 보고하였다.(주17)

1945년 8월 17일자 매일신보는 그 내용을 다음과 보도하였다.

건준위원장 呂運亨,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

16日 오후 1시 부내 계동 휘문중학운동장에 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수반인 呂運亨이 나타나 5천여 군중 앞에서 해방의 제일성을 힘있게 외쳤다. (略)연설은 약 20분간의 짧은 동안이었으나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 조선민족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8시 원등(遠藤)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 조선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질 오늘을 당하여 마음 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던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註: 이미 나왔기 때문에 다섯 가지 요구조건 생략), 즉석에서 무조건 응락을 하였다.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 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 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치자. 이미 전문대학 학생의 경비원은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는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8월 17일)

8월 16일 오후 3시에는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일반체육 무도계 대표, 시내 중학교 이상 체육교사와 학도대표들로 ‘건국치안대’(또는 치안유지대)가 꾸려졌다. 치안대 총사령부를 풍문학교에 두었고, 대장 장권, 사무국장 정상윤, 총무부장에 송병무 등 각 부서 책임자를 결정했다.

건국치안대의 임무수행의 개황(槪況)을 보면, ➀ 청년· 학생 2천명을 동원하여 서울의 치안확보에 진력하도록 하고, ➁ 지역별, 직장별 치안대를 조직하여 각각 치안을 유지하여, 중요 자재와 기관을 확보케 하고 특히 수원지를 보호하고, ➂ 전기회사· 철도국과 긴밀히 연락하여 생산과 교통 원활에 노력하고, ➃ 전문· 대학생을 선발해 각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치안대를 조직케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전국에 1백 62개소의 지방자치대가 조직되었다. (주18)

건국 치안대의 활동은 작지 않은 효과를 보았다. 18일에 습격과 폭행, 파괴 등의 접수가 278건으로 정점을 찍었지만, 21일에는 42건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또한 25일에는 1건으로 거의 사라진다. 또한 건준은 ‘식량영단임시운영위원회’를 조직하여 식량의 부정유출을 방지하고 일본군의 군용미 저장소를 조사하였다. 식량문제의 연구도 이 위원회의 중요한 활동이었다.(주19)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시민들과 함께 있는 여운형 (출처: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33). 통일뉴스,  2020.12.28 )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시민들과 함께 있는 여운형 (출전: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 전후사 이야기’(33). 통일뉴스, 2020.12.28 )

제주지역에서도 서울에서 내려온 파견대의 의해 지방치안대가 조직되었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다. 김시종의 『조선과 일본에 살다』(2016)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87쪽).

17일 정오 무렵부터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사건이 전개되었다. ‘청년보안대’와 ‘학생보안대’라고 하는 완장을 찬 젊은이들이 교통정리부터 행정의 창구업무 입회인까지 맡았고, 경찰관의 순찰도 ‘건준’(나중에 건국준비위원회의 약칭임을 알았습니다) 완장을 찬 학생(본토에서 온 리더들인 듯했습니다)들이 경관들을 서내에 머무르게 하고는 자력으로 질서를 바로 잡아갔다.

건준은 또한 16일에 <조선동포여>라는 제목의 삐라를 살포해 ‘동포의 자중과 안정’을 요청했다.

1945년 8월 16일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명의로 서울 시내에 뿌려진 전단.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중과 안정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
1945년 8월 16일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명의로 서울 시내에 뿌려진 전단.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중과 안정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1.12)

조선동포(朝鮮同胞)여!

중대한 현 단계에 있어 절대의 자중과 안정을 요청한다.

우리들의 장래에 광명이 있으니

경거망동은 절대의 금물이다.

제위(諸位)의 일어일동(一語一動)이 민족의 휴척(休戚)에 지대한 영향 있는 것을 맹성(猛省)하라!

절대의 자중으로 지도층의 포고(佈告)에 따르기를 유의하라.

8月 16日 朝鮮建國準備委員會(출전: 매일신보 1945년 08월 16일)

같은 날, 건준의 부위원장인 안재홍은 경성방송국을 통해 「海外·海內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 소식과 향후 계획을 밝히는 방송연설을 하였다. 그는 방송연설에서 경위대(警衛隊)와 정규병(正規兵)의 편성 계획, 식량의 확보 계획, 통화와 물가정책, 정치범 석방, 친일파 문제 등 신생조선의 건국방향을 다루었다. 연설내용은 오후 3시와 6시, 9시 등 3회에 걸쳐 방송돼 건준 결성 소식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매일신보 (1945년 08월 17일)는 방송 연설 내용을 이렇게 보도했다.

건준 준비위원으로서 안재홍이 한일간 자주호양(自主互讓)할 것을 방송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16日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하여 준비위원의 자격으로 안재홍이 오후 3시 10분부터 약 20분 동안 마이크를 통하여 해방된 우리 동포에게 제1성을 보냈다.

“지금 海內 海外 3천만 우리 민족에게 고합니다. 오늘날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변동되고 특히 조선을 핵심으로 한 全東亞의 정세가 급박하게 변동되는 이때에 있어 우리들 조선민족으로서의 대처할 방침도 매우 긴급 지대함을 요하는 터이므로 우리들 각계를 대표할 동지들은 여기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신생조선의 재건설문제에 관하여 가장 구체적 실제적인 준비공작을 진행키로 합니다.

여러분 묵은 정치와 새 정치가 바야흐로 교대되는 과정에 있어 걸핏하면 대중은 거취에 망설이고 진퇴를 그릇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조선민족은 지금 새로 중대한 위경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성패가 달린 비상한 시기에 임하여 만일 성실 과감하고도 총명 주밀한 지도로써 인민을 잘 파악 통제함이 없이는 최대의 광명에서 도리어 최악의 범과(犯過)를 저질러서 대중에게 막대한 해악을 끼칠 수가 있는 것이므로 오인(吾人)은 지금 가장 정신을 가다듬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또 뜀박질하여 나아감을 요합니다. 근본적인 정치운용의 최대문제에 관하여는 금후 급한 문제는 대중의 파악과 국면수습으로서

첫째, 민족대중 자체의 일상생활에서 생명재산의 안전을 도모함이요 또 하나는 朝日 량민족이 자주 호양태도(互讓態度)를 견지하여 추호라도 마찰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일본인 주민의 생명재산의 보장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경위대(警衛隊)의 결성으로 일반질서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학생 及 청년대와 경관대 즉 본 건국준비위원회의 소속 경위대를 두어 일반질서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외에 따로히 곧 무위대(武衛隊) 즉 정규병인 군대를 편성하여 국가질서의 확보를 도모하는 중입니다. 또 식량의 확보입니다. 우선 경성 120만 府民의 식량은 절대 확보키로 계획되어 근거리에 쌓여 있는 미곡을 운반하기로 소운반통제기관을 장악하여 운반공급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각처 식량배급 기타의 물자배급 태도도 현상을 한동안 유지하면서 나가기로 하니까 그런줄 아시고 일층 책임에 진췌하기를 바랍니다.

경제상으로 통화 及 물가정책은 목전에 아직 현상유지하면서 신정책을 수립 단행키로 하겠습니다. 미곡공출문제는 되도록 관대 합리하도록 미곡생산자와 일반농민의 식량의 자족을 도모하려고 합니다.

본 건국준비위원회는 그 발족의 처음부터 청소년학생 및 일반정치범의 석방문제를 요구하여 오던 터이었는데 어제 8月 15日부터 오늘 16日까지 경향 각지방 기 미결 합계 1100인을 즉시 석방하게 되었습니다. 일반 부형자매와 함께 더욱 민족호애의 정신에서 인민결성의 씩씩한 발자욱을 내디디기 바랍니다. 행정도 일반 접수할 날이 멀지 아니 하거니와 일반관리로서도 잔물(殘物)을 고수하면서 충실히 복무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통감정치 이래 40년간 총독정치·특수정치인지라 지금까지의 일반관리와 전관리 및 기타 일반협력자란 인물들에게 금후 충실한 복무로 신진행하는 한 일률로 안전한 일상생활을 보장할 것이니 그 점 안심하고 또 명념(銘念)하기 바랍니다.

최종으로 국민각위 남녀로유는 이지음 언어동정을 각별히 주의하여 일본인 주민의 심사감정을 자극함이 없도록 진력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과거 40년간의 총독정치는 벌써 과거의 일이오 하물며 朝日 양민족은 정치형태가 여하하게 변천되던지 자유호양으로 亞細亞諸民族으로서의 떠메고 있는 각자의 사명을 다하여야 할 국제적 조건하에 놓여 있는 것을 똑바로 인식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수난의 도정에서 한 걸음씩 형극의 덤불을 헤쳐 나아가는데에 피차가 없는 공명동감을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백만 조선동포가 일본국민 제씨와 한가지로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朝鮮在住 1백 기십만의 일본주민 諸氏의 생명재산의 절대확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총명한 국민 諸氏가 충분히 이해하실 것인 바인 것을 의심치 아니합니다. 諸位의 심대한 주의를 요청하여 마지 아니 합니다.”

이 방송내용과 별도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16일 현재로 각 도 창고에 확보되어 있는 식량은 전부 1백2만3천8백76석이나 된다며, 식량문제는 조금도 염려할 것 없으니 안심하고 각기 직장을 지키라고 발표하였다.(주20)

매일신보는 17일과 18일 양일간 건준과 관련된 뉴스를 10건 이상이나 보도하였다.

이들 기사 중에는 건준의 목표가 무엇이고 현재 어떠한 일들을 하고 있는지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는 해설기사도 끼어있었다. 그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준, 당면과제로 치안확보에 전력을 기울이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계동(桂洞)에 자리를 잡고 위원장 呂運亨 부위원장 安在鴻 兩氏를 중심으로 각계 각층을 망라하여 원만 건전한 조직을 갖추기에 노력하는 중이다. 이 위원회의 본래의 사명은 앞으로 신정권수립에 대한 모든 준비를 함에 있고 당면의 과제로는 치안확보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터로 동포들은 이에 12分의 협력이 있어야 할 것이 기대되고 있다.(매일신보, 1945년 08월 18일)

8월 17일 건준은 제1차 중앙조직의 5개부서와 위원을 결정했다.

이날 결성된 부서와 위원을 보면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崔謹愚), 재무부장 이규갑(李奎甲), 조직부장 정백(鄭栢), 선전부장 조동호(趙東祜)·최용달, 무경부장(武警部長) 권태석(權泰錫) 등이다.

8월 17일 제1차 부서결정을 완료하고 난후 건준위원장 여운형은 ‘치안의 확보,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량의 일원화, 교통·통신·금융 및 식량대책의 강구’ 등이 건준의 설립목적이라는 점을 밝히는 담화를 발표했다(매일신보, 1945년 8월 18일). 건준은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일제의 각 기관을 접수하는 등, 전국적인 정부수립 업무에 나섰다. (주21) 즉 남북을 통한 전 한반도가 건준의 통치아래 놓이게 된다.(주22)

8월 18일, 건준에서는 지방의 실정에 맞게 자치기구인 치안대를 신속하게 새로 편성할 것 등을 요청하는‘3천만 동포에게 지령’을 발표하였다. 구체적인 지시내용은 다음과 같다.

“➀ 어느 기간까지 우리는 자발적으로 자치수단을 강구하여야 하겠다. ➁ 이 자치수단은 가장 신속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여야 되겠다. ➂ 이 자치수단은 어디까지든지 평화적이라야 되겠다. ➃ 모든 公私機關 기능을 확보하기 위하여 소속인원은 현직장을 엄수하여야 되겠다. ➄ 各員은 각기 직장에서 적극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 공작에 협력하여야 되겠다. 단, 자치기관의 명칭은 건국하하읍면(建國何何邑(面) 공안대(公安隊)로 하되 각기 지방유지가 중심이 되어 청년층 학도 등을 동원하든지 종래의 경방단(警防團)을 개편 조직하여도 무방하겠다. 그리고 조직이 완료된 시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연락해 주기 바란다” 라는 등의 내용이었다.(매일신보, 8월 18일). 즉, 자치기관을 신속하게 조직하고, 조직이 완료되면 건준에게 연락하며, 건국준위원회 공작에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전국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치안대들이 속속히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운형이 8월 18일 밤늦게 귀가 도중, 계동 자택 앞에서 수명의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하여 가장 귀중한 1주일간을 병상에 누워서 보내야 했다.(주23)

8월 하순으로 접어들자, 전국 각 지역에서 조직된 자연발생적인 조직들이 건준 지부로 개편, 체계화하면서 8월말까지 전국에 145개의 건준의 지부가 결성되었다. 불과 보름 사이에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건준지부가 결성된 것은 건준에 대한 국민대중의 기대와 지지가 컸음을 의미한다.(주24)

이처럼 건준은 권력의 공백을 메우며 하나의 정부로서 점점 그 윤곽을 드러냈다.( 주25) 임시적인 기구이기는 하지만 반정부(半政府)의 형태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은 짧은 시일 내에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지방행정을 관장하게 되었고, 건준 본부는 마치 중앙정부와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중앙부서에 참여하면 장관이라도 될 수 있는 듯이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주26)

이러한 지방조직 확대과정에서 건준은 일본군 경찰과 마찰을 빚어 유혈충돌이 일어나기도 했고 치안유지 업무를 한국인에게 이양한데 대해 일본군 관계자가 총독부 관계자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 총독부는 여운형이 주도하는 조직이 경찰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려고 3,000명의 군인을 민간인 신분으로 변환하여 경찰에 편입시키기도 하였다.(주27)

일제의 반동적이고 말기적 저항은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8월 17일 일본의 조선군관구는 만약 민간인들이 치안을 저해한다면 군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일본의 조선군관구 보도부장 나가야 쇼오사쿠(長屋正作)소장은 8월 18일 “ 일본군은 엄연히 건재한다”며 치안을 해칠 시에는 단호히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요소요소에서 충돌했으며, 또한 조선군 사령관은 18일 행정권의 이양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인계된 신문사와 학교가 다시 일본측에 의해 접수되었다. 8월 20일 일제경찰은 건준을 위시한 모든 단체를 해산시킬 것임을 경고했으며 20일 밤부터 무장한 일본군이 대오를 짓고 요소요소를 점거했다. 8월 19일자『경성일보』에는 일군 제17방면군의 경고문, 8월 20일자에는 조선군관구 보도부장 나가야의 담화문과 엔도의 호소문, 8월 24일자에는 또 다른 일본군의 경고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의 논리는 일본과 연합국 간의 회의에서 주권이 결정되므로 그때까지의 주권은 일본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법적·논리적으로 타당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해방의 기쁨을 만끽했던 일반대중들의 감정에는 통할 수 없은 경고였다.(주28) 패망한 총독부의 위협과 회유가 건준의 활동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은 되지 못했다.

이쯤 되니 일본 총독부는 자신들조차 통제할 수 없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괴물을 만들었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일본군의 각종 성명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건준은 활동을 지속하는 한편, 8월 22일 중앙위원회를 확충하여 12부 1국 체제로 2차 조직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날 확충된 중앙집행위원회 부서는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 최근우, 조직부 정백‧윤형식, 선전부 권태석‧홍기문, 재정부 이규갑‧정순용, 식량부 김교영‧이광, 문화부 이여성‧함상훈, 치안부 최용달‧유석현‧장권‧ 정의식, 교통부 이승복‧권태휘, 건설부 이강국‧양재하, 기획부 김준연‧박문규, 후생부 이용설‧ 이의식, 조사부 최익한‧김약수, 서기국 고경흠‧이동화‧이상도‧최서환‧정화준 등이었다.(주29)

1차 개편 때 비해 중앙조직이 5개 부서에서 12개부서·1국 체제로 확충되고 집행위원수도 총32명으로 확대되었다.

조직과 부서가 확대되자 건군준비위원회 서기국에서는 건준의 목적 및 성격과 그 진로를 일반국민에게 좀 더 명확히 알리기 위해 8월 28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선언>과 <강령>을 9월 2일에 발표하였다.(주30)

메일신보(9월 3일자)는 이들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건준, 선언 강령 발포

[서기국 발표 9月 2日 오후 3시]위원회에서는 2日 다음과 같은 선언, 강령을 제정, 발포하였다.(주31)

◊ 선언

인류는 평화를 갈망하고 역사는 발전을 지향한다. 人類史上의 空前的 참사인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우리 조선에도 해방의 날이 왔다.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서 제국주의적 봉건적 착취와 억압하에 모든 방면에 있어서 자유의 길이 막히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36년동안 우리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여 왔다. 이 자유발전의 길을 열려는 모든 운동과 투쟁도 제국주의와 그와 결탁한 반동적 반민주주의적 세력에 의하여 완강히 거부되어 왔다.

전후문제의 국제적 해결에 따라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기반(羈絆)(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민족의 해방은 다난한 운동사상에 있어 겨우 새로운 일보를 내디디었음에 불과하나니 완전한 독립을 위한 허다한 투쟁은 아직 남아 있으며 새 국가의 건설을 위한 중대한 과업은 우리의 전도에 놓여 있다.

그러면 此際에 우리의 당면임무는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데 있다. 일시적으로 국제세력이 우리를 지배할 것이나 그것은 우리의 민주주의적 요구를 도와 줄지언정 방해치는 않을 것이다.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고 자유발전의 길을 열기 위한 모든 진보적 투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어 있고 국내의 진보적 민주주의적 여러 세력은 통일전선의 결성을 갈망하고 있나니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의하여 우리의 建國準備委員會는 결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本 준비위원회는 우리 민족을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권에로 재조직하기 위한 새 국가건설의 준비기관인 동시에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적 제세력을 집결하기 위하여 각층 각계에 완전히 개방된 통일기관이요 결코 혼잡된 협동기관은 아니다. 왜 그런고하면 여기에는 모든 반민주주의적 반동세력에 대한 대중적 투쟁이 요청되는 까닭이다. 과거에 있어서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민족적 죄악을 범하였다. 금후에도 그들은 해방조선을 그 건설도중에서 방해할 가능성이 있나니 이러한 반동세력 즉 반민주주의적 세력과 싸워 이것을 극복 배제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강력한 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서 戰取될 것이며 그동안 해외에서 조선해방운동에 헌신하여 온 혁명전사와 그 집결체에 대하여서는 적당한 방법에 의하여 전심적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조선전민족의 총의를 대표하여 이익을 보호할 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本 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국가 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 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은 강령을 내세운다.

◊강령

一.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一.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一.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1945年 8月 28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출전: 매일신보 1945년 09월 03일)

화대위원회의 전체대회는 4일 오전 11시 정각 보다 약 1시간 늦게 참석대상자 135명중(초청장 발송 대상)의 57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동 동(同)위원회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부위원장 안재홍으로부터 인사말이 있고 난 다음에 순서에 따라 서기국 고경흠으로부터 약 보름동안에 있었던 건준의 활동에 대한 경과보고가 있었다. 이날 회의석상에서 사직서를 제출한 양인(위원장 여운형과 부위원장 안재홍)으로부터 너무나 정세가 급박하여 중책을 맡기는 하였으나 천식(淺識)과 우리의 힘은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고 또 건강도 불량하니 이때 사임을 수리해 주기를 바란다는 요청이 있었지만, 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부위원장 1인을 더 뽑기로 하여 허헌이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그 다음 중앙집행부원의 선거에 들어가서는 위원장, 부위원장 3인에게 일임키로 가결하고 전체회의를 종결하었다(매일신보, 1945. 9. 4).

이날 전체회의에서 서기국은 건준의 사업은 민중들의 절대 지지아래 착착 그 거보를 내디디고 있으며, 이 건준의 지방조직은 자연적으로 조직 정비되어 4일 현재까지 본부와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는 지부만 140개소가 된다고 보고하였다.

이날 확대위원회가 끝난 후 중앙집행위원회가 개편되었는데 14명이 떠나고 11여명이 새로 선임되었다. 새로이 개편된 건준의 중앙위원회 명단을 다음과 같다.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허헌, △총무부 최근우‧전규홍, △조직부 이강국‧이상훈, △선전부 이여성‧양재하, △치안부 최용달‧유석현‧정의식‧장권‧이병학, △문화부 함병업‧이종수, △건설부 윤형수‧박용칠, △조사부 최익한‧고경흠, 양정부 이광‧이정구, △후생부 정구충‧이강봉, △재정부 김세용‧오재일, △교통부 김형선‧권태휘, △기획부 박문규‧이순근, △서기국 최성환‧ 정처묵‧ 정화준 등 32명이다.(주34)

그런데 놀랍게도 건준이 개편된 지 불과 이틀 후인 9월 6일 저녁 난데없이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라는 것이 수립됨으로써 그 다음날인 9월 7일 발전적인 해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공의 출범으로 건국준비위원회는 불과 20일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주35)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만들어진 최초의 건국준비단체인 건준에 대한 평가는 각파(좌익, 중간파, 우익 등)의 입장과 시각에 따라 상이했지만, 해방직후 극도로 혼란한 비상시기에 남북을 총괄하는 치안권을 확보했으며 자치를 지향하던 기구였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는 없을 듯하다. (주36)) 즉, 실질적인 정부로서의 기능은 다하지 못했지만 건국준비를 위해 치안유지와 민심안정에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주>

(주1) 주한미군사 2> 2부. 2장 > 2. 좌익의 권력 투쟁 > B. 조선인민공화국

(주2) 주한미군사 2> 2부. 2장 > 2. 좌익의 권력 투쟁 > B. 조선인민공화국

(주3) 1945년 11월 12일 선구회가 『先驅』12월호(발행인 高麟燦, 편집인 安峰守) 에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는 해방직후 정치가들에 대한 국민들의 인상과 인기도를 추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자료다. 그러나 이 조사결과는 △선구회가 우익성향의 단체인 점 △조사시점이 이승만 귀국 직후라는 점 △정당인과 문화인들 사이에서 설문회수율이 떨어졌다는 점 등을 고려한 상태에서 참고해야 할 것이다.

(주4)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 1996, 166쪽.

(주5) 이기형, 1984, 183쪽

(주6) 심지연, 1986, 14쪽

(주7) 이기형, 1984, 185쪽

(주8) 송건호, 1984, 114쪽

(주9) 여연구, 2001, 141쪽

(주10) 이기형, 1984, 189쪽

(주11) 여연구, 2001, 142쪽.

(주12) 이기형, 1984, 190쪽

(주13) 이기형, 1984,190쪽: 건준이 8월 15일 저녁에 결성되었다는 종래의 주장과 달리 이완범이 그의 책『한국해방 3년사』71쪽에서 “8월 1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그 출처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주14) 임태영(020.12.28 ).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①. 통일뉴스.

(주15)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117-118쪽. 출처 : 통일뉴스

(주16) 우리역사넷.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주17) 이기형, 1984, 191쪽

(주18) 이기형, 1984, 193쪽

(주19) 우리역사넷-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주20) 건준, 각도에 있는 식량 확보(1945년 08월 17일), 『매일신보』, 2.

(주21) 심지연,1986, 15쪽

(주22) 이완범, 2007, 72쪽

(주23) 이기형, 1984, 196쪽

주24) 임영태(2020.12.28.),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①, 통일뉴스

주25) 민전사무국 편, 81쪽; 심지연, 15쪽

주26) 이기형, 1984, 196쪽

주27) 주한미군사 2> 2부. 2장 > 2. 좌익의 권력 투쟁 > B. 조선인민공화국

(주28) 이완범, 2007, 73쪽

(주29) 심지연, 1986, 16쪽

(주30) 이기형, 1984, 198∼199쪽

(주31) 이기형의 저서『몽양 여운형』의 197쪽에서는 이 史料가 8월 25일에 발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를 보도한 ‘매일신보’ 9월 3일자 기사를 보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서기국에서 9월 2일 오후 3시경에 발표한 것으로 되어있다. 재차 확인이 필요하다.

(주32) 심지연,1986, 23∼24쪽

(주33) 심지연, 1986, 24쪽

(주34) 이기형, 1984, 203쪽

(주35) 이기형, 1984, 203쪽

(주36) 이완범,2007, 83쪽

<참고문헌>

이기형(1984).『몽양여운형』. 서울: 실천문학사.

송남헌(1985).『해방 3년사 1』(1945-1948). 서울: 도서출판 까치 .

심지연 엮음(1986). 『해방정국 논쟁사 1』. 서울: 도서출판 한울.

이완범 (2007).『 1945-1948 한국해방 3년사』. 파주시: 태학사.

정병준(1995).『몽양 여운형 평전』. 서울: 한울.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1996).『발굴자료로 쓴 한국현대사』. 중앙일보사.

여연구(2001).『나의 아버지 여운형』. 서울: 김영사.

박세길(1988).『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서울: 돌베개.

송건호(1984). 『한국현대인물사론』. 서울: 한길사.

매일신보 1945년 8월부터 12월말까지.

임태영(2020.12.28).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①. 통일뉴스.

임영태(2021.01.04.) .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②. 통일뉴스.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1945 - 우리역사넷 history.go.kr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필자) 약력

2023년 7월 현재 그는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홍보학과)로 활동중이고, 2019년 12월에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언론ㆍ출판부문)’을 수상한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제주언론 돌아보기1>, <제주언론의 보도방식과 수용자>(공저), <언론이 변해야 지역이 산다: 지역언론의 정체성과 과제>, <브랜드 홍보론>(공저), <고영철 사회비평집: 구라(口羅)>, <지역신문정책과 지원효과>(공저)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캠페인관련 뉴스 프레임 및 뉴스정보의 출처에 관한 연구: 국내 5대 일간지의 세계7대 자연경관선정캠페인 보도를 중심으로” , “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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