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때 발간됐던 '혈화'와 '인민통신', 목적과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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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때 발간됐던 '혈화'와 '인민통신', 목적과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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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4·3당시 살포된 '신문형' 삐라 <5-6> '혈화'와 '인민통신'

수회에 걸쳐 8·15 해방이후부터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주사회에서는 어떤 정치사회단체들이 태어나 어떤 활동하다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출현했던 좌우익의 흥망사이면서,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이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이 속에는 제주4.3사건 발발이전에 뿌려진 삐라의 생산 주체들에 관한 이야기와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과 배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에 연재되는 글들은 지난 5월 12일 ‘제주언론학회’·‘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희생자 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고영철이 발표한 내용(제주4·3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가운데, 원고분량 관계로 세미나 자료집에 다 싣지 못했던 내용들 중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이 연재는 자료집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된다. 미력하나마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필자의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처음 제시한 '글 싣는 차례'의 순서를 바꿔 '신문형 삐라'부터 계속 연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필자 주>

(5-6) '혈화'와 '인민통신'

『혈화』와 『인민통신』은 남로당 제주도당 선전부에서 제작 살포했던 기관지들로 추정된다.

현재 이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 문헌에 등장한다.

① 김봉현·김민주 공편(1963). 『 濟州島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 일본 대판: 文友社.

② 김봉현(1978). 『濟州島 피의 역사』. 일본 동경: 도서간행회.

③ 박설영(1991). 「제주도 인민의 4·3 봉기와 반미애국투쟁의 강화」.

제주자유수호 협의회(2011), 『제주도의 4월 3일은?』 2집(143∼195쪽), 제주: 도서출판 열림문화. 박설령의 논문은 1991년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가 펴낸『력사과학론문집』(129-192쪽)에 처음 발표된 것으로 확인된다.

④ 김생민의 강연내용(1997년 4월 8일, 제주도지방경찰청 대강당)

이 강연내용은 2011년 ‘제주자유수호 협의회’에서 출판한『제주도의 4월 3일은?』 2집(198-230쪽)에 실려있다. 여기에는『혈화』에 관한 내용만 나온다.

⑤ 상기 문헌 외에 『인민통신』에 대해서 아주 간단히 언급한 자료로는 『자유신문』 1949년 4월 19일자 「불안정한 도민생활 / 물심양면의 구제가 긴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들 수 있다. 『자유신문』에 보도된 『인민통신』에 관한 내용은 유감스럽게도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산에서는『前』이라는 4면지 일간신문과 『인민통신』이라는 수시 발행의 간행물이 있다”. 이 내용만으로는 『인민통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혈화』와 『인민통신』의 정체성을 논의하기 위해 우선 4개 문헌 (①, ②, ③, ④)에 서술된 내용을 연대기 순으로 먼저 살펴보겠다. 그 이유는 이들 3개 문헌의 저자들도 앞의 기사(1948년 5월 6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 살펴 본 『혈화』 『정보』처럼, 『혈화』와 『인민통신』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함께 뭉뚱그려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나온 문헌의 저자들이 앞서 출판된 책자의 기록을 그대로 베끼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혈화』와 『인민통신』을 직접 본적이 없는 사람들은 여기에 기술된 내용들이 둘 중 어느 유인물에 관한 것인지 식별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이 글도 그런 문제가 있음을 사전에 밝혀둔다.

➀ 에서는 『혈화』와 『인민통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 미제는 <분할하여 통치하라>, <동족끼리 싸우게 하라>는 식민지 통치 구호 밑에 ‘5·10 항쟁’을 구실로, 괴뢰 국경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무장대를 포함한 대중적인 ‘반미구국 투쟁세력’을 몰살하기 위한 ‘토벌작전’이 극심할 것을 예상한 혁명대오는 (…중략…)혁명역량을 보존하기위하여 제1선에는 연락원을 남겨두고 제2선으로 옮겨 지하투쟁을 강화하면서 대중투쟁을 높은 단계에로 묶어세우는 한편 ‘무장원’과 일꾼들을 ‘맑스 - 레닌주의 사상’을 지침으로 한 항일유격대의 혁명전통과 고상한 애국주의 사상으로 무장하는 정치사업을 일층 강화하였다.

또한 『혈화』와 『인민통신』을 통하여 북반부에서 수행된 찬란한 민주건설의 성과, 국내외적으로 유리하게 전변(轉變)되는 정치 정세, 원쑤들의 혁명 교살(絞殺)에 대한 비난과 폭로에 대한 선전사업을 적들의 전략촌(戰略村)(주1)에 이르기까지에 침투하여 인민들의 애국적 혁명성과 승리에 대한 신심을 제고시키는 운동을 용감히 전개하였다(김봉현·김민주, 1963, 113쪽).

➁『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1963)의 수정·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는 김봉현의 『濟州島 피의 역사- 4·3 무장투쟁의 기록』(1978)에서는 『혈화』와 『인민통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제주도에서의 5·10선거 좌절은 지배자와 미국에게 정치적인 대 타격을 안겨주었다. 이에 미국은 남한을 아시아 침략의 전초기지로 구축하기 위해서도 또 이제 막 출범한 이승만 정권을 육성시키기 위해서도 하루 속히 민중항쟁을 진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략…).

이리하여 항쟁은 날로 치열해져 갔으며, 쌍방이 진퇴양난의 피비린내 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게릴라들은 즉각 장기전의 태세를 갖추고 전조직력을 동원하여 식량이나 무기류를 비롯한 모든 전투물자를 비축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 시시각각 다가오는 토벌에 대비하였다.

도당위원회도 조직을 보위하기 위해 제1선에서 제2선으로 이동시켜 조직을 견고히 하는 한편 『혈화』, 『인민통신』 등의 기관지를 발간하여 민중의 저항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김봉현, 1978, 169쪽).

➂ 북한의 『력사과학론집』에 실린 박설영의 논문(1991)은 『혈화』와 『인민통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주: 박설령은 김봉현과 김민주의 공저의 내용을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많은 부분을 베끼고 있다).

(……)항쟁대오는 장기전을 예견하고 무장대와 지방자위대를 정비하고 식량, 무기 등 모든 전투비품을 준비하는 사업을 급속히 전개하여 놈들의 대토벌전에 대응하였다. 전투 지휘부는 혁명역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1선에는 연락원을 남겨두고 2선으로 옮겨 지하투쟁을 강화하면서 대중을 묶어세우는 한편 일군들을 불굴의 투쟁정신, 참다운 애국주의 사상으로 무장시키는 사업을 한층 강화하였다.

또한 『혈하』와 『인민통신』 등 출판물을 통하여 북반부에서 민주건설의 성과와 국내외 정치정세, 원쑤들의 탄압만행을 폭로하는 선전사업을 적들의 ‘전략촌’에 이르기까지 깊이 침투하여 진행함으로써 인민들을 애국적 혁명투쟁에로 고무하고 그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었다(제주자유수호협의회, 2011, 163쪽).

(… 중략…) 4.3 봉기이래 인민유격대가 발간한 기관지 『혈하』(주: 『혈화』의 오기로 보임)가 광범위 발간되어 인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로력자』(주2)의 보도에 의하면 10월 12일 하루에만도 제주읍내 각처에 수백매가 붙어 있었고 읍(邑)인민들의 집에도 배달되었으며, 또한 같은 날에는 그림 있는 ‘선전화(宣傳畵)’ 35매가 읍내 각처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제주자유수호협의회, 2011, 176쪽)

④ 김생민은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조직책으로 활동하다 우익으로 전향하여 남로당 조직의 파괴공작에 앞장섰던 자이다. 그는 1997년 4월 8일 제주지방경찰청 대강당에서 경찰관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혈화』를 등사하던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김달삼이 이북에 가 버린 후) 물장오리에 있는 투쟁본부로 끌려가서 장장 8시간 심문을 받고, 자기비판을 한 후 선전선동부에 배치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강등을 시켜가지고 제가 등사판 미는 사람을 했습니다. 등사판을 미는데 그때에 그네들이 그 등사되는 문건이 뭐이냐.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발행하는 『血火』 피 혈자, 불 화자를 쓰는 『혈화』라는 기관지가 있었습니다. 『혈화』를 등사판에 쓰면 그것을 미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이것을 약 2개월간 하자, 얼마 없어서 저를 동부지구 소위 그네들이 말하는 ‘난민수용소’에 관리책임자로 저를 보냈습니다.(……)

거기에서 한 2개월 동안 활동하다가 1949년 1월달이 되니까 저를 소원해 가지고 정치부원 말하자면, 소위 조직지도원의 한사람으로서 저를 임명하고 제가 조천면 당부라든가 구좌읍 당부라든가 그런데 가서 교양시키고 했는데 이렇게 하다가(……)신촌지서로 내려갔습니다(203쪽).

이 강연내용에 따르면 그는 대략 1948년 9월부터 10월까지 약 2개월 동안 남로당 투쟁위원회에서 발간하는『혈화』라는 기관지를 등사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4개 문헌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첫째, 『혈화』와 『인민통신』의 발행주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948년 5월 6일자 『조선중앙일보』의 기사와 박설영의 논문 그리고 김생민의 증언채록을 종합해보면, 『혈화』의 경우 4·3 봉기 초기 때부터 최소한 1948년 10월말까지는 대중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제작 살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계속 제작해 뿌려졌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둘째, ①과 ③에 따르면 『혈화』 『인민통신』 등은 북반부에서 수행된 민주건설의 성과(註: 북한의 개혁성과, 여권신장, 특히 토지개혁 등), 국내외적으로 급변하는 정치 정세, 원쑤들의 탄압만행을 고발 폭로하는 내용(현지의 전투상황 및 토벌대의 만행) 등을 집중적으로 선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배포지역 및 대상과 관련 특히 눈길 끄는 대목은 『혈와』와 『인민통신』을 ‘전략촌’에까지 살포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이 내용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넷째, 김생민의 증언에 따르면, 대략 1948년 9월부터는 남로당 투쟁위원회에서 『血火』만 제작 살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인민통신』의 경우 중도에 명칭이 다른 것으로 바뀌거나 아니면 도당 본부가 입산 피신하면서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주>

주1)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과 우익 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 및 독립, 반미 구국 투쟁을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발포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마을은 대부분 불태워지고 주민들은 해안가로 소개되었다. 피난민과 해안 마을주민들은 모두가 모다 들어서 무장대가 마을에 침입할 수 없도록 하기위해 마을 주위를 빙 돌아가면서 성담을 쌓았다. 이 성담 쌓는 사업은 대개 1948년 11월 말부터 시작하여 1949년 2-3월중에 거의 끝나게 된다. 토벌군은 이렇게 성담을 쌓은 마을을 ‘전략촌’이라고 불렀다. 토벌군은 제주도민들을 ‘전략촌’에 가둬놓은 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통제했다.

주2) 『노력자』는 조성호를 발행 겸 인쇄인, 이창식을 편집국장으로 하는 신문이다. 창간일은 1947년 5월 26일로 표기되어 있지만, 사실일 가능성이 없다. 신문발행소는 서울시 태평로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명기되어 있지만, 『노력자』는 서울에서 간행된 것이 아니고 북한에서 간행된 지하신문이다. 국한문 혼용, 11단 타블로이드판 활판인쇄로 4면을 발행했다. 간기는 5일에 1회씩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대남선전용 지하신문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남로당 해주인쇄소에서 인쇄해 남한 지하조직망을 통해 유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제82호(1949.1.15), 제125호(1949.9.1), 제130호(1949.9.25), 제131호(1949.9.30), 제134호(1949.10.15.)가 남아있다(정병준. 『북한신문연구 해제집』. 2021, 260쪽).

사진은 1949년 1월 15일자(제82호) 『노력자』의 제1면 모습이다<br>제1면에는 사설과「조선주차 쏘베트연맹 특명 전권대사 쓰띠꼬브씨의 내임을 환영함」및 스티코프 평양도착· 박현영 외상의 접견 기사 등을 싣고 있다. 그리고 왼쪽하단에는 4·3의 진행경과(제목: 제주도- 경찰지서를 계속 습격/ 한림·삼양 등지에서 악질분자를 처형) 및 순천일대 상황을 담고 있다(정병준, 2021, 260쪽)
사진은 1949년 1월 15일자(제82호) 『노력자』의 제1면 모습이다
제1면에는 사설과「조선주차 쏘베트연맹 특명 전권대사 쓰띠꼬브씨의 내임을 환영함」및 스티코프 평양도착· 박현영 외상의 접견 기사 등을 싣고 있다. 그리고 왼쪽하단에는 4·3의 진행경과(제목: 제주도- 경찰지서를 계속 습격/ 한림·삼양 등지에서 악질분자를 처형) 및 순천일대 상황을 담고 있다(정병준, 2021, 260쪽)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필자) 약력

2023년 7월 현재 그는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홍보학과)로 활동중이고, 2019년 12월에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언론ㆍ출판부문)’을 수상한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제주언론 돌아보기1>, <제주언론의 보도방식과 수용자>(공저), <언론이 변해야 지역이 산다: 지역언론의 정체성과 과제>, <브랜드 홍보론>(공저), <고영철 사회비평집: 구라(口羅)>, <지역신문정책과 지원효과>(공저)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캠페인관련 뉴스 프레임 및 뉴스정보의 출처에 관한 연구: 국내 5대 일간지의 세계7대 자연경관선정캠페인 보도를 중심으로” , “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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