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2-1) 미군의 진주, 조선인민공화국 탄생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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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2-1) 미군의 진주, 조선인민공화국 탄생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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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회에 걸쳐 8·15 해방이후부터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주사회에서는 어떤 정치사회단체들이 태어나 어떤 활동하다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출현했던 좌우익의 흥망사이면서,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이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이 속에는 제주4.3사건 발발이전에 뿌려진 삐라의 생산 주체들에 관한 이야기와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과 배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에 연재되는 글들은 지난 5월 12일 ‘제주언론학회’·‘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희생자 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고영철이 발표한 내용(제주4·3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가운데, 원고분량 관계로 세미나 자료집에 다 싣지 못했던 내용들 중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이 연재는 자료집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된다. 미력하나마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필자 주>

▲글 싣는 차례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및 해소

2) 미군의 진주, 조선인민공화국 탄생과 좌절

3) 조선건국준비위원회 濟州島 지부 결성

4) 좌익단체 및 정당 출현

5) 우익단체 및 정당 출현

6) 좌익쇠퇴, 우익의 부상 징조들(신문광고 분석)

7) 좌익쇠퇴, 우익의 부상 징조들(남로당 탈당 성명서분석)

8) 신문형 삐라의 解題(➀∼➆)

(2-1)

8월 31일부터 제17방면군(조선군)사령부와 조선에 진주 예정인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었던 미제24단과의 사이에 직접 무선연락이 가능해진다. 그 후, 9월 6일 미군선발대가 상륙, 9월 8일에 제24군단본대가 인천에 상륙했다.(츠카사키 마사유키, 2007, 5쪽)

이 사이에 양군(兩軍)이 주고받은 전보문을 보면, 9월 1일 조선의 주요 도시에 살포된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장군의 포고문(‘한국민에게 고함’)과 9월 5일에 살포된 하지의 두 번째 포고령(‘남한민중 각위에게 고함’)등에 대한 조선인의 반응을 제17방면군사령관(조선군)이 미제24군사령관에게 일일이 보고한 생생한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第17方面軍(在朝鮮)終戰關係雜書綴』에 수록되어 있는 제17방면군사령관과 미제24군사령관이 서로 주고받은 전보문 중에 일부이다.(주1)

○ 9월 1일 제17방면군 사령관으로부터 미제24군 사령관 앞

…조선인 중에는 공산주의 혹은 독립운동자가 있는데, 이 기회에 치안을 어지럽히려고 계획하는 자가 있다. 경찰력은 군대의 지원으로 비로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군대에 의해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

○ 9월 1일 미제24군 사령관으로부터 제17방면군 사령관 앞

일본군은 미군이 그 책임을 인계받을 때까지 북위 38도 이남에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함과 동시에 행정기관을 그대로 두길 바란다. 이를 위해 오늘 미군기가 조선인에 대해서 치안을 유지하는 포고를 투하했다.(주1: 9월 1일 미군이 조선의 주요도시에 투하한 삐라( ‘한국민에게 고함’)를 말함)

○ 9월 2일 미제24군 사령관으로부터 제17방면군 사령관 앞

어제 남조선에 투하한 전단(선전삐라)에 대해 조선인의 반향을 간단히 보고할 것.

○ 9월 2일 미제24군사령관으로부터 제17방면군 사령관 앞

 1. 본관으로부터의 통신문의 일부를 발표하고 싶다는 취지의 귀하의 요구는 전문 그대로 공표할 것을 조건으로 승인한다.(주2: 이와 관련된 통신문은 9월 3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2. 참고로 본관은 9월 4일 또는 그 이후 날씨가 괜찮으면 가급적 빨리 조선민중에게 비행기로 포고문을 투하할 예정이다. 본전신은 비행기 투하전에 발표하지 않을 것이며 포고문의 내용은 계속해서 다른 전보로 나중에 보내겠다.

○ 9월 2일 제17방면군 사령관으로부터 미제24군 사령관 앞

 1. 하루에 투하된 전단에 대한 반도민(半島民)의 반향은 상당히 크며, 치안유지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공산계 적색분자의 책동을 봉쇄하는 데에도 상당히 유효하다.

 2. 장래 이런 종류의 전단 투하를 희망한다. 아직 미군의 진주까지 치안유지의 책임은 일본군사령관에게 있으며 약탈, 폭행, 소요, 파괴 등을 행하는 자는 군율에의해 처단된다는 점을 일반민중에게 통고(전단투하)하길 바란다.

○ 9월 3일 미제24군 사령관에 의한 제17방면군 사령관 앞

 1. … 9월 4일 조선민중에 대한 투하 포고문은 귀군의 요구를 포함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 9월 3일 미 24군 사령관으로부터 제17방면군 사령관 앞으로 보낸 포고문안

남조선주민에게 고한다.

…제군들 모두는 정체의 변혁이 하룻밤사이에 일어났다고 한다면 반드시 큰 소요와유혈과 제군의 장래에 사용될 유용 재산의 파괴가 동반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제군의 생활을 가능한 한 구속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미군의 염원이다 질서의 유지에는 제군의 전적인 원조협력이 제군 스스로에게도 큰 이익이 될 것이다. 존 R 하지 중장

(주3: 위의 하지의 포고문안은 9월 5일 ‘남한민중 각위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을 달고 주요 도시에 살포되었다)

○ 9월 3일 제17방면군 사령관으로부터 미제24군 사령관

 1. 제13신의 포고문은 귀군이 투하 후, 그 포고문을 바로 라디오 방송하여 남조선 전역에 전달함과 동시에 요소에 포스터를 붙이고 싶지만 지장은 없는가.

 2. 이 포고문을 보면 조선인, 일본인이 함께 크게 안심하고 평온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9월4일 가능하면 새벽에 투하할 것을 희망한다.

○ 9월 3일 제17방면군 사령관으로부터 미제24군 사령관

귀 군 상륙 후에 현재의 일본군 통신망, 기재, 통신병 등을 남겨두고 동시에 이것을 이용하는 것을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 9월 3일 미제24군 사령관으로부터 제17방면군 사령관 앞

날씨가 허락한다면 9월 4일 12시경 포고문을 투하할 예정이다. 방송, 포스터도 문제없다.

이 왕복 전보문은 보면 일본군(조선군)은 통신이 가능해지자 조선민중이 미군에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공산계 적색분자 운운 중상모략하면서 자신들에게 치안유지를 맡겨줄 것을 호소하는 전보문을 보내기 시작했다. 미군은 일본군이 요구하는 내용을 자신들이 제작 살포한 삐라에 적극 반영하면서, 일본군 사령부에 “미군이 일본군으로 부터 통치책임을 인계받을 때까지 북위 38도 이남에서 조선의 치안을 유지함과 동시에 행정기관을 그대로 두길 바란다”는 전보문을 보내고, 일본군을 치안유지에 이용할 뜻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일본군이 건준과 별도로 치안유지 업무를 담당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9월 1일, 9월 2일, 9월 3일 제17방면군 사령관과 미제24군 사령관 사이에 주고받은 왕복 전보문 속에 나오는 삐라의 내용과 통지문은 다음과 같다.

(주1) 한국민에게 고함

“미국군사는 조선의 재건과 질서있는 정치를 실시코자 근일중에 상륙하겠습니다. 이를 실시하는 것은 민주국인 미국입니다.

조선이 재건되느냐 못되느냐 또는 빨리 되느냐 더디 되느냐는 것은 오로지 조선국민의 행동 여하에 달렸습니다. 이때에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은 의미없이 인명을 잃고 국토를 어지럽히고 독립을 더디게 할 것입니다. 현재의 환경은 여러 가지로 못마땅한 점이 많겠지만 장래의 한국을 위하여 냉정 침착히 질서를 지키어 국내에 동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심전력을 기울여 평화산업에 힘써 주셔야 하겠습니다.

지금 말씀한 것을 충실히 지키면 조선은 속히 독립될 것이고 또 민주주의하에서 행복된 생활을 할 날이 속히 도달할 것입니다.”(출전: 매일신보 1945년 9월 1일. 그리고 이 삐라는 국한문, 영문, 일본어로 쓰여졌다.)

 

(주2) 9월 2일 주고받은 통지문 내용

일본정부, 9월7일 경성지구에 미군진주 발표

일본정부 발표(9月 1日 15時)

△ 9月 7日에 미육군 제24군 소속부대는 조선 경성지구에 진주한다.

△ 우(右)에 관하여 인천항 동슈도(東水道) 10리(哩)의 지역에 있는 모든 선박 및 함정은 9月 5日 18時부터 강선행(降船行)이 금지된다.

△ 右 지역에 있는 일본군대는 9月 6日까지에 철퇴한다.

△ 右 철퇴지역 내에서는 일본경찰, 헌병 등의 요원을 주류(駐留)시키어 치안 유지에 임(任)케 한다. (매일신보 1945년 9월 3일)

 

(주3) <남한 민중 각위에게 고함>― 하지의 포고문

남한민중 각위에게 고함

미군은 근일중 귀국에 상륙하게 되었다. 당 군은 일본 동경에 있어서 조인될 일본군 항복에 기하여 연합군 대표로서 상륙하는 것으로 귀국을 민주주의 제도하에 있게 하고 국민의 질서유지를 도모함도 또한 금(今) 동상륙(同上陸)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조직의 개변(改變)은 일조일석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그 안녕유지에는 큰 혼란 및(及) 유혈을 동반함을 명심할 것이다. 여하한 개혁도 서서히 진행되므로 그와 함께 민중에 있어서도 장래에 예비하여 각자 及 국가건설을 위하여 또한 민주주의하 생활의 유지를 도모하기에 각자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 하여야 할 것이다. 자(玆)에 있어서 당군(當軍)은 상술 목적을 신속리에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민중에 대해 좌기 제점(諸點)을 포함하여 절실한 원조협력을 요망하는 바이다.

기(記)

민중에 대한 포고 및(及) 제명령은 현존하는 제(諸)관청을 통해 발포되는 것으로 연합군총사령관으로부터의 명령은 제씨의 원조에 그 본의가 있는 것으로서 각위는 엄숙히 준수여행(遵守勵行)하며 불행히도 위반한 자는 처벌당할 것이다. 즉 각자는 통상(通常)과 如히 생업에 전념하고 이기주의로 날뛴다던가 일본인 및 미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 재산 및(及) 기설 기관파괴 등의 경거망동에 휩쓸린다던가 하는 행동은 이를 엄히 피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고 평시와 하등 변함없는 생활을 할 것이다. 이것은 국토건설에 박차를 가하며 또한 각자의 일상생활의 향상을 꾀하는 소이(所以)라 할 것이다.

미군당국에 있어서도 각자의 생활에 부자유를 초래할 명령을 발함과 같은 일을 극력 피하고자 하는 바인즉 각자의 충심에서의 협력을 절망(切望)하는 바이다.

서기 1945년 9월 2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 육군중장 존·알·하지

하지의 포고문을 보면 미군은 이미 패전한 일본인에 대한 반란행위까지도 금지하면서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반면, 조선인에게는 “ 각자의 생활에 부자유를 초래할 명령을 발함과 같은 일을 극력 피하고자 하는 바”이니, 각자는 조심하라고 매우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적국이었던 일본인에 대한 미국의 각별한 태도는 이미 앞의 전보문에서 보았듯이 미국과 패전한 일본간의 흥정의 결과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한반도 38도선이남, 경성에 소련군이 아니고 미군이 상륙한다는 소식은 건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군의 상륙이 임박해지자 치안유지에 주력하던 건준은 이들과 절충할 민족의 총의(總意) 집결체가 필요하다는 논리하에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주2) 미군상륙에 앞서 주도권을 잡기위해 과도정부라도 빠르게 세워 미국과 협상을 진행하자는 복안이 깔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건준은 건국준비위원회를 개편한지 이틀만인 9월 6일 건준을 해소하고 정부를 수립하기위한 방안으로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로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매일신보(1945년 9월 7일)는 <건준,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 ‘인공’ 임시조직법안 상정통과>라는 제목하에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의 수립과정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건국대업을 공의(公議)에 부의코자 그동안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준비하고 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는 9월 6일 오후 9시 경기고녀강당에서 전국대표 1천여명의 결합아래 대회를 개최하였다.

벽두(劈頭) 건준 선전부 이여성의 개회선언이 있자 곧 의장 선출에 들어가 위원장 여운형 의장석에 등단하자 개회사를 한 다음 전원 기립하여 해방전선에서 희생한 선배동지들의 추도묵상이 있고 국가제창이 있은 후 부위원장 허헌 경과보고가 있고 이어 ‘조선인민공화국’ 조직 기본법초안을 축조낭독(逐條朗讀)하여 다소의 수정을 가하여 이를 통과시킨 후 인민위원 선거에 들어가 위원장, 부위원장을 가(加)한 5명의 전형위원을 선정하여 55명의 인민위원,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으로 발표하였다.

◊ 전국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요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전, 최용달, 이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이승엽, 강기덕, 조두원, 이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호,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이상 55명)

◊ 후보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이상 20명)

◊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항규,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이영(이상 12명)

이날 대회에서 민주주의적 정부를 즉시 수립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국호 문제가 제기되어 건국동맹에서‘조선공화국’으로 하자는 안을 제출하였으나.(주3) 공산당 계열이 다수였던 상황에서 어떤 대의원이 ‘인민공화국’이란 명칭의 타당성을 열렬히 주장하였고, 참석자들이 삽시간에 이에 동조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이란 명칭이 국호로 결정되었다.(주4)

이 명칭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는데,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쓰게 배경 및 경위에 대해 10월 1일 오후 7시경에 시내 옥인정(玉仁町) 47번지에서 각 신문사 기자단과 회견을 갖고 개인자격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아래 내용은 매일신보1945년 10월 2일자의 기사내용과 이기형의 책자(213-214쪽)에서 발췌한 것이다)

 

(문) 어째서 <인민공화국>이라고 했는가?

(답) 먼저 인민공화국을 조직하고 인민위원을 선정하였는데 국호에 각설이 있었다. 즉 朝鮮, 大韓, 高麗, 大震(대진) 등이 있었으나 결국 단군 이래의 고유명사인 ‘조선’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인민’(人民)이란 문자에 대하여도 여러 가지 의론(議論)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라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는 것이다. 벌써 100년전에 미국에서는 인민을 주권의 주체로 보지 않았는가?(주5) 대체 조선의 독립은 단순한 연합군의 선물은 아니다. 우리 동포는 과거 36년간 유혈의 항쟁을 계속하여 온 투쟁으로 인해 오늘날 자주독립을 획득한 것이다. 혁명가는 먼저 정부를 조직하고 인민의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에 비상조치로 생겨난 것이 인민공화국이다. (……)

(문) 인민공화국정부는 붉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하(如何)

(답) 포복절도할 일이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의 조선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조선에 적색이 어데 있느냐. 대체 공산주의자를 배격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다 같이 되어 가지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냐. 많고 적은 것은 결국 인민투표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영국을 보라. 6·7년간 전쟁에 승리의 공로자 처칠이 물러나고 영국의 노동당이 승리했다. 그러나 적색은 아니다. 영국내각에는 공산당이 3인밖에 없다. 노동자 ·농민· 일반 노동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이냐. 만일 그러면 나는 공산주의자도 되겠다. 노동대중을 위하여 여생을 바치겠다. 우익이 만약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 이론을 나는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 <인공>을 적색으로 아는 사람은 소학교 1년생과 같은 사람이라 하겠다. 나누면 무너지고 합하면 이룬다. 한국민주당, 국민당, 건준이 모두 민족적 총력을 집결하여야 할 터인데 그것을 인민이 하여야 한다. 사대주의 배외사상은 절대 배제하여야 하겠다. (출전: 매일신보 1945년 10월 2일)

여운형은 10월 1일 기자단과의 질의응답에서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은 인민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민주주의 국가이고, 나라의 주권이 국민(인민)에게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따위와 같은 우익쪽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이 1948년 9월 9일 북조선에서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전혀 다른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빨갱이 집단으로 낙인찍어 악마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건준은 9월 8일 미군이 인천 상륙하기 이틀 전에 이들을 공식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주체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하에 비상한 방법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 선포했던 것이다. 즉 이러한 조치가 미군의 진주를 앞두고 급조되었음이 인민위원을 선출한 후 위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행한 다음과 같은 여운형의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주6)

“갑자기 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한 데 대하여 여러분들에게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을 나로서는 사과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국의 비상시니 비상조치로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선출된 인민위원은 각계각층을 망라하였다. 이는 아주 완전하다고 할 수 없고 이제부터 인민 총의에 의한 대표위원이 나올 때까지의 잠정적 위원이라 할 수 있다. 선출된 위원은 대개 승낙할 것으로 생각한다. 말할 것도 없이 건국 대업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로마는 하루에 된 것이 아니라고 한 것과 같이 건국의 대업이 하루에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연합국의 진주가 금명간에 있을 것이니 연합군과 절충할 인민 총의의 집결체가 없으면 안 될 것이다. 그 집결체의 준비공작으로서 급히 전국대표회의를 개최하지 아니하면 안 되게 된 것이다. 대표위원은 일치단결하여 힘있는 대로 그 건국대업에 노력하여 주기를 바란다. 앞으로 사업의 진전에 따라 <건준>은 그 사무가 종료될 것이다. …… 끝으로 우리는 전 세계인류의 지도준칙에 입각하고 거기에 우리 조선의 특수조건을 참작하여 건국대업의 가장 견고한 기초를 세워야 할 것이다”.

○ 미군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최초의 만남

9월 초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여운형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해상에서 일본인의 행악을 미리 알고 올라오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몽양은 백상규, 조한용, 여운홍(여운형의 동생)등 세 사람에게 <건준> 위원장의 명의로 된 환영메시지를 휴대시켜 ― 9월 6일 인공이 수립 선포되기 4일전인 ― 9월 2일 인천 앞바다 덕적도 밖 해상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해상에서 5∼6일 동안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9월 8일 새벽에 42척으로 된 미군 함대를 발견하고 하지 사령관이 탄 기함에 오를 수 있었다.(주7)

우익측에서도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를 대표해서 조병옥, 정일형 등이 인천까지 출영을 나가 미군의 한반도 진주를 열렬히 환영하였다.(주8)

당시에 실질적인 정부 역할을 하던 조선인민공화국과 미 군정사령부가 최초로 접촉한 것은 이 조직의 대표들이(자신들은 스스로를 the Provisional Korean Commission(‘임시조선위원회’)이라고 불렀다) 1945년 9월 8일에 미 해군기선 캐톡틴(the AGC CATOCTIN)에 승선한 미 제24군단 본부에 나타났을 때였다.(주9)

이들이 캐톡틴 호에 올라탄 후 미군은 이들의 의견만 청취했을 뿐 하지는 건준이 보낸 대표를 만나 주지도 않았고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는 이미 여운형에 대해 구체적으로 요해하고 환영할 수 없는 인물로 점찍었던 것이다.(주10)

그 이유는 일본 총독부가 이들을 후원했다는 점과, 미국이 특정 정치 집단에게 호의적으로 대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주11)

이들은 미군에게 다양한 종류의 망명 정부에 대한 견해를 물었고, 미군 참모들에게 자신들은 미군정을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며, 자신들이 미군정과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매개 기능을 수행하면서 봉사할 수 있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주12)

반면에 하지 사령관의 참모장인 까빈 준장이 제일 많은 관심을 보였던 문제는, 첫째로 소련군이 진주한 후에 있어서의 그들의 행동과 공산세력 활동에 관한 것, 둘째로 발전소의 분포상황과 그 현황, 셋째로 <건준>에 관한 여러 가지 상황인데 그 성격· 권한·조직 형태·구성 인물과 그 성분 등이었다.(주13)

미국인들은 이 위원회와의 접촉을 통해서 이들이 한국 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145개의 개별 위원회를 종합하여 구성된 조직이며, 한국인에게 적합한 민주주의적 정부 형태를 갖춘 조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미군이 조선에 상륙하기 하루 전인 9월 7일 38선 이남에 대한 점령정책을 명시한 <조선인민에게 고함>이라는 포고 제1호를 발표하였고, 이 포고문은 그 즉시 비행기로 남한의 상공에 뿌려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주14)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 미육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국 천황과 일본 정부와 일본군 대본영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지휘 하의 승전군은 오늘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함.

오랫동안 조선인의 노예화된 사실과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독립시킬 결정을 고려한 결과 조선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 조항 이행과 조선인의 인권 및 종교상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음을 조선인에게 확언함. 이 목적을 위하여 적극적 원조와 협력을 요구함.

본관은 본관에게 부여된 태평양 미육군 최고지휘관의 권한을 가지고 이로부터 조선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동지의 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설립함에 따라서 점령에 관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포고함.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과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서 실행함.

제2조 정부 공공단체 또는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과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직원과 고용인은 유급, 무급을 불문하고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직무에 종사하고 또한 모든 기록과 재산의 보관에 임할 것.

제3조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할 것.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 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함.

제4조 주민의 소유권은 이를 존중함. 주민은 본관의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일상의 업무에 종사할 것.

제5조 군정기간 중 영어를 가지고 모든 목적에 사용하는 공용어로 함. 영어와 조선어 또는 일본어간에 해석 및 정의가 불명확하거나 또는 같지 않을 때는 영어를 기본으로 함.

제6조 이후 공포하게 되는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하여 주민이 이행하여야 될 사항을 명기함.

일본 요꼬하마에서 1945년 9월 7일

태평양방면 미국육군 총사령관 미국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

이틀 후에는 “조선인으로서 포고령을 위반한 자는 사형 등의 엄벌에 처한다” 는 포고 2호(범죄와 범행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보다시피 맥아더 포고령 1호는 점령군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매우 고압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를 테면, ➀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➁ 조선인민은 미군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라.➂ 한반도 38도 이남의 지역과 동주민에 대한 모든 통취권한은 나에게 있다. ➃ 제3조 …… 점령군에 대하여 반항행동을 하거나 또는 질서 보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한다. 등등.

포고령 1호는 한반도 38도선 이남에 대한 통치권한은 미군에 있다는 것을 선포함과 동시에 그동안 조선건국준비원회나 인민공화국이 수행하고 있는 자치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9월 8일 하지중장이 이끄는 미군은 공군의 엄호 하에 완전 무장하고 마치 적진에 상륙하듯 무시무시하게 인천에 상륙했으며, 미리 일본군경을 동원 조선인들에게 일체의 외출을 금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해방군’인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외출했고, 결국 경비구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총격을 받아 상당수의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한국인들이 이에 항의하자, 미군 당국은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오히려 살인을 저지른 일본 경찰을 두둔하였다.

어느 모로 보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태도는 정복자의 그것이었지 해방자의 그것을 아니었다. (주15)

9월 9일 4시 30분, 서울에 진주한 제24군단의 하지 중장과 아베총독이 조선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 하지는 이전 총독부 간판을 미 군정청 간판으로 바꾸고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 일본의 법률과 규칙을 모두 그대로 유지하였다.(주16) 때맞추어 총독부 건물에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기 내려지고 그 대신 성조기가 높이 솟아올랐다. 이렇게 하여 미군정시대가 막을 올리게 되었다. 즉 남조선의 통치권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양된 것이다.

이 같은 정권의 이양절차를 거친 미군정은 그 즉시 자신만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였고 그에 따라 ‘조선인민공화국’은 간단히 부정되었다.(주17)

현지 미군정은 맥아더의 9월 11일자 지시에 따라 아베 총독을 9월 12일자로 해임했으며 총독을 대신할 군정장관에 7사단장 아놀드 소장을 임명했다. 19일에는 미군정의 실시가 정식으로 선포되었다.(주18)

사진(좌): 조선총독부의 국기 게양대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사진(우)는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
사진(좌): 조선총독부의 국기 게양대에 일장기가 내려가고, 사진(우)는 성조기가 올라가는 모습

미군이 근일 중에 조선에 상륙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경성의 길거리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기 시작했는지, 여연구는『나의 아버지 여운형』에서 다음과 묘사하고 있다.

“ 맥아더 포고와 하지의 성명이 발표되자마자, 깊숙이 숨어서 숨도 바로 못 쉬고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던 친일파들이 머리를 쳐들었다. 악명을 떨친 친일 거두들이 신사옷을 빼입고 머리 기름내를 풍기며 버젓이 미군정청으로 찾아갔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얼굴에 또다시 개기름이 흐르고 칠피구두를 반짝거리며 네거리를 활보할 때 인민들의 가슴은 절망으로 잦아들었고, 단장의 괴로움에 잠겼다. 이들은 매일 밤 미군 환영회요, 무도회요 하면서 뚱땅거렸다. 하지는 악질적인 친일 주구들로 고문회의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자기의 정치기반으로 삼았다.(……) 하지의 고문회는 김성수(의장), 송진우, 김용순, 이용설, 윤기익, 김동원 등 하나같이 악명 높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로 구성되었다. 재빨리 일본옷을 벗어던지고 미국 옷으로 갈아입은 번견(番犬)들이었다”.(주19)

우익진영은 이처럼 서서히 정치 활동을 재기하기 시작하였다. 그 움직임은 대표적으로 한국민주당(한민당) 및 ‘국민대회준비회’ 등의 결성으로 나타난다. 이와 더불어 우익진영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고 건준과 인민공화국의 인상을 나쁘게 하기 위한 각종 비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하였다.(주20)

이와 같이 한반도 남쪽의 정세는 인공의 기대했던 것과 달리 미군정의 등장, 우익의 농간에 의해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정파간의 논쟁은 본 논의 주제에서 벗어난다고 생각되어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인공의 움직임을 추적해보자.<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2-2)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주>

(주1) 츠카사키 마사유키,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 정세 - 일본군 전보문을 통해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3』(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7. 12.), 5∼6쪽

(주2) 심지연, 28쪽

(주3) 송남헌, 49쪽

(주4) 임영태(2021.1.4.).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②, 통일뉴스.).

(주5) 여기서 말하는 인민은 1863년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게티즈버그>에서 한 연설에 나오는 인민(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인민(人民)’이라는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하여 왔다고 한다. 이 말은 맹자(孟子)나 주례(周禮)와 같은 중국 고대의 문헌들에도 등장하는데, 맹자는 제후가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야 할 세 가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로 ‘인민’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근대 이후 서양의 공화주의 정치사상이 전해진 뒤에는 라틴어의 ‘포풀루스(populus)’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영어의 ‘피플(people)’이나, 다른 언어에서 그에 상응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낱말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다.(두산백과)

(주6) 이기형, 208∼209쪽

(주7) 이기형, 215쪽

(주8) 송남헌, 91쪽

(주9) 주한 미군사2> 2부. 2장. > B 조선인민공화국

(주10) 여연구, 158쪽

(주11)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 인터뷰, 17 April 1946. 주한 미군사2> 2부. 2장. > B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재인용

(주12) G-2 Periodic Report #1, 9 Sept. 1945 . 주한 미군사2> 2부. 2장. > B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재인용

(주13) 이기형, 215쪽

(주14) 박세길, 45쪽

(주15) 박세길, 46쪽

(주16) 여연구, 158쪽

(주17) 박세길, 48쪽

(주18) 이기형, 216쪽

(주19) 여연구, 159쪽

(주20)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심지연의『해방정국 논쟁사 1』의 16-23쪽을 참고하기 바람.

 

<참고문헌>

츠카사키 마사유키(2007).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 정세 - 일본군 전보문을 통해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3권, 227∼286.

이기형(1984).『몽양여운형』. 서울: 실천문학사.

송남헌(1985).『해방 3년사 1』(1945-1948). 서울: 도서출판 까치 .

심지연 엮음(1986). 『해방정국 논쟁사 1』. 서울: 도서출판 한울.

이완범 (2007).『 1945-1948 한국해방 3년사』. 파주시: 태학사.

정병준(1995).『몽양 여운형 평전』. 서울: 한울.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1996).『발굴자료로 쓴 한국현대사』. 중앙일보사.

여연구(2001).『나의 아버지 여운형』. 서울: 김영사.

박세길(1988).『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서울: 돌베개.

송건호(1984). 『한국현대인물사론』. 서울: 한길사.

매일신보 1945년 8월부터 12월말까지.

임태영(2020.12.28).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①. 통일뉴스.

임영태(2021.01.04.) .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②. 통일뉴스.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1945 - 우리역사넷 history.go.kr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필자) 약력

2023년 7월 현재 그는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홍보학과)로 활동중이고, 2019년 12월에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언론ㆍ출판부문)’을 수상한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제주언론 돌아보기1>, <제주언론의 보도방식과 수용자>(공저), <언론이 변해야 지역이 산다: 지역언론의 정체성과 과제>, <브랜드 홍보론>(공저), <고영철 사회비평집: 구라(口羅)>, <지역신문정책과 지원효과>(공저)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캠페인관련 뉴스 프레임 및 뉴스정보의 출처에 관한 연구: 국내 5대 일간지의 세계7대 자연경관선정캠페인 보도를 중심으로” , “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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