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곽기수(敎授郭期壽)의 조천관 중창기(朝天舘重創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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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곽기수(敎授郭期壽)의 조천관 중창기(朝天舘重創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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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궷물' 정호가 조천을 그리며-5]

(1), 목사 李沃(이옥)은 1590년(선조 23) 조천관(朝天館)을 중창하고 조천진성을 넓히어 쌍벽루(雙碧樓)를 설치하였습니다.

(2), 「조천관기(朝天舘記)」 또는 「조천관 중창기(朝天舘重創記)」는 이옥 목사가 1590년 조천관을 고쳐지은 사실을 敎授 곽기수(郭期壽)가 1591年(宣祖24) 濟州鄕校 敎授로 있을 당시 기록한 記文으로 같은 내용으로, 「조천관기(朝天舘記)」는 교수 곽기수가 자신의 「한벽당문집」에 남긴 기록이며, 「조천관 중창기」는 이원진 목사가 1653년 그의 「탐라지」에 수록하면서 ‘교수 곽기수의 중창기’라고 기록한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옥 목사가 조천관을 고쳐지은 다음해에 기술한 것으로 조천관을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最古(가장 오래된)의 기본 자료입니다.

(3), 「탐라지」는 1653년(효종 4년)에 목사 李元鎭(이원진)이 편찬한 읍지로 조선 중기 이후에 조정에서 편찬(官撰)하였던, 개인이 편찬(私撰)하였던 본 「탐라지」를 참고했을 정도로 자료적 가치가 큰 탐라지리지로 교수 곽기수의 「조천관 중창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교수 곽기수의 조천관 중창기 원문 

<敎授 郭期壽의 「朝天舘 重創記」 >

朝天所 城中有朝天舘廚廐軍器庫 東城上有雙碧樓戀北亭

敎授郭期壽重創記 舘在乇羅之東二十五里許海口

乃出陸人候風地所也 命名曰朝天 以此也 節制使李侯沃

割符之明年卽庚寅歲也 李侯謨於幕府諸公 問于吏民曰 朝天之爲舘

實賊路之要衝 使命之所 舍而若是乎 城子迫隘 屋宇凋殘

盍於農隙改搆 而壯麗焉 皆曰諾 於是 命麾下前部將徐萬鎰

主其事擧勤幹也 遂掄群才役子來 經始於良月 告訖於季冬

城子則退築 東北上安譙樓 其名雙碧 屋宇則中置廳事

三面爲廊 而有堂焉 有武庫焉 有庖廚焉 (이하 생략)

※아래 글은 2002년 발간된 「譯註 耽羅志」의 번역문입니다. 이 번역문을 인용하여 일부 다른 글에서 번역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譯註 耽羅志」 자체의 주석은 방호소, 쌍벽루와 연북정, 곽기수에 대하여 해설하고 있는데 생략하였습니다.

朝天所㉠; 성안에 조천관(朝天舘)과 부엌, 마굿간㉡, 군기고가 있으며 동성(東城) 위에는 쌍벽루(雙碧樓)와 연북정(戀北亭)이 있다.(본문은 이원진 목사의 글인데, 교수 곽기수의 (조천관)중창기에 포함시키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교수 곽기수(郭期壽)의 중창기(重創記)에, (여기서부터 敎授 郭期壽의 조천관 重創記 내용이 되겠습니다.)

“조천관은 탁라(乇羅: 제주읍성) 동쪽 25리쯤의 포구(海丘)에 있으며,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는 곳이다. 이름을 조천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절제사 이옥(李沃) 후(侯)㉢가 부임한 다음 해인 경인년(선조 23, 1590)에 이후(李侯: 이옥)㉣는 막부의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고 아전과 주민들에게 묻고 나서, 이르기를 ‘조천에 관(舘)을 둔 것은 이곳이 실로 적(賊)이 왕래하는 요충지이며, 왕명을 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버려두다니 그럴 수 있겠는가! 성곽은 옹색하고 여러 건물들은 낡고 쓰러져 간다.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고쳐지어 크고 화려하게 함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옳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휘하의 전 부장㉤ 서만일(徐萬鎰)에게 그 일을 주관하여 성실하게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곧 여러 재능 있는 일꾼들을 모아 즐거운 마음으로 10월㉥에 시작하여 12월㉦에 완공하였음을 보고하였다. 성곽은 뒤로 물려 쌓고 동북쪽에 문루를 세워 쌍벽(雙碧)이라 하였다. 건물들은 중앙에 관아(官衙)를 두었고 삼면에는 회랑(回廊)을 만들었는데, 당(堂)과 무기고, 부엌이 있다.

(이하는 건축물들이 웅장하고 아름다워 칭송하는 내용과 李沃 목사의 업적과 서공(서만일)의 공적을 기리는 내용으로 생략합니다.)

<해설>

㉠ 朝天所는 朝天鎭城을 말하며 防護所는 鎭城을 달리 부르는 말입니다.

㉡ 부엌과 마구간의 원문은 廚廐(주구)인데, ①부엌과 마구간, ②군마의 마구간이라는 두 가지의 번역이 보입니다. 일반 부엌이었다면 기록으로 남길까? 도내의 모든 貢馬(공마)를 조천포로 반출했다면 공마의 마구간?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 「이옥(李沃) 후(侯)」의 원문은 ‘李侯沃’입니다. 거의 모든 번역문에서 후(侯) 자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侯’는 侯爵의준말로 존칭인 ‘公’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李公沃 정도의 뜻으로 해설하면 되는데, 이름은 분명히 李沃인데 侯 자는 뭐지? 생각하다가, 그냥 이름 다음에 李沃侯(이옥후)로 또는 번역문과 같이 李沃 侯로 뛰어 쓰고 있는데 주석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의 원문은 이후(李侯)인데, 위 ㉢에서 성과 이름까지 밝혔으므로 여기서부터는 李侯로 성과 존칭만 사용한 것입니다. 즉, ‘이공께서’는 정도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상대의 성이 김이면 김공....)

㉤ 「전 부장」의 원문은 「前部將」입니다. 「前部將」이라고 붙여 써야맞는 직책 이름인데, 대부분 번역문처럼 「前 部將」이라고 띄어 쓰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前部將」이라는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전임자라는 뜻인 「前 部將」으로 오히려 띄어 쓰고 있습니다.

본래의 뜻은 전위부대의 장수 정도의 직책입니다. 다시 부연하면 가)는 前部將, 나)는 左部將, 다)는 右部將......누구는 中部將! 이렇게 설명하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원문은 良月으로 10월(음력 시월)을 이르는 말입니다.

㉦ 원문은 季冬로 12월(음력 섣달)을 이르는 말입니다.

①연북정에서 바라본 조천연대/ 저 관곶연대(舘串烟臺)는 1590년 이옥 목사가 조천관을 고쳐짓던 현장도, 1591년 교수 곽기수가 「조천관 중창기」를 기록할 당시의 모습도 지켜보았으리라.②1702년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에는 ‘조천연대’를 ‘舘串烟臺(관곶연대 )’로 표기하고 있다.③12월 4일 오후 우연히 연북정 앞에서 ‘김기량 순례길’ QR코드를 부착하고 있는 줌마디자이너를 만나 부탁하여 찍은 사진이다. 지면을 통하여 고마운 뜻을 전한다. 복음이 순례길을 따라 멀리 멀리 퍼져나가기를 기원해본다.‘김기량 순례길’은 제주도 사람으로는 가장 먼저 세례를 받고 가장 먼저 순교한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를 기념하기 위한 순례길이라고 하였다.
①연북정에서 바라본 조천연대/ 저 관곶연대(舘串烟臺)는 1590년 이옥 목사가 조천관을 고쳐짓던 현장도, 1591년 교수 곽기수가 「조천관 중창기」를 기록할 당시의 모습도 지켜보았으리라.
②1702년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에는 ‘조천연대’를 ‘舘串烟臺(관곶연대 )’로 표기하고 있다.
③12월 4일 오후 우연히 연북정 앞에서 ‘김기량 순례길’ QR코드를 부착하고 있는 줌마디자이너를 만나 부탁하여 찍은 사진이다. 지면을 통하여 고마운 뜻을 전한다. 복음이 순례길을 따라 멀리 멀리 퍼져나가기를 기원해본다.
‘김기량 순례길’은 제주도 사람으로는 가장 먼저 세례를 받고 가장 먼저 순교한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를 기념하기 위한 순례길이라고 하였다.

-다음 편에는 Ⅵ.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조천조점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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