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릴 수 없는 이름 '연북정'과 바로 잡을 수 있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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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릴 수 없는 이름 '연북정'과 바로 잡을 수 있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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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궷물' 정호가 조천을 그리며] (4) 성윤문 목사는 편액(현판)을 '연북정'이라 하지 않았다

「탐라지초본」은 1841년 목사 이원조가 草稿(초고)한 읍지로 2007년 제주교육박물관에서 번역본으로 「탐라지초본 上」이 발간되었다.

필자가 가장 의혹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연북정은 곧 객사이다.」라는 글이 바로 이원조 목사의 「탐라지초본」에 쓰여 있다.

원래 한문은 원문과 역사적 사실을 함께 살펴야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있으므로, Ⅲ-(1) 「조천관 중창기」의 역사적 사실을 고찰하면서 「탐라지초본」의 원문을 단락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朝天鎭은 ①三面阻海 只通一門 上設譙樓

②城內有 朝天舘 戀北亭 軍器庫

③戀北亭卽客舍 舊在城外

④宣廟庚寅 牧使李沃 移建于東城上 扁以雙碧

⑤己亥 成允文重修 改扁曰戀北의 순으로 문장이 기술되어 있으나 역사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③,④,⑤,①,②의 순서가 될 수 있습니다.

③ 「연북정은 곧 객사로 옛날 성 밖에 있었는데,」

④ 「선조23년(경인년, 1590)에 목사 이옥이 동성 위로 「○○」을 옮겨 세우고 편액하기를 雙碧이라 했다.」

⑤ (10년 후) 「기해년(선조32, 1599)에 성윤문이 중수하고 戀北으로 편액을 고쳤다.」

→ ④의 「○○」은 문맥상 ‘戀北亭’인데, “목사 이옥이 동성 위로 戀北亭을 옮겨 세우고 편액하기를 雙碧”이라 하였고, 다음 ⑤에서 「성윤문이 중수하고 戀北으로 편액을 고쳤다」 하였습니다.

① 「삼면이 험한 바다인데, 단지 통하는 문이 하나 있어 그 위에 초루가 설치되었고,」

② 「성안에는 조천관과 연북정, 군기고가 있다,」 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①과 ②는 1590년 이옥 목사가 조천관을 중수한 이후 약 250여년이 지난, 1841년 이원조 목사가 「탐라지초본」을 편집할 때의 조천진의 형태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④⑤의 사실은 이원조 목사가 부임하기 훨씬 이전, 전임 이옥 목사와 성윤문 목사의 업적이므로 편액 그대로 雙碧과 戀北으로 草稿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③戀北亭卽客舍 舊在城外- 「연북정은 곧 객사로 옛날 성 밖에 있었다,」 는 글은 조천관과 雙碧에 대하여 가장 오래된 기문인 「조천관 중창기」와 탐라지초본 이전의 다른 탐라지 등과 비교하여 그 내용이 다릅니다. 다만 ④⑤의 부분은 전임 목사의 업적으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임의로 고치지 않은 것으로 의미를 갖는다 하겠습니다.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시설인 진성 위에 망루를 세워야지, 어찌 유희나 연회에 쓰이는 亭子를 세우겠습니까?

혹시 9진 가운데 성위에 망루가 아닌, 정자를 세운 곳이 있나요? 아니면 더 나아가 우리나라 어디에... 나는 왜 이렇게 미혹할까요?

첫째, 글은 문장의 앞뒤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고 했으니, 다시 원문의 순서대로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①「삼면이 험한 바다인데 단지 통하는 문이 하나 있고, 그 위에 초

루를 설치하였다.」 ② 「성안에 조천관과 연북정, 군기고가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면 문 위에 있는 초루와 성안에 있는 연북정은 같은 건물일까요? 아니면 다른 건물일까요? 그리고 성 안에 조천관과 연북정이 있는데, 흔히 객사라고 하는 조천관은 설명하지 않고 연북정을 객사라고 하였을까요?

오늘도 朝天舘浦(조천관포)를 찾아 17세기 후반 이익태 목사의 ‘탐라십경도 조천관’과 18세기 초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에 그려진 건물들의 흔적을 그려본다.
오늘도 朝天舘浦(조천관포)를 찾아 17세기 후반 이익태 목사의 ‘탐라십경도 조천관’과 18세기 초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에 그려진 건물들의 흔적을 그려본다.

현재는 조천진성과 연북정만이 朝天舘浦(조천포구)를 지키고 있다.

둘째, 동양 고전의 미덕은 '주해'(주석)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지금도 미혹하여 불혹을 넘기지 못하는 아쉬움이 바로

「戀北亭卽客舍」 ‘연북정은 곧 객사’(문자적 해석)라는 글에 주해가 없으니, 필부인 저는 지금까지 감히 전임 목사의 글에 토를 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미혹하여 끙끙 앓기만 했습니다.

명망 있는 학자나 향토사학자 또는 번역자의 註解(주해)만 있었더라도 저는 덜 미혹하였을 것입니다.

셋째, ③ 「연북정은 곧 객사로 옛날 성 밖에 있었는데」

④ 「선조 경인년(23년, 1590) 목사 이옥이 동성위로 옮겨 세우고

편액하기를 쌍벽정이라 했다.」 ⑤ 「기해년(32년, 1599)에 성윤문이 중수하며 연북정으로 편액을 고쳤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단락에서 「탐라지초본」 ‘조천진’ 관련기록의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Ⅲ-1 「조천관 중창기」 및 지금까지 인용한 여러 문헌의 기록과 사뭇 다릅니다.

요약하면 ①조천관은 그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성 밖에서 성 안(城內)으로 옮겨졌고, 1590년 이옥 목사가 조천관을 중창하며 성위에 쌍벽루를 세웠고, 10년 후에 목사 성윤문이 중수하며 편액을 ‘연북루’로 고친 것인데,→ 탐라지초본에 이르러 ②옛날 객사인 연북정이 성 밖에 있었는데, 목사 이옥이 성위로 옮겨 세우며 쌍벽정이라 하였고, 성윤문이 중수하며 연북정으로 편액을 고쳤다고 하니.

조천관 중창에 대하여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창 당시의 유일한 기록인 교수 곽기수(郭期壽)의 「조천관 중창기」 기문과 그 내용이 다르고, 흔히 客舍라고 하는 朝天館과 亭子인 戀北亭의 용도까지 바꿔지고 있는 것입니다.

17세기 후반 이익태 목사(1694~1696)의 탐라십경도 중 조천관. ①성안의 가장 큰 건물이 ‘조천관’ ②성위에 ‘연북정’과 다른 건물 ③동쪽에 유일하게 출입할 수 있는 거교(擧橋)가 이채롭다. ④서쪽에 이섭정(利涉亭) ⑤출입문인 남문(南門)-현재 위치와 같다.  ※③거교, ④이섭정은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중요한 자료로 현재 조천 비석거리 아래쪽이 모두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카페 비주앤주, 탐라십경도-
17세기 후반 이익태 목사(1694~1696)의 탐라십경도 중 조천관. ①성안의 가장 큰 건물이 ‘조천관’ ②성위에 ‘연북정’과 다른 건물 ③동쪽에 유일하게 출입할 수 있는 거교(擧橋)가 이채롭다. ④서쪽에 이섭정(利涉亭) ⑤출입문인 남문(南門)-현재 위치와 같다. ※③거교, ④이섭정은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중요한 자료로 현재 조천 비석거리 아래쪽이 모두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카페 비주앤주, 탐라십경도-

원래 객사였던 조천관은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연북정이 객사로 탈바꿈하여 성 위에 세워지게 되니, 원문도 번역문도 제가 쓰고자하는 내용도 분별하여 써 내려가기가 어려워집니다.

왜? 이렇게 바꿔졌을까요? 미혹이 극치에 이릅니다. 읽고 생각하기를 되풀이 하다 보니 불현듯이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이원조 목사도 1841년 부임하여 「탐라지초본」을 초고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즉, 이원조 목사도 외적에 대비하기 위한 진성 위에 유희에나 쓰이는 정자라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부임하기 훨씬 이전에 연북정으로 기록되고 그려지고 전해지고 있는 것을 알고서는 고민 고민하다가 탐라지초본 ‘조천진’편을 기술하면서 “조천관을 객사라고 기록하면 성 위에 있는 연북정은 당연히 정자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조천관은 해설에서 빼어 버리고 연북정을 客舍라고 하자! 그러면 후대에 「방어시설인 진성 위에 놀이를 위한 정자를 세웠다는 구설은 듣지 않을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사실이 아니라 저의 생각입니다. 저에게는 덮어두기에는 너무나 미혹함이 커서 생각하고 궁리하다가 떠오른 것을 적은 글입니다. 원문을 번역하는 것도 주해를 다는 것도 아닌 한 순간 나비의 꿈일 뿐입니다.

「탐라지초본」 ‘조천진’ 부분, 특히 「연북정은 곧 객사」라는 문장은 문자적 번역만이 아니라, 역사학적으로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탐라지초본」을 편집할 당시 감수가 제대로 안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연구하고 번역하는 학자께서는 주해(註解)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주해를 다는 것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 내용의 맥락을 이해하고 탐라지리(耽羅地理)와 제주향토사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하든, 「연북정」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이름이 되었습니다. 1601년 김상헌의 남사록,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 이후 편찬된 다수의 地誌와 1694년 이익태 목사의 탐라십경도 조천관, 1702년의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에 戀北亭으로 기록되고 그려져 전해왔고 오늘날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윤문 목사는 ’쌍벽루‘를 연북정이라고 고친 사실이 없습니다. 모든 원문(扁以雙碧, 己亥 成允文重修 改扁曰戀北)이 “쌍벽이라고 한 편액을 기해(1599년) 성윤문이 중수하여 ‘戀北’이라고 편액을 고쳤다”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戀北’은 전신인 ‘雙碧樓’를 이어서 ‘戀北樓’가 되는 것입니다.

'궷물' 김정호 ⓒ헤드라인제주
'궷물' 김정호 ⓒ헤드라인제주

이원조 목사의 「탐라지초본」 번역문에 「기해년(32년, 1599)에 성윤문이 쌍벽정을 중수하며 연북정으로 편액을 고쳤다.」 라고 한 것은 원문과 비교하여 엄연히 사실이 아니며, 후대에 변천된 역사적 사실로 선대 목사의 업적에 대한 사실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도 확인하였습니다. 앞으로는 「기해년(32년, 1599)에 성윤문이 ‘쌍벽루’를 중수하여 ‘연북루’로 현판을 고쳤다.」 라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니까요!

※「연북정」으로 어느 시대, 누가 처음으로 고쳤는지 알고 싶다면 더 궁구(窮究)하시고, “「○○」가 연북정으로 편액을 고쳤다”고 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연북정」! 그 이름은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이름이나, 성윤문 목사는 쌍벽루를 중수하며 현판을 「연북정」이 아니라, 「연북루」’으로 고쳤다는 것은 바로 잡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다음 편에는 Ⅴ. 교수 곽기수(敎授郭期壽)의 조천관 중창기(朝天舘重創記)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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