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1702년 (숙종 18년)에 당시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였던 이형상이 제주도의 각 고을을 순회한 장면을 화공 김남길(金南吉)을 시켜 제작한 기록화첩이며, 조천조점(朝天操點)은 조천관진(朝天舘鎭)을 순력할 때 군사를 조련하고 말과 군기고 등을 점검한 상황을 그린 그림입니다.
○ ‘탐라순력도 탐색(探索)’은 ‘탐라순력도’가 화첩이기 때문에 그 뜻을 해설하기 위하여 2014년 발간된 책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이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1) 조천조점(朝天操點)/ (탐라순력도 탐색 인용)
「朝天操點」의 朝天은 朝天舘을 이르고, 조점(操點)은 군사를 조련하고 병기 따위를 점열(點閱)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조천조점은 오른쪽 신촌 지역에서 朝天舘鎭으로 순력하는 목사 일행을, 舘浦와 朝天舘鎭, 舘串煙臺(관곶연대), 朝天舘里, 竹島(대섬), 猫水(궷물) 등을 그려 넣고, 조천관리 위쪽에 二所牧場의 둔마와 그 오른쪽에 日字로 둔마를 모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부연하여 설명한다면 朝天操點은 목사 일행이 순력하는 모습이 신촌 대섬 입구에서부터 朝天鎭까지 길게 그려져 있습니다, 상하를 돌려보아야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방향과 같게 됩니다. 즉 그림 아래 舘浦(관포)가 표기된 쪽이 남쪽이 아니라 북쪽이 되는 것입니다.
올레길을 걷는 사람은 마치 목사 일행이 조천진성 순력을 마치고 올레18코스를 따라 관곶연대 방향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착각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실제 탐라순력도는 화첩이 크기 때문에 순력하는 병사의 앞뒤 모습이 구별됩니다.)
그림 아래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壬午 十月 二十九日 宿所/ 임오년(1702) 10월 29일에 숙소에 도착
助防將 金三重/ 조방장은 김삼중이었다.
城丁軍 四百二十三名/ 성정군은 423명이었다.
軍器什物/ 군기와 什物(집물)을 점검했다.
牧子保人幷八十七名/ 목자와 보인은 아울러서 87명이었다.
馬五百五匹/ 말은 505필이었다.
<지명 바로알기> ‘가막/까막동산’; 현재 조천리 상동 취락구조 마을에서 조천읍사무소 뒤편(남쪽) 동산 일대를 가리킨다. 어원은 고려말 원나라가 제주에 말을 방목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가 동서아막(東西阿幕)인데, 그 말(馬)은 대부분 조천포구를 통하여 貢馬로 반출되었는데, 공마를 배에 실을 때까지 관리해야할 소규모의 목마장이 포구 가까이에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阿幕이 있는 동산→ ‘아막동산’의 ‘아’가 ‘가’로 음이 바뀌어→可幕동산→ ‘가막동산’의 ‘가’가 경음화되면서 ‘까막동산’으로도 불리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1706년(숙종32) 목사 송정규가 서우봉에 ‘서산장’을 만들어 공마(貢馬)를 배에 실을 때까지 방목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북제주군 지명총람에는 까마귀가 많이 날아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는데, 그야말로 까마귀가 ‘까악’ 거리며 울고 갑니다.
(2) 조천의 대섬(竹島)
탐라순력도 조천조점 그림 오른쪽 위에 현지 주민들도 익숙하지 않은 竹島와 猫水가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데, 竹島(죽도)는 ‘대섬’의 한자 차용 표기일 뿐 대나무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올레18코스를 걷는 탐방객, 그리고 대섬 맞은편의 속칭 ‘광기동산’과 ‘궷물’ 맞은편 동산에 새롭게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살아가고 계신 분들에게도 지역의 옛 지명 ‘대섬’과 ‘궷물’의 뜻이 와전되지 않도록 밝혀드리고자 합니다.
※ ‘큰 대섬’은 신촌리 지역입니다만,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오해 없기 바랍니다. 또한 지역주민 여러분께서도 대섬은 ‘큰 대섬’, ‘족은 대섬’으로 구분하지 않지만, 저는 ‘궷물’ 동네에서 낳고 자랐기 때문에 구별하고 살아갑니다.
즉, ‘큰 대섬’은 신촌, ‘족은 대섬’은 조천에 소재하고 있는 지경을 이릅니다.(탐라순력도에도 2개의 竹島가 그려져 있습니다.)
(3) 「궷물」과 「猫水(묘수)」
「궷물」은 제주어로 바위굴을 이르는 ‘궤’ + ‘물‘의 합성어로 “바위굴에서 솟아나는 물” 즉 ‘궤물’을 이르는 말이고, 「猫水」는 위 ‘궤물’의 한자 차용표기입니다. 그런데, 왜 「궤물」을 한자 「猫水」로 차용하게 되었느냐 하면, 우리나라 중세국어에서 고양이를 일컫는 말로 ‘괴’와 ‘궤’가 있는데, 본토에서는 ‘괴’, 제주에서는 ‘궤’를 많이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제주어(방언) 궤물의 ‘궤’와 음이 같은 漢字인 궤(고양이) ‘猫’ 와 水(물)을 합성하여 「猫水」라고 표기하게 된 것입니다. 옛 지명들이 대부분 고유어인데 한자를 차용하여 부르는 지명이 많다는 거 아시죠. 그럼 ‘궤물’은 왜 ‘궷물’이라고 하느냐?
예! 마저 설명하여 드리겠습니다.
⇒ ‘궷물’은 현행 한글맞춤법의 규정에 따라 사이시옷을 붙여 표기한 것입니다.
<한글맞춤법 관련 조항>
*우리말로 된 합성어에서 뒷말의 첫소리가 ‘ㄴ, ㅁ’이고, 그 앞에서 ‘ㄴ’소리가 덧나는 경우 사이시옷을 붙인다.
예) 아래+니<아랜니>→ 아랫니, 비+물<빈물>→ 빗물,
이+몸<인몸>→ 잇몸, 궤+물<궨물>→ 궷물
○ <제주도 지명에서 ‘궤(바위 굴)’와 ‘궤(고양이) 猫’의 사용 예>
* 「궤물오름/궷물오름」, ‘궤’를 바위굴의 뜻으로 사용한 유수암리 소재 오름으로 한자로 猫水岳이라고 표기하기도 합니다.
* 「괴살미/궤살미 오름」 ‘괴’와 ‘궤’를 고양이의 뜻으로 쓴 서김녕리 소재 오름으로 한자로 猫山峰으로 표기합니다. 풍수적으로 고양이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여 묘산봉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 <궷물 안내판>
궷물은 구 일주도로에서 신촌리 대섬을 막 지나서 조천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궷물 안내판에 궷물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용천수를 설명하였네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바로 아래가 ‘궷물’인데, 지금은 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궤가 상당부분 매립되어 그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콸콸 솟아나던 용출수의 양도 많이 줄어들어 아쉬움을 더합니다. 이전에 선친이 「궷물」을 정비하였던 사실을 기록한 기념비가 한 귀퉁이에 남아있어 더욱 씁쓸합니다.
왼쪽 멀리 무성하게 보이는 나무가 소나무인데 바로 ‘족은 대섬’ 끝으로 대략 56년을 전후하여 제가 선친과 같이 심었는데 저리 자라서 풍광을 뽐내고, 계절 따라 찾아드는 새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까록께기(가마우지?) 물오리, 논병아리 등이 주로 찾아들었는데, 지금은 왜가리들이 기슭을 차지하여 한가로이 쉬고 있습니다. 여름철이면 뒷담(울타리) 족은 문을 열고 나가 발가벗은 채로 저 족은 대섬 왜가리들이 쉬는 곳까지 헤엄치며 놀았던 곳인데.....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 정리에 들어가겠습니다.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에 ‘竹島’, ‘猫水’가 표시되어 있고, 탐라순력도 탐색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습니다.
* 竹島(죽도): ‘대섬’의 한자 차용표기로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와 신촌리 경계 바닷가에 있는 섬을 이른다.
* 猫水(묘수): 바위굴인 궤에서 솟아나는 물이라는 데서 ‘궷물’이라 부르고 이것을 한자차용표기로 쓴 것이 猫水(묘수)이다.
⇒요약하여 한 마디로 竹島는 ‘대섬’이고, 猫水는 ‘궷물’입니다. 대나무나 고양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북제주군 지명총람에는 「대섬을 섬의 이름이다. 竹島라고 하였다. 난류를 타고 온 대나무가 무성하였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류를 타고 온 대나무가 바닷물에 죽지도 않고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무성할 수 있는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북제주군을 탓할 수도 없고..., 그나마 나의 자양분이 되어준 ‘猫水(궷물)’를 ‘고냉이 물’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글을 줄입니다.
-다음 편에는 Ⅶ. 민족자존의 마을길을 따라 조천진(朝天鎭)에 이르러....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