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존의 마을길을 따라 조천진성 연북정(戀北亭)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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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존의 마을길을 따라 조천진성 연북정(戀北亭)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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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궷물' 정호가 조천을 그리며-7]

민족자존의 고장 조천읍! 신촌리를 지나서 조천진성 연북정(戀北亭)에 이르는 데는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가 이형상(李衡祥) 목사가 1702년 순력(巡歷)하였던 조천조점(朝天操點) 길, 즉 일주도로(속칭 한길= 신작로)이고, 다른 하나는 제주 올레 18코스로 대섬을 지나 바닷길과 마을안길을 따라 걷는 길입니다.

아래 사진은 Daum 지도로 조천읍 신촌리와 조천리 경계지점, 그리고 일주도로와 올레 18코스(점선)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왼쪽 □표식이 신촌리 대섬 입구 버스정류장이고, 대섬을 지나 올레 18코스(점선)가 조천진(아래 사진)까지 이어진다. 올레 18코스 바닷길 위 검푸른 부분은 바다이고, 그 아래(맞은 편)의 녹색 부분은 궷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일종의 호수? 입니다. 가운데 □표식이 있는 곳이 ‘궷물’이 위치한 곳으로 바로 갓길(노견) 아래입니다.

‘조천관은 객사이고 연북정은 정자이다.’ 라는 주제로 지난해 10월 25일부터 6회에 나누어 연재하였는데, 경자년 새해 1월 조천진성 연북정에 올라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연재 순서에 따라 잘못 쓰인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Ⅰ, 제주의 관문으로 후풍소(候風所)였던 조천진(朝天鎭)

‘조천진’은 설치 연대가 미상이지만, 세종 19년(1437)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이 제주도 방어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과 선조 23년(1590년)에 목사 李沃이 성곽을 뒤로 물려 쌓았다는 기록으로 봐서 1437년 이후 1590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조천진(朝天鎭)에 대하여 잘못 쓰인 내용과 기록

① 「제주특별자치도의 방어체제 - 3성 9진 25봉수 38연대」 조천진 내용 중에 「성을 동북쪽으로 물러 쌓아 그 위에 초루를 세워 객사로 삼고 ‘쌍벽(雙璧)’이라 했다. 선조 32년(1599) 성윤문 목사는 쌍벽정을 중수하여, 북녘에 계신 임금님을 사모하는 뜻을 담아 ‘연북정(戀北亭)’으로 이름을 바꿨다.」

⇒ 1591년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의 「조천관 중창기」에 (이옥 목사는) 「성곽은 뒤로 물려 쌓고 동북쪽에 초루(譙樓)를 세워 그 이름을 쌍벽(雙碧)이라 하였다.」 (원문; 城子則退築東北上安譙樓 其名雙碧)] 라고 기록하였지, 객사로 삼은 사실이 없으며, 또한 譙樓는 정자가 아니라 문루(門樓)이므로 쌍벽정이 아니라 ‘쌍벽루’가 되며, 쌍벽의 ‘벽’자 또한 구슬 ‘璧’이 아니라 푸를 ‘碧’자입니다.

성윤문 목사가 ‘쌍벽’을 중수한 사실을 보면 1765년 「증보탐라지」와 1841년 「탐라지초본」의 내용이 유사한데 “(이옥 목사가) 편액을 쌍벽(雙碧)이라 했고, 기해년(선조32년,1599) 성윤문 목사는 雙碧을 중수하여, 편액을 戀北으로 고쳤다”(원문; [扁以雙碧 己亥 成允文重修 改扁曰戀北) 라고 하였습니다. 즉 쌍벽정이 아니라 쌍벽루를 중수하여 연북(戀北)으로 편액을 고친 것입니다.

(‘戀北’은 전신인 ‘쌍벽루’를 이어서 ‘연북루’가 되어야 하지만, 戀北亭(연북정)은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이름이 되었기에 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② 「朝天鎭터」 표지석 내용 중 「고려시대부터 제주도의 주교통항으로 성이 축조돼 있었으며, 1374년(공민왕 23)에 조천관(朝天館)이 창건되었다.

⇒ ‘조천진성’은 설치 연대가 미상으로, 세종 19년(1437)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이 제주도 방어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선조 23년(1590) 이옥(李沃) 목사가 성을 뒤로 물려 쌓았다고 기록한 것으로 봐서 조천진성은 1437년 이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려시대부터 성이 축조돼 있었다」고 한 것은 잘못된 표기입니다.

⇒ 朝天舘, 또한 설치연대가 미상이나, 처음으로 확인이 되는 것은 세종실록 세종 21년(1439) 윤2월 4일자에 제주도안무사 한승순이 왜선의 정박할 要害지와 수비 방어하는 조건을 보고한 문서에

「도내에 군인이 주둔한 곳은 本州의 동쪽은 김녕(金寧)· 조천관(朝天館)」(원문; 道內軍人屯戍之處 則本州東則金寧朝天館) 이라는 기록이 있고, 이후 1591년 교수 곽기수의 조천관 중창기에 1590년(선조 23) 李沃 목사가 朝天舘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1374년(공민왕 23)에 조천관(朝天館)이 창건되었다」고 새겨 넣은 것은 확인할 수 없는 잘못된 표기입니다.

*선조 23년 이옥 목사가 조천관을 중창한 사실을, 누군가 공민왕 2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그 것이 확산된 것은 아닐까요?

Ⅱ, 조천관민(朝天舘民)의 기억 속에 지워진 조천관(朝天舘)

조천리는 일찍부터 ‘조천’이라 하였는데 朝天館이 설치되면서 ‘조천관마을’(朝天舘里)이라 하다가 ‘관’을 생략하여 ‘조천마을’(朝天里)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朝天舘의 설치연대는 미상이지만, 「세종실록」 21년 윤2월부터 확인할 수 있음으로 1439년(세종 21년) 이전에 세워졌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조천관의 옛터인 객사터(왓)에 대하여는 현재까지 당국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향토지인 「조천지」와 「조천읍지」에 ‘비석거리 동쪽 70m 지점, 옛날 객사 있었던 곳 ’이라는 기록이 있고, 지역 주민들이 흔히 ‘객사터’라고 부르는 곳은 조천리 2664번지이고, 객사왓이라고 부르는 곳은 조천리 2657번지인데(두 곳은 인접한 토지임), 구술하여 주신 김세혁씨는 객사왓이 객사터라고 구술하고 있는바, 조천관은 처음에는 성 밖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1590년 李沃 목사가 朝天舘을 조천진 안(內)에 중창하였고, 그 내용이 1591년 교수 곽기수의 조천관 중창기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이후 1694년 이익태 목사의 탐라십경도 조천관과 1702년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라는 화첩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당초 성 밖에 있던 조천관을 성안(城內)으로 옮겨 중창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나, 아쉽게도 현재 조천관은 처음 세워졌다는 성 밖(城外)에도 옮겨 중창하였다는 성 안(城內)에도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 조천관(朝天館)에 대하여 잘못 쓰인 내용과 기록

제가 찾아낸 것만 하여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 「朝天鎭터」 표지석, ‘朝天邑誌’, ‘조천읍 역사문화지’ 등에 「朝天館을 처음 창건한 것을 1,374년(공민왕 23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잘못된 내용으로 (가)는 쓰고, (나)는 인용하고, (다)는 퍼 나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바 있습니다.

⇒ 朝天舘의 설치연대는 미상으로, 처음으로 확인이 되는 것이 세종실록 세종 21년(1439) 윤2월 4일자에 제주도안무사 한승순이 왜선의 정박할 要害지와 수비 방어하는 조건을 보고한 문서 중에/

「도내에 군인이 주둔한 곳은 本州의 동쪽은 김녕(金寧)· 조천관(朝天館)」(원문; 道內軍人屯戍之處 則本州東則金寧朝天館) 이라는 기록으로 봐서 1439년(세종 21년) 이전에 세워졌음을 추정할 수 있으나, 「1374년(공민왕 23)에 조천관(朝天館)이 창건되었다」라고 쓰는 것은 확인할 수 없는 잘못된 표기입니다.

Ⅲ. 북쪽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하던 연북정(戀北亭)

연북정은 조천포구 조천진성 위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정자입니다. 문헌에는 1599년 목사 성윤문이 쌍벽루를 중수하여 북쪽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편액(현판)을 연북으로 고쳤다고 하며, 이후 1820년(순조 20)에 보수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1971년 제주도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보수한 건물입니다.

예로부터 조천포구는 화북포와 더불어 관원이나 도민들이 본토를 왕래하는 관문이었으며 순풍을 기다리는 候風所이기도 했습니다.

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에 왔던 김상헌도 조천관을 향해 연북정에 앉았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도 연북정에 앉아 북쪽에 계신 임금님을 그리워했을 것이며, 한라산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구나(雙碧)! 하는 감흥을 자아내면서도 순풍이 불어 귀경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 연북정(戀北亭)에 대하여 잘못 쓰인 내용과 기록

「연북정(戀北亭)」 안내판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1590년(선조23) 당시의 조천관을 중창하여 쌍벽정(雙璧亭)이라 칭하였다가 1599년(선조32)에 다시 건물을 고쳐서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하였다.」 고 하였는데,

⇒ 1590년(선조23) 당시의 조천관을 중창한 기록은 1591년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의 「조천관 중창기」인데, 요약하면 「성곽은 뒤로 물려 쌓고 동북쪽에 초루(譙樓)를 세워 쌍벽(雙碧)이라 하였다.」 (원문; 城子則退築東北 上安譙樓 其名雙碧)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조천관을 중창하여 쌍벽정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성곽위에 초루(譙樓)를 세워 쌍벽(雙碧)이라 명명한 것이니, 쌍벽정이 아니라 쌍벽루가 되는 것이며, 한문 글자도 쌍벽의 ‘벽’자가 구슬 ‘璧’이 아니라, 푸를 ‘碧’자입니다. 안내판의 한글뿐만 아니라, 영문, 한문도 검토하여야 하겠지요.

*戀北은 전신인 ‘쌍벽루’를 이어서 ‘연북루’가 되어야 하지만, 戀北亭(연북정)은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이름이 되었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Ⅳ. 되돌릴 수 없는 이름 「연북정」과 바로 잡을 수 있는 사실!

다음은 조선 후기인 1841년 이원조 목사의 탐라지초본에 대하여 고찰하여 보겠습니다.

탐라지초본에 조천진은 ‘삼면이 험한 바다로 막히고 단지 통하는 문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초루를 설치하였고, 성안에 조천관과 연북정, 군기고가 있다. 연북정은 곧 객사로 옛날 성 밖에 있었는데, 선조23년(경인년, 1590)에 목사 이옥이 동성 위로 옮겨 세우고 편액하기를 雙碧이라 했는데, 기해년(선조32, 1599)에 성윤문이 중수하고 戀北으로 편액을 고쳤다.’ (원문; 三面阻海 只通一門 上設譙樓 城內有 朝天舘 戀北亭 軍器庫 戀北亭卽客舍 舊在城外 宣廟庚寅 牧使李沃 移建于東城上 扁以雙碧 己亥 成允文重修 改扁曰戀北)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가장 의혹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연북정은 곧 객사이다.」라는 구절은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문헌의 기록과는 사뭇 다르게 쓰여 있습니다. 요약하면 [조천관은 그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성 밖에서 성 안(城內)으로 옮겨졌고, 1590년 이옥 목사가 그 조천관을 중창할 당시 성곽도 뒤로 물려 쌓으며 성위에 쌍벽루를 세웠고, 10년 후에 목사 성윤문이 쌍벽을 중수하며 편액을 ‘연북’로 고친 것인데,]→ 탐라지초본에는 [옛날 객사로 성 밖에 있던 연북정을 목사 이옥이 성위로 옮겨 세우며 쌍벽이라 하였고, 성윤문 목사가 중수하며 연북으로 편액을 고쳤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객사로 성 밖에 있던 조천관은 누군가의 둔갑술에 의거 일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정자로 탈바꿈한 연북정만 남아 객사라고 쓰임새까지 바꿔놓고 있는 것입니다.

* 오래전에 의혹을 가지고 있던 이회(李禬) 제주목사(1658~1660)의 이름에 대하여 지난해 5월 확인해보니, 「연안이씨 족보에는 이괴(李襘)로 되어있다. 항렬(行列) 글자로 모두 옷의(衣)변으로 된 외자 이름을 쓰고 있으나, 종래의 모든 사전에는 이회(李禬)로 쓰고 있어 혼돈을 피하기 위해 종전대로 쓰기로 한다」(요점 발췌)는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게 설명한 글을 보고, 이회 목사의 正名은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로 의혹이 풀렸던 생각이 납니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역사> 역사인물-

⇒탐라지초본 조천진 부분의 위 기문에 대하여도 문화재 담당기관에서 설명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하여튼 「연북정」은 1601년 김상헌의 남사록,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 등에는 기록으로, 1694년 이익태 목사의 탐라십경도 조천관, 1702년의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에는 기록과 화첩에 「연북정」으로 전해왔으며 오늘날도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에, 연북정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윤문 목사가 ’쌍벽루‘를 연북정으로 고쳤다는 사실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탐라지초본에도 “(이전에) 쌍벽이라고 한 편액을 기해(1599년) 성윤문이 중수하여 ‘戀北’이라고 편액을 고쳤다.”

(원문; 扁以雙碧, 己亥 成允文重修 改扁曰戀北)라고 적고 있습니다. 즉 ‘戀北’은 전신인 ‘雙碧樓’를 이어서 ‘戀北樓’가 되는 것입니다.

후대의 학자들이 성윤문 목사가 ‘쌍벽루 심지어는 쌍벽정을 연북정으로 고친 것으로 번역하여 온 것’에 대하여는 역사학적으로 더 깊은 탐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혹시, 1601년 김상헌의 남사록 10월 12일자 「朝天舘으로 향하였다. 戀北亭에 앉아 쉬었다. 정자의 이름이 옛 편액은 雙碧인데 목사 이옥 때에 세운 것이고, 前 목사 성윤문이 중수하여 故制(예전에 지은 것=雙碧)를 조금 늘리고 편액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원문; 卽向朝天舘 坐戀北亭 亭名舊扁雙碧 牧師李沃時所建 前牧師成允文重修 頗增故制 改扁今名云)는 기문을, 쌍벽인 편액을 성윤문이 중수하여 편액을 연북정으로 고친 근원이라고 하는 것인가요?

남사록의 이 기문 이후에도 탐라지 등 雙碧과 戀北에 대하여 쓰인 모든 원문이 「예전에 쌍벽이었던 편액을 성윤문 목사가 중수하여 편액을 연북으로 고쳤다.」 (원문; 舊扁雙碧, 成允文重修 改扁曰戀北) 라고 기록하고 있어.....여전히 의혹스러움이 남습니다.

* 남사록 10월 12일자 기문에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잘못 쓴 구절이 있기에, 그 구절만 발췌하였습니다.

「제주 별방방호소에서 잤다. 일찍이 아침밥을 먹고 난 후에 길을 떠나, 동문을 나서 별도포에 이르렀다. 전선과 제구를 점검하고 바로 조천관으로 향하였다.」는 (원문; 宿濟州別防防護所 早食後發行 出東門到別刀浦 査點戰船諸具 卽向朝天舘) 내용입니다. 제주인(濟州人)이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즉 별방방호소는 현재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별방진을 일컫는 말이므로, 별방진에서 잤으면 서쪽을 향하여 바로 조천관에 이르면 되는데, 윗글은 별방진에서 자고 (조천관을 지나쳐 제주시에 이르렀다가 되돌아서) 아침 일찍이 제주시 동문→ 별도포→ 조천관에 이르렀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지명에 혼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사록은 두 종류의 번역본이 보이는데, 이에 대한 주석은 없습니다)

당시 김상헌이 일찍이 아침밥을 먹고 난 후에 길을 나섰을 제주성의 東門(동문)입니다. 그림; 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8)

알다시피 남사록은 후대에 편집한 것이 아니라, 김상헌 자신이 일기체로 직접 쓴 글인데, 왜 잘못 쓴 것일까? 궁금하여 10월 12일 전날 김상헌의 행적을 살펴보니, 10월 11일은 「바람이 크게 불고 한라산에 눈이 내려, 제주객사에 머물렀노라」고(원문; 大風 漢拏山下雪 留濟州客舍)하였습니다. 즉 10월 11· 12일 행적과 문맥으로 보면 김상헌은 12일 아침 별방진이 아니라, 제주목을 출발하여 동문을 나서 별도포를 점검하고 조천관에 이른 것이 분명해집니다.

지금까지 연재 순서에 따라 잘못 쓰인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잘못된 표기를 고쳐서 바로잡아야 할 시간적 순서에 따라 나눠보겠습니다.(수정할 내용은 연재 순서에 따라 적시한 잘못 쓰인 내용과 기록입니다.)

▶ 첫 단계는 조속히 고쳐야 할 사항입니다.

① 「제주특별자치도의 방어체제 - 3성 9진 25봉수 38연대」 조천진 내용입니다.

② 「朝天鎭터」 표지석 내용입니다.

③ 「연북정(戀北亭)」 안내판 내용입니다.

이상 ①, ②, ③번 모두 문화재를 제대로 관리, 보전, 홍보하여야 할 행정당국이 오히려 잘못을 표기하고, 그 내용을 홍보하고 있는 꼴입니다. 한 가지 사례로 연북정 안내판에 ‘雙碧’의 푸를 ‘碧’자를 구술 ‘壁’자로 잘못 표기함으로써 많은 블로그와 카페 등에서

“쌍벽(雙璧)은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고 인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바 있습니다.

(雙璧×, 연북정과 관련해서는 틀린 글자이니 따라 쓰지 마십시오)

☞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에서 하루! 아니 한 시라도 빨리 수정하고 고쳐서 도민뿐만 아니라 관광객 또는 탐방객들이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하여 주기 바랍니다.(글을 마무리하다 보니 의도하지 않게 결국 글머리가 문화재 담당기관으로 돌아갑니다.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며, 이 글을 안 볼 수도 있으니 제가 전화를 하여야 하겠네요.)

④ 「朝天館」 표지석은 객사터(왓)에 대한 고증이 끝날 때까지 조천리사무소에서 일단 철거하였다가, 고증이 끝난 후에 다시 세워서 혼란을 방지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 두 번째 단계는 충분히 검토한 후에 처리하여할 사항입니다.

① 朝天館의 옛터인 객사터(왓)에 대하여 발굴 등 조사가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② 조천관 및 그 부속건물을 복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조천관 중창기, 탐라십경도 조천관, 탐라순력도 조천조점, 탐라지 등에 근거하여..... 제주 목관아지에 버금가는 문화유산이 될 것입니다.)

③ 「朝天館을 처음 창건한 것이 1,374년(공민왕 23년)이다.」 라는 잘못된 표기가 확산되지 않도록 당국의 관심과 대책이 필요합니다.

(제가 찾은 기록 중에도 「朝天鎭터」 표지석, 「조천읍 역사문화지」는 바로 문화재를 담당하고 있는 당국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사례입니다.)

④ 1841년 이원조 목사의 탐라지초본 조천진 부분에 대하여는 역사학적으로 더 깊은 탐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耽羅誌草本의 ‘草本’은 초벌로 쓴 원고라는 뜻(初本)이라기보다는 그냥 겸양의 표기? 로 쓴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 내용이 감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도, 耽羅誌草本 전기(1590년 이옥 목사의 조천관 중창~ 1841년 탐라지초본 편집 사이의 약250년 간)의 타 문헌들과 상이한 내용에 대한 설명이 없이 번역되어 널리 알려짐으로써 그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⑤기해년(선조32, 1599)에 성윤문 목사는 쌍벽을 중수하고 戀北으로 편액을 고쳤다.(원문; 扁以雙碧, 己亥 成允文重修 改扁曰戀北) 하였는데, 연북정으로 표기하고 그려지고 전해져 온 부분에 대해서도, 역시 역사학적으로 더 깊은 탐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601년 김상헌의 남사록 10월 12일자 기문을 쌍벽인 편액을 연북정으로 고친 근원이 되는 글이라고 한다면, ① 1591년 곽기수의 조천관 중창기 이후 1601년 사이 쌍벽과 연북정에 관련한 다른 기록이 없었다는 확증이 있어야하고, ② 남사록 이후에도 관련 원문은 모두 雙碧과 戀北으로 기록된 사유가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④, ⑤번 항목에 대하여는 「이회(李禬) 목사의 이름에 대하여 혼돈을 피하기 위해 종전대로 쓰기로 한다.」고 설명한 것처럼 이에 대하여도 설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궷물’ 정호가 조천을 그리며(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며) 조천진과 조천관, 연북정에 대한 연재를 준비하면서부터 마무리할 때까지 걷고 또 걸은 길이 대섬 입구부터 조천포구, 새코지, 연두망(조천연대)까지 이니, 바로 1702년 이형상 목사가 순력하였던 조천조점 길이요, 제주 올레 18코스 중 조천길이 되겠습니다.

하루는 18코스를 벗어나 ‘먼즈왓 다리’를 걸어 ‘흐린냇각’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며, 그 깊은 바다 속에서 오징어 알이 붙은 ‘기애기’ 풀을 조물던(채취하던) 생각도 나고, 하루는 한길을 걷다가 그 흙먼지 날리는 한질(한길)을 닦았던 생각, 하루는 궷물 맞은 편 동산에 올라 멀리 올레 18코스 바닷길을 바라보며, 궷물에서 몸 곰았던(헤엄치던) 생각.....걷는다는 것이 이리도 많은 잠재의식을 불러낼 줄 미처 몰랐습니다.

'궷물' 김정호 ⓒ헤드라인제주
'궷물' 김정호 ⓒ헤드라인제주

민족자존의 고장! 조천리민께서 저에게 미처 몰랐던 것 중에서 하나를 말해 보라고 하신다면, 저는 「산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정말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넘실대는 푸른 바다, 용암이 바닷물에 굳어진 검은 빌레, 그리고 궷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호수는 정말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1702년(약 300년 전)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까지 그려진 유서 깊은 곳들입니다. 앞으로 3000년 이후까지도 잘 보전되기를 바랄뿐입니다.(옛 궷물 동네 사람들은 호수까지 그냥 궷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이룬 것은 없지만 글을 마칠 수 있게 도와준 모든 분께 고마운 말씀을 전합니다. 조천진 연북정에 아침 해가 밝아 옵니다.

모두가 소망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2020년 1월 궷물 정호가 조천진 연북정에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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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룡 2020-01-17 16:41:15 | 112.***.***.75
④ 『광무 5년 신축삼월일 각폐지공해성책(光武五年辛丑三月日各廢止公廨成冊)』에 의하면, 화북진 객사 3칸, 조천진 진사 10칸, 별방진 객사 3칸, 수산진 객사 2칸, 서귀진 객사 3칸, 차귀진 3칸 썩고 상하였습니다. 명월진 객사 3칸(禾北鎭 客舍 三間, 朝天鎭 鎭舍 十間, 別防鎭 客舍 三間, 水山鎭 客舍 二間, 西歸鎭 客舍 三間. 遮歸鎭 客舍三間 腐傷, 明月鎭 客舍 三間).

위 내용이 많은 참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강창룡 2020-01-17 16:40:36 | 112.***.***.75
③ 1785년경에 편찬한 『제주읍지(濟州邑誌)』 「방호소(防護所)-조천진(朝天鎭)」에 의하면, 성안에는 객사․ 군기가 있다. 동성 위에는 쌍벽루․ 연북정이 있다. 진장 1인, 치총 2인, 서기 12명, 방군 75명, 방포수 10명, 궁인 10명, 시인 10명, 성정군 170명이 있다.(朝天鎭 城中客舍軍器 東城上雙碧樓戀北亭 鎭將一人 雉摠二人 書記十二名 防軍七十五名 放砲手十名 弓人十名 矢人十名 城丁軍一百七十名).

강창룡 2020-01-17 16:33:23 | 112.***.***.75
9진(九鎭)에 있는 객관(客館)은 곧 객사(客舍)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객사(客舍)는 살아 있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를 새긴 나무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릴(向望闕拜) 뿐만 아니라 별성(別星)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다. 따라서 여기의 객사(客舍)는 각 구진(九鎭)에 두어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왕명을 받든 벼슬아치를 대접하거나 묵게 하던 곳으로 보입니다.

강창룡 2020-01-17 16:32:39 | 112.***.***.75
(「朝天舘」, 在州城東三十里 石礖錯雜於海口 自成一小島 塡石高築 城環其上 中有公廨數十間 東南城隅最高處 客館三楹 縹緲半空 丹雘照曜 扁曰戀北亭),

② 이형상 제주목사가 1704년에 편찬한 『남환박물(南宦博物)』 「지해(誌廨)」에 의하면, ‘양현(兩縣)과 9진(九鎭)에는 모두 객관(客館)이 있다. 그러나 낮고 비좁아 휴식하기엔 마땅하지 않다(兩縣九鎭 皆有客館 而卑陋湫隘 不堪休息).’는 기록이 있습니다.

강창룡 2020-01-17 16:31:58 | 112.***.***.75
안녕하십니까?. 저는 강창룡이라고 합니다. 『역주탐라지』와 『역주탐라지초본』를 만들 때에 실무 담당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문헌 기록을 김 선생님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다음의 내용입니다.

① 이익태 제주목사가 1696년에 제작한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 「조천관(朝天舘)」에 의하면, ‘주성(州城)의 동쪽 30리에 있다. 돌 · 바위[礖]가 바다 입구[海口]에 뒤섞여서 저절로 조그마한 섬을 이루었다. 돌을 메워 높이 쌓아 성이 그 위를 둘러싸고 있다. 가운데에는 관가 건물[公廨] 수십 칸이 있다. 동남쪽 성의 모퉁이에 가장 높은 곳에는 객관(客館) 세 기둥이 멀리 하늘 한복판에 아득하게 보이고 빨간 빛을 비추었다. 편액(扁額)에는 연북정(戀北亭)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