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실의 문학산책] (24)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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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실의 문학산책] (24)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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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서가 아닌, 어떻게 살고 싶어서 글을 쓴다.

글을 통해 내가 몰랐던 내 얼굴을 보기도 하고, 그려 내기도 한다. 그래야 좀 더 따뜻하고, 성숙 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풋풋한 삶을 사랑스런 언어로 그려내는 글을 쓰고 싶다." <수필가 최연실>

바보상자 속에서 노을이 진다. 거칠게 숨 고르기를 한 노년의 부부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다. 나는 부부의 뒷모습에서 너머를 본다.

토요일 아침, 오랜만에 남편은 집밥이 그립다며, 그것도 구수한 청국장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청국장을 좋아하지 않지만, 매 끼니를 밖에서 해결하는 그이를 위해 솜씨를 발휘하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야채 칸에서 감자와 양파를, 먹다 남은 반쪽짜리 호박을 꺼냈다. 그리곤 작년에 담근 묶은 김치 몇 조각도 준비했다. 다시마를 불린 물에 먹기 좋게 한 잎 크기만큼 썰어 놓은 야채와 김치를 투하했다. 잘게 썬 호박과 감자가 수면 위로 파르르 고개를 내밀면, 청국장을 풀고 마지막으로 깍둑썰기 한 두부와 갖은양념으로 마무리한다. 청국장을 만드는 내내 남편은 내 어깨 너머로 슬쩍슬쩍 기웃대고 있었다. 마치, 물가에 내 놓은 어린아이를 보듯 조바심을 내면서 말이다. 혹여, 남편은 내 주부 경력을 의심했던 걸까.

그이가 45도로 고개를 숙인 채 뚝배기에 코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이의 코 평수가 한 없이 커지는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가고, 다음은 청국장의 맛을 확인할 차례다.

“왜 이리 짜?”

재빠르게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팔팔 끓는 뚝배기에다 부었다. 그이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식탁에 놓더니만 안방으로 들어가며 붕어처럼 뻐금대고 있었다. 모처럼 마음먹고 준비했건만, 그냥 먹으면 안 되는 걸까. 그이는 어쩌다 한 번 하는 투정이라고 하지만, 내겐 버겁기만 했다. 끼니를 건너뛸 모양이었다. 확실치 않지만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다며 투덜댔을 거라는 걸, 그런 말로 비아냥거린 걸,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이는 모르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이와 나는 무언無言의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종종 묵언수행의 길을 걷곤 했었다. 그것도 대화의 한 방식이란 생각에 그럴 수 있다며 마음에 두지 않았다.

“여보, 오늘 개업이래?”

우체통에 꽂혀 있던 ‘청국장과 보리밥’ 전단이다. 전단을 보곤 그이가 주섬주섬 외투를 걸치자 나도 살며시 따라나섰다. 목적지에 절반이나 왔을까. 그냥 말없이 따르면 될 것을 그새를 못 참고 나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여보! 아까 들어가면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그리 말했지?”

“당신도 검지 세웠잖아?

말 너머에는 그이만의 바다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외식에서 돌아와 나는 곧장 서재로 갔다. 책을 읽거나 컴퓨터 작업을 할 만한 공간이 딱히 없었기에 매번 상을 물린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곤 했었다. 그래서 재작년에 이십 년이나 된 낡은 부엌을 개조해서 서재로 만들었다. 최소의 자금을 들여 수리하다 보니 서재의 문은 유리문 그대로였다. 밖에서도 훤히 안이 보이건만, 그이는 꼭 문을 열어 놓으라고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내 등진 모습만 보이는데, 굳이 문을 닫지 말라는 걸까? 내 너머가 궁금했던 게 아닐까.

내 노트북 너머에 담긴 이상理想, 그 세상 말이다. 나는 내 삶을 너머로 옮기곤 한다. 가끔은 너머에 있는 산과 바다를 초록과 파랑이 아닌, 무채색으로 색칠하기도 하고, 그곳에 한참 머물다 보면 해일이 일던 바다는 잠잠해지고, 비바람으로 꺾였던 나무에 새순이 돋고 작은 잎이 달리기도 한다. 그래서 종종 또 다른 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곤 설레기도 한다. 너머에는 부족한 나를 채워주는 게 아닌, 그저 받아들일 뿐인데. 그래서 나는 너머가 좋다.

한참이나 그이가 구석에 기대어 나를 보고 있다. 너머에서 나를 울고, 웃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수필가 최연실>

최연실 수필가ⓒ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 ⓒ헤드라인제주

[최연실 수필가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를 대신해서 시상식에 갔다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생활수필반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2018년 수필가로 등단했다.

- 2018년 수필과 비평 등단
- 한국 언론인 총 연대 편집기자
- 서울 서부지부 원석문학회 회원
- 제주 백록수필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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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2023-04-14 12:27:47 | 112.***.***.220
언젠가부터 작가님의 글에서 제주라는 배경이 보이지 않네요 제주에서의 풋풋한 적응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그때가 그립습니다.^^.

묵언수행 2023-04-14 09:13:18 | 175.***.***.1
나이가 들면서 부부의 대화가 점점 줄어들고 각자의 저 너머에서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노년으로 접어드는 부부의 일상을 조며 우리네 삶이 다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