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인연의 끈,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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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인연의 끈,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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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날아오른다. 서울은 아직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오로지 제주이기에 가능한 ‘오름 아카데미’, 별난 매력을 풍기는 그 아카데미를 향해간다. 첫날은 이론을, 다음 날은 이론에서 배운 현장을 탐방하는 커리큘럼이 마음에 든다. 물영아리, 다랑쉬, 노꼬메, 따라비…. 색다른 이름을 가진 오름을 떠올리다 보니, 오름과의 첫 인연, 용눈이오름이 슬며시 다가온다.

서울시청에서 홍보업무를 하던 때라 꽤 오래전 일이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던 말처럼 팀원들과 포상으로 주어진 제주 여행을 떠났다. 대여섯 모이면 재주꾼이 있게 마련, 방송작가였던 여직원 덕을 톡톡히 보았다. 촬영 때마다 다녀 본 제주 명소와 맛집과 즐길 거리를 꿰고 있어 졸졸 따라다니면 되었다. 큰엉길이 지나는 리조트에 짐을 풀고는 제주 품속으로 들었다. 야자수나 먼나무 같은 이국적인 가로수와 색다른 박물관들, 엉덩이를 붙잡는 이색카페, 검은 돌담과 푸른 바다가 만들어내는 낭만에 흠뻑 젖었다.

마지막 코스는 용눈이오름이었다. 인체의 곡선 같은 유려한 자태가 여느 산과는 달라 안온하면서도 신비했다. 능선을 휘감고 오르는 굽은 억새 길과 기다란 네모꼴 산담을 지나 이윽고 정상에 다다랐다. 말발굽 같은 분화구 세 개가 보이고 그 뒤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풀밭에 드러누웠다. 온몸의 촉수를 열어 제주의 맑고 향기로운 가을을 깊숙이 흡입했다. 까마득히 깊은 곳 지구의 심장에서 펄떡거리던 마그마가 땅을 흔들며 치올랐을, 태초의 모습은 어땠을까. 하늘로 뻗치는 섬광 아래 불덩이가 용솟음치는 광경은 두렵고도 황홀했으리라. 모질고 긴긴 시간을 무던히 견뎌왔을 용눈이오름이 푹신한 대지의 온기를 품은 채 나를 어루만졌다.

그때의 기억이 오름 아카데미로 이끌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공항까지 마중 나온 후배와 부리나케 교육장으로 이동했다. 멀리서 왔다며 답삭 반겨주는 제주분들이 정겨웠고 그들과 함께 할 시간이 내게는 선물이었다. 교재를 받고 영상과 설명으로 이어지는 교육이 진행될수록 다음을 향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오름이 무려 368개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구나 한라산에 기댄 기생화산이 아니라 제각기 나이가 다른 독립화산이라 했다. 그 오름 곳곳에 일만 팔천여 개의 신당을 모셨다니 얼마나 많은 맵고 짠 이야기가 쌓여있을까. 척박한 삶터와 거친 자연환경에 순응하고 경외하며 살아온 지혜가 그 이야기 속에 깃들어 있으리라. 그런 연유로 제주 사람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에 기대어 살다가 오름에 잠든다 했구나, 싶었다.

사진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에 위치한 오름 영주산. 사진출처=제주문화곳간
사진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에 위치한 오름 영주산을 오르고 있는 모습. (사진출처=제주문화곳간)

다음날, 신이 살았다는 영주산에 올랐다. 말굽 모양이라는 설명에도 그 형상이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땔감으로 쓰이지 않는 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이룬 탓이었다. 복원과 유지 사이에는 이견이 있어 옛 모습을 찾는 건 쉽지 않은가 보았다. 같이 걷던 A가 말했다.

“정말 아쉬운 일이죠. 삼십 년 전이던가, 영주산에 처음 왔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마치 잠자던 공룡들이 깨어나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은 환상적인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때의 감흥을 B가 받아 이어갔다.

“맞습니다. 저도 첫인상이 강렬했어요. 마치 왕의 의자인 것처럼 보여 멈칫했던 기억이 남아있거든요. 그 위엄있는 자태가 대단했지요.”

변하지 않는 건 없다고 했으니, 영주산인들 다르겠나 하면서도 애틋하게 말굽을 찾던 눈길을 거두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 계단과 붉은 송이가 깔린 길을 지나 푸른 능선을 따라 걸었다. 정상부에 이르자 옹기종기 이어진 밭 너머로 굼실굼실 오름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너울너울 어깨춤을 추듯 길게 늘어선 오름은 장관이었다. 비치미, 거슨세미, 빗돌, 여문영아리. 열여덟 개의 오름을 입속에 굴리며 표지판과 맞춰보는 재미도 솔찬했다.

첫걸음을 떼었을 뿐인데, 그저 아름다운 섬, 휴양지로만 인식했던 얕은 생각이 바뀌고, 그 땅에서 살아온 제주인의 강인한 정신과 생활상을 오롯이 느끼는 시간이었다. 푸른 오름과 색색의 밭들, 에메랄드빛 바다와 검은 빌레, 제주를 지키는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들어와 출렁거렸다. <수필가 배공순>

수필가 배공순
수필가 배공순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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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2024-02-24 21:07:25 | 221.***.***.74
글을 읽노라니 오름을 오르고 있는 자신을 봅니다. 섬세한 표현이 찐하게 전달되네요.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눈웃음 2024-02-24 17:16:26 | 122.***.***.155
참 곱습니다.
글도 참 곱습니다.
앞으로 많이 올려주세요.

봉봉이 2024-02-23 16:57:16 | 223.***.***.87
참말로 글이 곱습니다~
글을 읽고나니 잠깐 낮잠을 잔듯이
휴식을 하고 갑니다~

설.수아 2024-02-23 14:27:02 | 1.***.***.219
제주에 오름 아카데미가 있어서 현장을 탐방할 수가 있네요
모르고 있었던 용눈이 오름등 이국적인 야자수가로수와
푸른바다가 가슴을 설레게 하네요
올 봄에 제주 탐방하면서 배 작가의 연재글 읽는 재미도
함께 해야겠네요
화이팅입니당

제주낙낙 2024-02-23 14:20:21 | 183.***.***.72
용눈이오름에서 남긴 즐거웠던 순간이 떠오르며 제주여행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따뜻한 글이네요. 잊고 있던 제주여행을 올 봄에는 한 번 다시 떠나봐야겠습니다~

해치순이 2024-02-23 14:18:56 | 203.***.***.230
이 코너 연재인가요?
제주 오름이 영상처럼 촤르르르 보이는거 같아 여행 기분 나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변명희 2024-02-23 10:09:49 | 125.***.***.244
덕택에 앉아서 제주 여행을 하네요.
자박자박 함께 걷는 듯 합니다.
즐거운 여정 되시길 응원합니다 .

소공녀 2024-02-23 10:07:15 | 1.***.***.83


어머! 새로운 연재가 올라왔네요. 저도 오름에 다니고 있습니다. 영주산도 갔었는 데~~
다시 한번 가고 싶어요. 다음 글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