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의 오늘]<13>추억의 가을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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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오늘]<13>추억의 가을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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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친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간단히 씻은 다음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가을 하늘이라 그런지 무척 드높고 청명하였다. 공기야말로 정말 자연의 냄새랄까, 숨을 들이 쉬는 순간, 막혔던 콧 속을 타고 전해오는 가을 냄새가 가슴까지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다.

모처럼의 산 나들이라 어린아이처럼 설레기도 했다. 차를 타고 시내 한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휴일인데도 학생이며 학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어린이 풍물패의 소리와 체육부장 선생님으로 보이는 남자 선생님의 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을 운동회였다. 순간, 옛 추억의 소름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청명하게 맑은 하늘에는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고, 평소에는 넓게만 보였던 운동장이 좁게 보인다. 교악대의 반주에 맞춰 국민의례가 시작되었다. 국민의례가 끝나고, 저학년 학생들의 깜찍한 율동과 부채춤으로 운동회의 시작을 알렸다.

색동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족두리까지 쓰고, 남자 어린이와 같이 나오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지도 선생님의 손동작에 맞춰 따라 하는데, 신랑 역할을 하는 남자 어린이의 율동이 조금 서툴렀지만 그래도 여자 어린이가 리드를 잘해서 무용은 잘 마무리 되었다.

긴 나무 막대에 둥근 박을 매달아 놓고, 모래주머니를 던져서 먼저 터뜨리는 쪽이 승리 하는 경기가 시작됐는데 어떤 친구들은 매단 박까지 던지지 못하고, 평소 심통 부리던 친구의 등을 향해 던지는 친구들도 있었다.

수많은 모래주머니 세례를 받은 박이 조금씩 사이가 벌어지더니 어떤 남학생이 던진 것이 결정타가 되어 모세의 기적으로 바다가 갈라지듯 박이 갈라지고, 그 속에서 오색의 꽃가루와 함께 승리의 깃발이 내려지면 ‘와’하는 함성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면서 끝이 났다.

나도 저 친구들과 같이 운동장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왜 없으랴만 몸이 자유롭지 못해서 본부석에서 여러 사람들에 섞여 구경하던 때가 생각이 난다.

운동회의 가장 볼거리는 역시 달리기다. 백 미터 달리기는 거리가 짧다보니 ‘탕’하는 총성과 함께 재빨리 옆에 있는 친구를 앞질러 가야 하므로 간혹 부딪치거나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 반에 체육 과목을 제일 싫어하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것도 달리기라면 질색하고, 열심히 달려도 항상 꼴찌를 도맡아 하는 친구였는데, 그 전날 반 대표로 달리기로 했던 여자친구가 갑자기 몸이 아파서 결석하는 바람에 꼴찌 하는 친구를 대신 출전시키기로 했다.

친구들과 선생님은 그 친구에 대해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그 친구가 하위권으로 쳐져 달리니까 ‘우리 반이 꼴등이구나’하고 낙심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어...”하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아졌다.

항상 꼴등하는 친구였는데, 이게 웬 일인가? 오늘은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믿어지지 않았다. 비밀은 운동회가 끝나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야 들을 수가 있었다. 점심을 먹고서 바로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출발선에 서 있을 때까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총성이 울리니까 갑자기 소변이 급해서 도중에 포기할 수 없고 해서 무조건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는 친구의 말에 선생님과 친구들은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달리기 1등하면 ‘상’이라고 붉은 도장 찍힌 공책이 세 권, 2등은 두 권, 3등은 한 권이었다. 운동회가 다 끝나고 돌아갈 때면 선생님은 나를 불러서 공책 세 권을 주신 적도 있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7~80년대만 해도 지금처럼 기구나 도구들이 화려하지 않았지만, 차전놀이, 무등 태워 상대방 머리띠 벗기는 종목들은 그야말로 협동심과 단결심을 길러줬고,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하는 데는 그만한 게임들도 없었다.

또한 줄다리기야말로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학부형의 혼연일체가 되어 ‘으싸, 으싸’하는 구령과 함께 끌고 당기고 하는 팽팽한 승부가 한쪽으로 넘어갈 때의 그 짜릿함은 도저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니뭐니해도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뒤지던 스코어를 재역전할 수 있는 이어달리기 경기라 할 수 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대표 한 명씩 뽑아 이어 달리는데, 막판 5학년, 6학년에서 뒤집기를 할 때쯤은 학교 운동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응원소리가 대단했다.

어느새 운동회를 얘기하다 보니 가을 산에 도착했다. 너무도 진풍경이다.

차를 주차하고 나서 친구랑 같이 오색 단풍을 구경하며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산행을 하니 기분전환이 되어 마음속에 묻혀 있던 모든 잡념들이 씻겨지는 듯 했다.

마지막으로 산의 정기를 한껏 들이 마시고는 친구와 함께 산을 내려와 저녁을 먹으며 아침에 보았던 운동회며 산의 풍경을 얘기하다 보니 하루가 지났다. 

이성복님 그는...
 
이성복님은 제주장애인자립생활연대 회원으로, 뇌변병 2급 장애를 딛고 지난 2006년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가을호에서 수필부문 신인상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수필가로 등단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원으로 적극적인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이성복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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