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수의 꽁트](8) 위로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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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의 꽁트](8) 위로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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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할배의 외출이 잦아지고 있었다. 공무원 생활을 오래 전에 끝낸 할배에게 별다른 용건이 있을 리 없는데도 아침을 먹고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전처럼 바둑을 두려고 노인당에 나가거나 친구들과 환담을 즐기러 시민공원에 가는 것이라면 걱정할 일이 아니지만 그러지는 않는가 보았다.

언젠가 할매가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도서관에도 가고 ……’라고 말끝을 흐렸다. 공짜버스 타는 재미에 맛을 들였다는 말을 곧이 듣고도 싶었다. 작년부터 70세 넘은 노인들에게 공짜버스 혜택이 주어진 후 뚜렷한 행선지도 없이 그냥 심심풀이 삼아 노선버스를 잡아타고 구경 다니기도 하는가 보았다.

할매가 단단히 결심한 그날 할배는 날이 어둑해질 무렵에야 집에 돌아왔다. 발걸음에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였다. 오늘 따라 할배의 얼굴이 더 추레하고 표정도 축 처진 것 같았다. 별다른 말이 없는 채로 저녁상을 물린 다음에 할매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어, 우리 초등학교 때 친구 김희정이라고 기억나시우? 내가 전에 몇 번 말했잖수.

--김희정이라고? 기억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러네. 그래, 김희정이라는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소?

할매가 김희정이라는 어릴적 친구를 오래만에 만난 것은 5일시장에서였다고 했다. 2년 전에 서울생활을 끝내고 중소도시인 이곳으로 이사 온 이 친구는 옛날 시골생활의 추억을 더듬듯이 5일시장을 자주 찾는다는 얘기였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두 사람이 대중식당에 들어가서 점심을 같이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말이 길어지다 보니 그 친구의 운수 뒤틀린 소식까지 듣게되었다고 했다.

서울에서 거주하던 아파트를 제꺽 처분하려고 했던 것은, 건물 벽에 금이 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소문 나지 않게 쉬쉬하는 것으로 알고있었기에 아주 조용히 복덕방에 매물로 내놓아 파격적으로 싼 값에 처분해버렸다는 것이다. 서울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그 아파트가 리모델링 공사를 거치면서 고급화된데다가 인근에 있는 도로가 확장되기까지 하여 부동산 가격 폭등을 가져왔다는 얘기였다.

서울에서 아파트를 팔아버린 것이 엄청 큰 재산을 날려버린 셈이 되었다는 친구네 소식을 전하면서 할매는 자기 일이나 되는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친구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할매의 말끝은 한숨 쉬기를 그치고 친구 칭찬하는 쪽으로 모아졌다. 큰 재산을 날려버리고도 별로 실망하지 않는 친구가 신통하고 존경스럽다는 얘기였다.

그 친구가 원통할 만큼의 악운을 당하고도 그렇게 대범하고 통 큰 사람이 된 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모진 풍상을 겪어오면서 담력과 뚝심이 강해진 덕분일 거라고 말하는 할매의 시선은 할배의 추레해진 얼굴에 꽂히는 것 같았다.

할배는 잠시 놀라면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 거요. 뜻밖에 당한 큰 불행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충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건 그 불행의 원인을 만든 장본인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거란 말이오.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불가피한 상황에서 생긴 불행이라면 충격이 덜하겠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불행에 빠진 사람은 마음이 더 아플 거 아니겠소. 당신 친구의 경우도 그렇잖소. 그 사람이 당한 불행은 자기 자신이 잘못한 때문이 아니라 이 나라의 부동산 정책이 잘못된 때문이란 말이오. 게다가 그런 불행을 당한 사람은 이 나라에 수도 없이 많단 말이오.

그날은 그렇게 노부부의 대화가 끝났다. 할배의 얼굴에서 축 처진 우울증의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런 얼굴을 바라보는 할매의 걱정도 사라질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날 저녁에도 풀이 죽은 얼굴로 외출에서 돌아온 할배 앞에서 할매는 자기 친정집에서 일어났다는 불행한 사고 소식을 전해주었다. 친정집의 사촌언니가 자기 오빠네 은행 대출 보증을 서주었다가 큰돈을 떼인 금융사고 소식을 전화통화로 들었다는 것이다.

할매에게 사촌언니라고는 하지만 동갑내기에다 오랜 친구 사이여서 그만큼 안쓰럽게 되었다고 했다. 할매는 사촌언니가 그렇게 화통하고 아량있는 사람인 줄 몰랐다고 감탄하였다. 뜻밖의 사고 때문에 큰돈을 떼이고도 억울해 하거나 오빠네를 원망하는 언사가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할매가 자기 사촌 친구의 넉넉한 인심을 낱낱이 전하는 얘기를 귀담아 듣는 동안 할배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였다.

--보통사람 같으면 울고불고 난리 피울 일 아니겠우? 자기네 재산이 많이 날아가서 원통하다는 말은 안하고, 오빠네 걱정하는 얘기만 하는 거예요. 동생보다도 오빠네가 더 충격받고 울고불고 한다는 거예요. 자기네 재산 잃은 것도 그렇지만, 동생네까지 피해를 입었으니 마음에 상처가 더 크다는 거예요.

깊은 생각에 잠겨 듣고 있던 할배가 입을 열었다.

--당신네 사촌언니가 존경스러운 건 틀림없지만, 그 언니네가 오빠네보다 충격이 덜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 거 같소. 그러니까, 동생네가 입은 피해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덜한 것이고, 오빠네는 바로 자기네가 원인을 만들어 놓은 불행이니까 더 비통하고 충격이 심했을 거요. 지진이나 전쟁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불행을 원망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소. 같은 돈을 잃어버려도 강도한테 털려서 잃어버린 것보다 택시 안에 잘못 두고 나온 돈이 더 속 상할 거란 말이오.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났다. 할배는 그날도 어둑해진 다음에야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할배가 손에 들고 있는 막걸리 병이 할매의 시선을 끌었다.

--들어오다가 막걸리를 한 병 사 들고 왔소. 그럴 일이 있었소.

할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감돌고 있는 것도 할매의 눈에 띄었다. 할매는 제꺽 막걸리 잔까지 꺼내어 할배 앞에 갖다놓았다.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술까지 사왔우 그래.

식탁에 자리 잡은 할배는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입을 열었다.

--아직 신문엔 안 났나? 우리 고등학교 동창들이 강원도 여행을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구만. 아, 늙은이들이 안전빵으로 여행사 차를 대절하거나 할 일이지, 렌터카를 빌려서 자기네가 직접 운전하고 산악지대로 갔다는 거요. 여남은 명이 렌터카를 빌려 타고 자유롭게 설악산 일대를 돌아볼 계획이었나봐. 지리를 잘 몰라서 낯선 곳을 헤매던 중에 날이 어두워진 모양이라. 길가에 있는 도랑창을 잘 모르고 지나다가 차바퀴가 빠졌다고 하더구만. 렌터카 차체가 찌그러지고 많이들 다친 모양이라. 절벽 추락사고가 아니길 천만다행이지. 오늘 전화 통화를 했는데, 사고가 난 친구들 집에서도 지금 난리요, 난리. 급히 비행기 편으로 날아가서 병원을 찾아가고, 자동차 파손 보상은 어떻게 할지도 문제인 모양이고. 나도 아까 전화로 청주 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왔소. 내 일 아침 일찍 공항으로 나가야 하는데, 사고를 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 아니오?

--동창넨 그런 생고생들 하는데 막걸리 사들고 온 건 어인 일이우?

--내가 교통사고 불행을 면했다는 사실이 하도 희한해서 지금 자축 파티를 하려는 것이오. 나도 강원도 여행에 갈 뻔했지만, 그럴 기분이 안 나서 기권했던 거요. 내가 한동안 기가 폭삭 꺾일 만한 사연이 있었다는 거요. 이거 말하기가 창피하지만, 얼마 전에 주식에 손댔다가 거금 3백만 원을 날려버렸오. 그걸 가지고 당신에게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던 거요. 당신 얼굴 보기가 부끄러워서 멀리 피하고만 싶었고. 오늘 솔직히 고백해 버리면 속이 다 후련하겠네. 허지만, 그 돈 잃어버린 덕분에 교통사고를 면하게 됐으니 잘된 일 아니오?

--3백만 원이면 큰 재산도 아닌데 그렇게 속을 태웠단 말이예요?

--큰 재산은 아니지만, 당신 속인 것이 상심되었던 거요. 게다가, 이번 일보다도 옛날 생각이 나서 더 창피했던 거요. 옛날에 주식투자로 큰 돈 날려가지고는 다시는 그런 짓 절대 하지 않는다고 맹세했지 않소.

--실수하는 건 깜빡이지만 후회하는 건 두고두고 한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나도 요즘 그 말을 되씹고 있소.

--그런데, 당신이 축배 올리는 자리에 내가 부조할 것이 있다우. 자, 이건 우리 친구 김희정이가 오늘 찾아와서 선물하고 간 거요. 막걸리에다 축하 케이크, 오늘밤은 우리 집이 축하 무드로 가나봐요.

할매가 찬장에서 꺼내어서 내놓는 것은 제법 예쁘게 장식된 생일축하용 케이크였다.

--이거, 케이크선물 받아먹는 거는 좋은데, 이상하지 않소. 당신 친구 김희정 할매는 아파트 재테크 실수로 상심이 많다고 했는데 축하케이크라니 …….

--내가 지금 그 얘길 하려는 참이예요. 희정이네가 여기로 이사 오면서 재산을 날렸다고 한 내 얘기는 사실의 전반부였고, 그 후반부 얘기는 내가 일부러 빼고 한 거였어요. 그러니까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얘긴데, 2년 전에 이사 오면서 며칠 동안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심한 몸살을 앓아서 병원에 며칠 입원했더랬는데 그 동안에 건강상태를 체크해 봤더니 폐암 2기였대요. 다행히 발병 초기라서 간단히 약물 치료로 병을 이겨냈다는 건데, 만약에 그 상태로 서울에서 계속 거주했었다면 페암 치료가 아주 어렵게 될 뻔했다는 것이니까 그 때 이곳 공기 좋은 곳으로 옯겨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는 거지요. 요 며칠 전에 검사를 해봤는데 이제 깨끗이 폐암 치료가 됐다고 해서 이런 선물을 나에게 할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새로 태어난 기분이니까 생일축하 케이크가 어울린다는 말이지요. 이 도시에 사는 사람으로는 자기하고 축하 기분 내줄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니까, 나도 기쁜 마음으로 축하케이크를 받아주었답니다.

--전에 그 할매네 이사 온 얘기 나한테 했을 땐 그 부분을 빼고 얘기 했다는 거요? 거, 왜, 두 사람이 5일시장에서 만났을 때 그런 소식 들었다고 했잖소.

--이제 그 얘기도 하려던 참이예요. 난 진즉부터 당신이 주식에 손 댔다가 낭패당한 거 눈치 챘었단 말이예요. 그래가지고는, 남의 집 재산 날린 얘기, 큰 재산을 날리고도 태평하더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는 거지요.

--내가 아무 말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감?

--옛날에도 그랬잖수. 나 몰래 주식시장에 발 들여놓았다가 주가가 폭락하면 혼자만 끙끙 않고 그랬잖았수? 그 때 그런 표정, 내가 잊지 못하지요.

--가만 있자, 그럼 당신 사촌언니네 불상사 얘기도 사건의 한 부분만 나한테 말했던 거요?

--그래요. 사건의 일부는 사실 그대로 전했는데, 다른 일부는 나의 각색이 많이 들어간 거지요.

--그건 일종의 맞불전략이네.

--맞불전략이라니, 그런 것도 있나요?

--이쪽 산에 산불이 났을 때, 저쪽 산에 불을 놓으면 이쪽 산불이 진정된다는 거요.

--그럼, 당신 마음 속에 불 났던 것도 진정되었나요?

--그러고 말고지요. 맞불도 맞불이지만, 마음 고생을 함께 해주고 격려사 연구까지 해서 들려준 우리 마나님 정성이 지극해서 산불도 진정되고 그 자리에 꽃밭이 들어서려고 하네요. 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함께 축배를 듭시다.

--그런데, 축배라고 하면 말이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럼, 우리 위로주로 할까요?

--맞아요. 당신 가슴을 태운 산불에 대해 위로의 뜻으로 말예요.

--게다가, 늘그막에 객기 부리다가 교통사고 당한 친구들에게 위로까지 겸해서 위로배로 합시다.

--자, 축배 아닌 위로배로, 건배!

--함정에 빠진 우리 늙은이들을 위한 위로배로, 건배! <소설가 양영수>

<양영수의 꽁트>는...

소설가 양영수. ⓒ헤드라인제주
소설가 양영수. ⓒ헤드라인제주

바야흐로 영상시대라고 한다. 이야기문학을 감상하는 것도 문자매체보다 영상매체를 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영상매체 속에서는 금방금방 장면이 바뀌는 스토리라인을 사람이 따라잡아야하기 때문에 깊이있는 사색과 음미가 잘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 마음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생체리듬과 심리적인 템포에 따라서 메시지 내용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는 문자매체를 이용하는 독서가 좋은 방법이다.

꽁트 연재를 통해 필자가 바라는 희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양영수 작가 

제주 태생의 소설가.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교수 정년퇴임.

그 동안 내놓은 작품들로는 단편집 '마당 넓은 기와집' (2008년), 장편소설 '불 타는 섬' (2014년,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복면의 세월'(2019)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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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2020-02-17 15:33:11 | 14.***.***.191
양 교수님께
재미있게 열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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