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감귤재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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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감귤재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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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33) 재배작물 도입의 역사

제주도에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 단정할 수는 없으나, 감귤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의하면 수인제(垂仁帝)의 명에 의해 서기 70년에 田道間守라는 사람이 상세국(尙世國)에서 비시향과(非時香果)를 가져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비시향과는 감귤의 한 종류가 분명하며 상세국은 제주도를 지칭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 구마모토현의 오랜 전설에 의하면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한(三韓)에서 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심게 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백제 문주왕 2년 (서기 476년) 4월 탐라에서 방물(方物)을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고려태조 천수 8년 (서기 925년) 겨울 11월에 “탐라에서 방물을 바치다”를 시작으로 “방물을 바쳤다” “토물(土物)을 바쳤다” 하는 기록이 계속되는데 그 방물과 토물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교역 물품이나 방물에 감귤이 포함되었다는 분명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으로 봐서 감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사 세가(高麗史 世家) 권7의 기록에 의하면 문종(文宗) 6년 (1052년) 3월에 “탐라에서 세공하는 귤자의 수량을 일백포로 개정 결정한다”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제주도의 감귤이 세공으로 바쳐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세공이라 함은 임시과세인 별공에 대하여 해마다 정례적으로 공납하던 상공(常貢)을 뜻하므로 탐라의 감귤세공의 유래가 자못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감귤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동안 가장 중요한 진상품이었다. 감귤이 진상되면 중앙 정부에서는 과거 시험의 일종인 황감제(黃柑製)를 실시하여 경축했을 만큼 귀하디귀한 과실이었다. 그러나 감귤 진상은 제주도민에게는 크나큰 노역과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1052년(고려 문종 6)에 ‘세공귤자를 100포로 정한다’고 하였으니, 이미 11세기부터 제주도에서 감귤을 진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부터 감귤이 재배되었을 것이므로 제주 감귤의 재배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주도의 진상물 중 과실의 진헌을 위하여 1526년(중종 21)에 이수동 제주목사는 5개의 방호소에 과원(果園)을 설치하였고, 이후 1530년(중종 25)에는 과원이 30개소에 달하였다. 이는 기존에 파악되지 않았던 과원의 수에 이수동 제주목사의 과원 설치 이후 파악된 수이다.

17세기 중반에는 과원이 37개소에 이르며 각 과원의 위치 및 설명이 나타난다. 18세기 전반에는 과원이 42개소로 증가하고, 19세기 중반에는 54개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과원의 증설은 중앙에서 요구하는 감귤의 진상 액수를 충당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감귤의 진상은 감귤의 익는 정도에 따라 9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이루어졌다. 9월에 제일 먼저 유자가 봉진되고 10월에 감자와 동정귤을 시작으로 늦게는 산귤이 봉진되었다. 『남환박물』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귤은 2월이 되어야 맛이 좋아 2월에 진상하였다. 감귤은 생과 외에 약재로도 중요하여 12월에 세초 진상이라 하여 진피·청피·귤핵 등이 꾸준히 바쳐졌다.

18세기에 접어들어 감귤 진상 액수가 줄어들었다. 1801년 공노비의 해방으로 과직을 구하기 힘들어져 공과원(公果園)의 감귤 생산 액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사과원(私果園)의 감귤 징수를 늘리게 되자, 부담이 가중된 농가에서 감귤 재배를 기피하게 되어 차차 감귤 생산이 줄어들고 진상 액수도 줄어들게 되었다. 일부 감귤의 생산이 특히 저조하여 19세기 중반에는 특정 감귤류에 대해서 대봉(代奉)이 이루어졌다. 금귤을 대신하여 당금귤과 유감으로 봉진하였고, 등자귤 대신에 동정귤, 산귤 대신에 감자를 봉진하였다. 그러나 『제주계록』에는 대봉에 대해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동정귤 대신에 등자귤을, 유감 대신에 금귤을 진상하였고, 후에는 금귤과 등자귤의 생산도 많지 않아 모두 산귤로 대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많이 재배되고 있는 온주밀감과 만감귤은 도입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02년 프랑스 출신 엄탁가[Emsile, J. Touguet] 신부가 제주에 오게 되어 서귀포시 서홍동 성당에 13년간 근무하면서 제주산 식물을 연구하였다. 그는 벚나무의 원종을 한라산에서 발견하여 벚나무 원산지가 제주임을 규명하기도 했다. 1911년 제주산 벚나무를 일본에 있는 신부에게 보내고 그 대가로 온주밀감 15주를 심은 것이 현재 제주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는 온주밀감의 효시이다.

같은 해 서홍동 출신 김진려는 일본 구마모토[熊本]에서 접목 강습을 받고 온주밀감과 워싱톤네이블을 가지고 와서 식재하였다. 그러나 처음으로 규모를 갖춘 큰 농장으로 개설된 것은 서귀읍 서홍리에 일본인 미네[峯]가 개원한 현재의 제주농원이다. 1913년에 온주밀감 2년생 묘목을 도입·식재하였다. 한편 온주감귤 최고의 고목으로 알려진 제주 최초의 온주밀감은 최근 2018년도에 고사된 상황이다. 일제 탄압 하의 농가의 여건으로 보아 고도의 기술과 자본 조달이 필요한 감귤원을 개원한다는 것은 특수한 농가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 농가에서는 개원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고 단지 몇 그루씩 정원수로 심는데 그쳐 재배 면적 16㏊에서 80여 톤을 생산했을 뿐이다.

해방 후 감귤 재배에 대한 의욕이 싹트기 시작했으나 1948년 발생한 4·3사건은 제주도 농촌을 폐허로 만들었고, 심어져 있던 감귤도 폐작(廢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해방 후 1955년까지 10년간은 감귤 산업이 침체되어 면적의 확대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외국산 감귤의 수입 금지로 수익성이 보장되고 4·3사건의 여파도 가라앉은 1955년부터 감귤 재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감귤 묘목의 도입을 서두르는 한편, 도내에서 묘목을 생산·보급하게 됨에 따라 감귤 재배 농가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1955년부터 1964년까지 10년간에 389㏊가 증식(增殖)되어 제주도의 감귤 재배 면적은 407㏊까지 확장되었다.

제주의 감귤은 1965년부터 증식 붐이 조성되어 그 식재열이 최고조로 달한 1970년에는 매년 제주도에 식재된 본수가 282만 본에 달하였다. 최대 증식기에 해당하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5년간 식재된 본수는 1,016만 본으로 연간 평균 203만 본이 되었다. 1964년에 413㏊에 불과했던 감귤 재배 면적이 10년 후인 1974년에는 11,200㏊에 달하게 되어 27배라는 전례 없는 고도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급진적인 발전은 감귤이 다른 작물이나 과수보다 월등히 수익성이 높은데 기인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 정책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64년 2월 연두순시차 제주도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제주도는 여건이 다른 지역인 만큼 전국 공통 사업인 식량 증산은 염두에 두지 말고 수익성이 높은 감귤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정부의 특별 지원을 계기로 1965년부터 재배 붐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1968년부터 감귤 증식 사업을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으로 책정하여 저리 융자로 감귤원 조성 자금을 지원하게 되면서 1969년부터 획기적인 증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제주도는 표고 해발 200m 이하는 특별한 저해 요인이 없는 한 재배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해수 피해 지역인 해안선을 제외하고는 도 지역 어디를 가나 귤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1973년 감귤 재배 농가는 36,073농가로 제주도 전체 농가 39,822농가의 91%나 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감귤원 모습, 귤림풍악(왼쪽)과 최근의 감귤원, 피복재배 모습.
조선시대의 감귤원 모습, 귤림풍악(왼쪽)과 최근의 감귤원, 피복재배 모습.

1977년에 처음으로 10만 톤을 돌파하면서 불과 5년 만에 생산량이 배 이상 증가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2년에는 32만 톤, 89년에는 46만 톤을 생산하였으며 1989년에는 75만 톤을 생산하여 제주에서 감귤을 재배한 이래 최대의 생산량을 기록하였다. 이후 가격 폭락과 유통 처리. 외국산 농산물의 수입 증가와 특히 오렌지 수입 급증으로 인해 최근에는 50만톤 내외 수준의 온주감귤이 생산화 되고 있으며 고품질 감귤생산을 위한 피복재배와 출하 시기 조절을 위한 시설재배 가 확대되고 있으며, 최근 한라봉, 레드향, 천혜향 등 만감류 재배가 늘어나고 있어 연중 감귤을 생산해내는 있는 실정이다.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특별자치도 농업기술원, <제주농촌진흥 60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제주농업기술원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이성돈 서부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원 등을 두루 거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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