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29) 손 심엉 올레, 드디어 씨앗을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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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29) 손 심엉 올레, 드디어 씨앗을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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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위에서 전하는 편지>는 그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다.

‘쇠이유’(문턱)를 알게 된 것은 거의 20년 전인 2003년 무렵이었다. 몸과 마음이 다 피폐해지고 방전된, 요즘 말로 ‘번아웃’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가지 운동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선택한 운동은 ‘걷기’였다. 걷는 것만큼은 포기하면 안 되는 정체절명의 상황에서 난 머리를 굴렸다. 교보문고에서 걷기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다 사들였다. 걷기에 꾀가 나거나 싫증이 날 경우에 대비한 정신무장을 독서를 통해 할 속셈이었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그중 하나가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쓴 ‘나는 걷는다 1,2.3’이었다. 그도 나처럼 한평생 시사주간지에서 정치 기사를 써온 언론인 출신이었다. 부인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살 생각이었지만 사람 앞날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 정년퇴직 후 얼마 되지 않아 부인은 돌연 세상을 떠났고, 그는 직업도, 부인도 잃은 겹 충격에 서서히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한 그. 이렇게 침대 위에서 우울하게 지내느니 길 위에서 죽자는 심정으로 그는 자신의 집에서 출발해서 산티아고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기적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찾아왔다.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그는 길 위에서 점점 행복해져 갔고 자존감을 되찾았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산티아고 길이 끝나자, 그는 그 행복을 최대한 길게 느끼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멀고 긴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무려 2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머나먼 옛적에 대상들이 낙타를 타고 횡단했던 그 길, 실크로드! 그는 이 미친 계획을 무려 4년여에 걸쳐서 실행에 옮겼을 뿐만 아니라, 출판사들의 잇따른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그 경험을 책으로 펴냈다. 책은 예상을 뒤집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허나, 그는 거액의 인세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길 위의 자유인이었다. 그 돈으로 그는 ‘쇠이유’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비행 청소년에게 낙인찍기 대신에 문턱을 낮추어 장거리 길을 걷게 한다면 소년원이나 기타 시설에 가두는 것보다 훨씬 재범률도 낮아지고 새로운 길을 찾게 되리라는 확신이 그에겐 있었다. 다행히도 당시 그의 의견을 접한 법무부 장관이 적극 찬성하면서 일이 급진전되었고, 1800킬로미터의 길을 멘토 상담자와 함께 걸으면 형을 면제하는 프로그램이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오랜 세월에 걸친 추적조사에서 ‘쇠이유’ 참가 소년수의 재범률이 시설에서 출소한 소년수의 재범률보다 훨씬 낮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음을 나는 그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책을 덮으면서 나는 그가 걸은 산티아고 길과 실크로드를 걷고 싶다는 희망에 설레는 한편, 가슴 한구석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당시 현역 언론인이었던 내게 고향 제주에서 조폭 땅벌파 두목인 남동생 동철이는 손톱 밑 가시보다 더한, 심장 한 켠에 도사린 통증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 유난히 총명하고 친구들을 좋아하고 재주가 많았던 내 동생은 중학 시절부터 엇나가기 시작하더니, 고교 시절 학교를 퇴학당한 뒤에는 소년원에 들어가는가 싶더니, 소년원 출소 이후는 본격적인 조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에게도 쇠이유 프로그램이 적용됐더라면, 그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르고, 우리 가족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하는 아픔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며 왔던 것이다.

#올레가 나이 든 그들도 치유했거늘, 청소년들은 말해 무엇하랴#

그 책을 읽은 지 3년 후, 결국 나는 언론인 23년의 생활을 접고 산티아고 길을 걸으러 떠났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영국 여자 헤니를 만나서 서로 각자의 나라에서 길을 내기로 약속하고, 이듬해 고향 제주로 내려와서 올레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우리 남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던 걸까. 천만다행으로 내 동생 동철이도 내가 언론인 생활을 접은 바로 그즈음에 조폭 생활을 청산했단다. 그때 문득 ‘쇠이유’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비록 소년수는 아니지만, 어른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법. 그에게 올레길을 답사해 최적의 루트를 찾아내고, ‘끊어진 길을 잇고, 사라진 길은 불러내고, 없는 길은 자연스러운 소재와 친환경 공법으로 만들어내는’ 중차대한 업무를 맡겼다. 이름하여 탐사대장. 동생에게는 고향 제주에 의미 있는 봉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 어느 쪽에서도 재정적 지원과 인력 지원을 받지 않은 채 길을 내려는 누나인 내게는 공짜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동생 찬스’였다. 누이 좋고, 동생 좋은 격이라고나 할까.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내 구상을 들은 동생은 ‘설문대할망이 제주를 만든 이래 최고의 멋진 프로젝트’라면서 자신이 약속한 대로 물심양면으로 올레길 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왕년에 그를 따랐던 전직 조폭들도 여럿 올레길 조성에 동원되기에 이르렀다.

아, 그들과 더불어 일하면서 나는 참으로 놀라운 경험을 했고, 인간의 다양한 얼굴에 눈을 떴다. 그들은 길을 찾는 동안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 소년들이었고, 페인트로 화살표를 그리고 리본을 매달 때는 섬세한 거리의 예술가였고, 나무 화살표를 만들거나 없는 길을 내는 작업을 할 때는 우직하고 힘센 노동자들이었다. 제주의 자연은 그들에게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아 주었고, 밤거리 생활에서 묻은 먼지를 털어냈고, 파벌끼리 싸움에서 쌓인 독기를 씻어주었다. 아, 자연의 힘이 이토록 위대하고, 사람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나는 길 조성과정에서 뼈저리게, 절실하게 확인하고 느꼈다.

#15년 만에 드디어 이룬 ‘손심엉 올레’의 꿈#

그때부터였다. 내가 ‘손심엉 올레’의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나이 오십이 다 된 성년 범죄자 출신도 이렇듯 변화시킬 수 있는 게 길인데, 청소년인 소년수에게 이런 변화의 기회를 준다면 얼마나 그들이, 그들 가정이, 우리 사회가 달라지고 행복해질 것인가. 나는 그 이름을 ‘손 심엉(‘잡고’라는 의미의 제주어) 올레’로 지어놓았다. 무릇 문제 아동, 문제 청소년은 사실 부모가, 가정이, 학교가, 사회가 그들의 손을 제대로 잡아주기 않았기 때문에 만들어진다는 게 내 믿음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다시 어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서 손을 잡고 올레를 걷는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과거를 털어내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5년 4개월여에 걸쳐서 올레길을 다 낸 뒤로, 나는 중앙과 지방의 사법, 교정 분야의 고위직 공무원과 종사자들을 만날 때마다 ‘손 심엉 올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중 귀 밝은 이들이 귀를 기울여 주었고, 실제로 제주 소년원은 재소자 대상으로 길을 걷는 프로그램을 일부 도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실험은 매우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만 이뤄져서 나는 늘 목마른 사람처럼 갈증을 느끼던 터였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헌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내 이야기를 들은 제주지검장-그 자신도 재임 기간 중 끊임없이 올레를 걸은 올레 마니아다_이 도내 청소년 범죄 관련 기관 단체를 죄다 설득해서 제주올레와 함께 업무협약을 맺는 일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끝에 5월 19일 제주지검 회의실에서 5개 기관(제주지방검찰청, 제주소년원, 제주보호관찰소, 청소년범죄예방위원 제주지역연합회, 소년보호위원 제주소년원협의회) 업무 협약을 맺게 되었다. 이름하여 ‘손 심엉 올레’가 본격적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이다.

나로 하여금 ‘손 심엉 올레’의 꿈을 꾸게 만들었던 내 동생 동철이는 2년 전 1월 하늘올레를 개척하러 먼 길을 떠났다. 하지만 그도 그곳에서 이 소식을 듣고선 소년처럼 활짝 미소를 지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다시는 자신처럼 한번 잘못 들어선 길 때문에 후배들이 평생 잘못된 길을 걸어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음을 기뻐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친구와 후배, 즉 소년원 출신들이 낸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기를 기대하면서. <서명숙 /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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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 2022-05-25 09:48:25 | 121.***.***.34
손심엉 올레! 정말 감동적입니다. 올레만이 상상하고 실현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친구들이 제주의 길 위에서 회복하고 사랑하는,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어가기를!

2022-05-24 17:30:43 | 14.***.***.138
역시 올레가 하면 다르네요. 동생분도 하늘올레를 걸으며 미소짓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감동적이예요. 손심엉 올레 많이 기대가 됩니다.

Jy❤️ 2022-05-24 17:16:39 | 39.***.***.125
길위를 걷는다는건 참 행복한일 같아요^^
무엇보다 올레는 저에게 크나큰 행복입니다
제 삶에 있어 용기를 얻어주는 곳중에 하나가
올레 입니다~^^

호호아주망 2022-05-24 17:09:57 | 175.***.***.188
삶을 바꿀 두번째 기회를 갖기는 힘든것인데,
올레길을 걸으며 꼭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