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위에서 전하는 편지>는 그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다.
여름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어느 날 오후, 나는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한창 이야기에 집중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는데, 갑자기 주위에서 요란한 박수 소리가 들렸다.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이 직원으로부터 완주증을 받는 모양이었다.
나도 덩달아 뒤늦은 박수를 보내면서 자세히 보니, 아이들이 매우 어려 보였다. 그들은 올해 6월부터 도입된 100킬로미터 완주 족자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들고 있었다. 슬며시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아이구 기특하기도 해라. 몇 학년이에요?” 아빠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3학년, 1학년이에요.” 얼른 대답했다. 직원이 “이 분이 올레길을 만든 이사장님이세요.” 묻지도 않은 내 소개를 했다. 쑥스럽게끔.
그러자 그 남자가 화들짝 놀라면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가족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저희랑 기념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나요?” 당근, 되고 말고요. 이런 훌륭한 어린 올레꾼들, 행복한 가족과 사진 찍는 영광을 마다할 리 있겠는가.
모두들 1층 한구석에 있는 ‘완주자의 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헌데 아이 아빠가 아이들을 불러 모으면서 급한 나머지 한국어가 아닌 영어를 쓰는 게 아닌가. 아까는 분명 나랑 한국어로 대화했는데. 혹시나 싶어 “얘들이 국제학교에 다니나요?” 물어봤더니 그렇단다. 교포인가? 육지 사람인가? 그들의 사연이 본격적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궁금증을 더 불러일으킨 건 아이 아빠의 흥분에 가까운 적극적인 반응이었다. 그는 사진 촬영이 끝난 직후 처음 보는 내게 이렇게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저 정말 아이들 때문에 제주 오긴 했어도 제주 사실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니 안 좋았어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애들 학교가 쉬는 바람에 어쩌다가 올레길 같이 걷기 시작했어요. 올레길 걷다 보니까 제주가 좋아졌어요. 사랑스러워졌어요. 정말 기적 같은 일이예요.”
놀라우리만큼 솔직한 데다 단순한 화법과 약간 엉성한 발음. 교포라는 확증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에게 나중에 전화로 인터뷰를 하고 싶으니 전화번호를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예의 그 솔직하고도 적극적인 태도로 “그럼요. 저야 너무나 좋지요.”
선선히 동의했다. 서로 번호를 교환하면서 훗날을 기약했다.
#캐다나 교포 출신, 제주 토박이 여자를 미국에서 만나다#
며칠 뒤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반갑게 받았다. 긴 통화를 통해 알게 된 가족의 사연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말없이 미소만 지으며 서 있었던 부인은 뜻밖에도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제주 토박이 출신 양수은 씨. 살짝 서툰 한국어로 또박또박 대답한 남편은 박유승 씨. 다음은 박유승 씨의 이야기다.
“저는 두 돌이 되기 전에 한국을 떠났어요. 캐나다로 이민을 결정한 부모님을 따라서 영문도 모르고 떠난 거지요. 그러니 한국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었어요. 캐나다에서 초 중 고교를 다 나온 뒤에 미국의 유타주의 대학으로 진학했어요. 바로 그 대학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요. 선생님. 그날은 제가 너무 흥분해서 얘기를 못 드렸는데 사실 제 아내는 제주도 출신이에요. 그녀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왔는데 같은 대학에서 만나게 된 거예요.”
아니 이럴 수가. 그의 말은 빠르게 이어졌다. 그냥 제주 출신이 아니라 제주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교육열이 높은 부모 덕분에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유학 간 제주 토박이란다. 어릴 때 이주한 캐나다 교포 남자가 제주도 토박이 여자를 미국의 대학에서 만나서, 세 아이를 낳은 뒤 다시 제주도에 와서 살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싶었다. 글로벌 시대임이 새삼 실감 났다.
그들 가족이 세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온 것은 8년 전. 제주도 장모님이 손주들이 성장기만이라도 한국에 와서 살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서울에서 살았어요. 5년 동안요. 서울은 캐나다나 미국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큰 불편 없이 살았어요. 헌데 애들을 국제학교 보내려고 제주에 내려온 것이지요. 아내의 고향이기도 했구요.”
애들 교육 때문에 제주에 내려오긴 했지만, 제주에 마음을 붙이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단다. 모든 게 낯설고 맘에 들지 않더란다. 그러던 중, 아이들마저 코로나 19 때문에 학교에 등교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져서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랑 올레길을 걸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송에서 올레길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나서요.”
아, 아빠의 선택은 옳았다. 올레길은 학교에 가지 못해 몸이 근질근질한 활동기의 남자아이들에게는 둘도 없는 놀이터였단다. 아이들은 길 위에서 걷고 뛰고 구르고 달리고, 나비를 따라서 팔랑거리고, 바다를 향해 내달렸단다. 올레길은 성인인 아빠에게도 힐링의 쉼터이자 제주를 사랑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었단다.
“푸른 바다를 지나서 녹색의 숲길을 걷다가 짠하고 마을이 나타나는 거예요. 길들이 어찌나 잘 연결이 되어 있는지 몰라요. 참 수고하셨구나 생각했어요. 길 위의 모든 게 좋았지만 전 특히나 마을이 맘에 들었어요. 돌담 담장이 있는 정다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평화로운 빌리지. 그곳에 사는 나이 든 분들이 가끔 저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아이들에게 귤도 나눠주시고. 아, 그러면서 전 제주가 정말로 좋아졌어요. 전에는 그렇게도 마음 붙이기가 힘들었는데 말이죠.”
그러면서 아이들의 학교를 옮기는 결정을 하게 되었단다. 은근히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 눈치인 국제학교에서 집 근처에 있는 해안초등학교로. 그들 가족은 큰 아이가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에 대비해 2~3년 뒤에는 다시 캐나다로 올라갈 계획이란다.
“하지만 그동안에는 되도록 자주, 많이 올레길을 걸을 생각이에요. 아이들이 자기네 핏줄인 이 제주도를 제대로 알아야지요. 저도 제 아내를 위해서도요. 이번엔 100킬로 완주에 그쳤지만, 언젠가는 올레길 전체를 완주하는 꿈을 갖고 있답니다. 그리고 또 꿈이 있어요. 외국에 이 아름다운 올레길을 알리는 데 우리 부부가 어떤 역할이든 하고 싶어요. 이 길은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길이거든요. 한국 사람들만 알기에는 너무 아까운 트레일이에요.”
내가 그의 말 끝에 반론을 내놓았다. 코로나 19 이전엔 외국 여행자도 제법 많이 걸으러 왔었고, 요즘에도 도내 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중에는 열혈 올레꾼이 많다고. 그는 또다시 서투른 한국어로 반박했다. “더더, 더 많이 알려야지요. 이 길의 가치에 비해선 아직도 덜 알려진 거예요.” <서명숙 /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