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31) 아, 산티아고. 그 언덕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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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31) 아, 산티아고. 그 언덕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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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위에서 전하는 편지>는 그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다.

7월 12일,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언덕이 오후의 눈부신 태양 아래서 우리를 반겼다, 마치 제주의 어느 오름처럼 봉긋이 솟아오른 나지막한 언덕. 아! 산티아고 순례자들에게 ‘희망의 언덕’ ‘환희의 언덕’이라 불리는 몬테 도 고조(Monte do gozo)다. 그 순간 언덕 한가운데의 순례자상도 제법 또렷하게 보였다.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는 이곳에 다시 온 것이다. 한 순례자로서가 아니라, 제주에 길을 낸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으로서. 단순히 걷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곳에 우리의 길 표식인 간세와 제주 상징인 돌하르방을 세우기 위해서.

16년 만의 일이었다. 그 언덕을 향해 혼자 뛸 듯이 걸음을 옮기는 동안, 16년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외롭고 쓸쓸하고 막막하고 힘들었으나 동시에 자유롭고 역동적이었고 기쁨에 차올랐고 환희마저 느꼈던 산티아고 길 800킬로미터 36일간의 여정이.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돌이켜보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연속이자 운명 같은 인연의 끈이 줄줄이 이어졌다. 시사저널 편집장 시절 심각한 번아웃 상태에서 병원을 찾았다가 의사의 권고로 운동을 시작한 것도, 그 어떤 운동에도 적응하지 못해서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돌잡이 때부터 해온 걷기를 다시 시작한 것도, 그러던 중에 재직 중이던 회사에 새로운 사장이 부임해서 그와 일하다간 제 명에 못 살 것 같아서 회사를 사직한 것도, 그 뒤 2년간 대한민국 곳곳을 방랑하듯 걸으면서 떠돌아다닌 것도, 그러다가 오마이뉴스 오연호 사장의 요청으로 그 매체의 국장으로 간 것도, 그 매체에서 내 버킷리스트였던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걷는 김남희 작가의 연재 원고를 접하면서 더욱 가슴 설레게 된 것도, 황우석 사태를 겪으면서 과학 기사가 시사매체의 톱기사를 장식하는 시대를 더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표를 결심한 것도. 결국은 천직이라고 여겼던 기자 생활을 때려치우고 산티아고 길을 걸으러 떠났고, 그 길 위에서 만난 한 영국 여자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길을 내기로 약속했고, 이듬해인 2007년 고향에 돌아와서 올레길을 내기 시작했으니 이 모든 게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 액운을 막아준다는 돌하르방, 방향을 가르쳐주는 간세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순례자상 근처를 돌아보고, 언덕 꼭대기에서 저 멀리 아스라이 떠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는 사이에, 다른 차로 이동한 팀들이 다 도착했다. 산티아고 마지막 구간이 있는 스페인 이베리아반도 최북서 주인 갈리시아 주 부지사, 이번에 갈리시아주와 자매도시 협약을 맺은 구만섭 제주도 부지사, 스페인 주재 박상훈 한국 대사, 대한민국 문체부 김장호 국장, 산티아고 순례자협회 일데퐁소 등등.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한국과 스페인의 행사 참석자들이 다 참석하자, 흰 천으로 가려졌던 돌하르방과 간세가 짜잔 하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페인 참석자들은 처음 보는 돌하르방과 간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들에게 제주도 부지사가 돌하르방을 소개했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며,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긴 돌이 검은 돌 현무암이며, 그 현무암으로 만든 돌하르방을 세워놓으면 집안이나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고 복을 가져다준다고 제주인들은 믿는다면서, 이곳에 세워진 돌하르방이 부디 산티아고 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주기를 바란다고. 그러자 갈리시아 부지사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정말이지 이 길을 걷는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이자 상징물이 될 거라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올 11월 제주올레축제 기간 중에 이곳 갈리시아주와 산티아고협회에서도 산티아고길 상징물인 조가비 조형물을 우리 올레길 1코스 성산 일출봉 인근에 세우러 한국을 방문한단다. 조가비는 산티아고 길을 개척한 예수의 제자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실은 배에 붙어 있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 산티아고 길을 순례하는 이들은 중세 때부터 조가비를 그 긴 길을 걷는 동안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기고 등짐에 매달고 다녔다. 산티아고길 표식도 가장 주요한 표식은 조가비 모형과 노란 화살표다. 늦어도 내년부터는 제주올레길을 걷는 올레꾼들은 첫 코스에서 산티아고길 표식을, 산티아고 길을 걷는 순례자들은 마지막 코스에서 제주올레길 표식을 만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 두 길을 다 걸은 이들에게는 올 9월1일부터 공동완주증과 메달을 주는 공동완주 인정 제도가 시행된다)

행사가 다 끝난 뒤에 우리는 가까운 실내 장소로 이동해서 양쪽의 전통 무용을 관람하는 또 다른 행사를 가졌다. 제주에서는 제주 한림여중 여학생 6명과 지도교사가 제주 해녀들의 애환이 깃든 해녀춤을, 갈리시아주에서는 남녀가 즐거이 짝을 지어 추는 갈리시아 전통 춤을 선보였다. 양쪽 다 개성이 너무나도 달라서, 서로 공연자들이 서로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는 훈훈한 광경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렇다. 다르니 다른 민족이고 다른 나라다. 그러니 더욱 흥미롭고 교류할 만하다. 서로 다른 게 틀린 거나 후진 게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다. 헌데 이 다른 이민족 교류의 현장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멀리서 온 동족을 만났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산티아고 길을 완주한 한국 여성 둘. 그들도 사흘 전에 길을 걷다가 만난 사이란다. 그들은 완주하고 난 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시에서 머물던 중 지역신문에서 행사 기사를 읽고, 일부러 물어물어 찾아왔단다. 이방인은 이방인이라서 반갑고 재미있고, 한겨레 동포는 동향이라서 더 반갑고 애틋하다. 그들과 한참 수다를 떨면서 공동 완주제 이야기를 해줬더니 올레길은 아껴뒀다가 좀 더 나이 먹은 뒤에 걸을 생각이었는데 조만간 가봐야겠다고 급 의욕을 불태운다. 그렇다. 내가 인연 따라 흘러 흘러 올레길까지 내게 되었듯, 그들도 인연이 있으니 그 자리에 온 것이고 또 올레길을 곧 걷게 될 것이다. 운명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 그 길에서 가장 부러웠던 한 가지

종점 도시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머무는 사흘간 나는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종착지인 대성당 주변으로 산책을 나섰다. 그동안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은 순례자들과 관광객들과 마주쳤다. 그중 가장 나를 놀랍게 하고 감동을 선사한 건 청소년 걷기 팀들이었다.

첫날 대성당을 못 찾아서-나는 주변에서 다 알아주는 완벽한 길치다-이리저리 헤매는데 맞은 편에서 한 떼의 청소년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걷기도 힘들 텐데, 뭔가 알아듣기 힘든 노래를 떼창 하면서.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대성당이 나오겠지 싶어서 무조건 뒤를 따랐다. 그들은 어떤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 누군가의 선창 구호를 뒤따라 외치면서 우르르 달려갔다. 나도 같이 달려갔다. 아, 그 끝에 내가 16년 전에 프랑스 생 장 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한 지 36일 만에 기쁨의 언덕을 넘은 뒤 기진맥진해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던 그 대성당이 있었다. 그곳 너른 광장에서 그들은 서로 어깨를 잡고 빙빙 크게 원을 돌면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한참을 기다린 끝에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걸었는지.

이곳 갈리시아주에서 가장 먼 북서쪽 바스크주의 어느 도시에서 온 고교생들이란다. 100킬로미터를 현장학습 비스름하게 걸었단다. 그런데 지친 기색도, 싫은 기색도, 끌려온 눈치도 아니었다. 이 일을 해낸 자신들에 대한 자신감, 성취감에 그들은 도취되어 있었고 자기 나라 스페인에 대한 자부심이 뿜뿜 흘러넘쳤다. 청춘의 에너지는 또 말해 무엇하랴.

그들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다음 날도, 다다음날도 아침저녁으로 학생들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12일 오찬 자리에서 갈리시아 관광청장에게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내가 물었다. 16년 전에만 해도 학생들을 거진 못 봤는데 상전벽해도 유분수지 이번에는 청소년을 더 많이 본 것 같다, 그 사이에 대체 이 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고. 그랬더니 그녀가 득의만면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10여 년 전부터 갈리시아주 관광청이 학생들 걷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그 비용 일부도 지원하는 엄청난 투자를 장기적으로 한 결과란다. 청소년 정신과 육체 건강을 위해서도, 서로 다른 지역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한 나라에 대한 애국심 고취를 위해서도, 이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도 일석삼조 효과를 노리고 한 것이란다. 실제로 그런 효과가 기대 이상으로 나타나서 너무나도 뿌듯하단다.

아, 이 길은 16년 전에는 너도 고향으로 돌아가서 길을 내라는 영감을 주더니 이번에는 청소년 프로그램으로 또 다른 메시지를 던지는구나 싶었다. 끝없는 경쟁, 시험 대비, 학원 뺑뺑이 도느라고 눈이 다 퀭한 한국의 청소년들이 절로 떠올랐다. 제주에 살면서도 올레길 한번 걸을 엄두를 못 내고, 그럴 기회도, 동기도 못 찾는 수많은 제주의 청소년들 또한. 그래 우선 초,중,고 학생들부터 걷는 행복, 걷는 기쁨. 걷는 보람을 체험시키고 고향 제주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려주는 일을 다시 시작해보자!! 이번 산타아고행이 내게 준 또 다른 선물이었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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