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32)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만난 재외 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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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32)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서 만난 재외 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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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위에서 전하는 편지>는 그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 두 아들과 함께 437km 완주를 성공한 아빠

스페인 산티아고길에 제주올레 간세 표식을 심기 위해 긴 출장을 다녀왔다. 간만에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들른 건 지난 8월 초. 헌데 1층 식당 겸 카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벌떡 일어나면서 나를 격하게 반기는 포즈를 취했다. 어쩐지 낯이 익었지만, 스스로 ‘안면인식 장애’ 임을 인정할 정도로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인지라, 누구인지는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다가가 살펴보니 그의 주위에 어린 남자애가 둘 있었다.

아, 갑자기 기억이 우르르 재생되었다. 몇 달 전 100킬로 완주증을 받으러 왔다가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눴던 캐나다 교포 출신 박유승 씨와 그의 두 아들이었다. 두 돌도 안된 나이에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캐나다 대학에서 만난 제주 출신 여자와 결혼하게 돼, 서울에 와서 5년간 살다가, 아이를 국제학교에 보낼 겸 어린 시절 외가 동네에 사는 경험도 시킬 겸 온 가족이 제주에 내려왔다는 그. 하지만 서울은 그럭저럭 살만했지만 제주는 너무나 낯설고 싫더란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학교가 문을 닫자 아이들과 할 일을 찾다가 우연히 제주올레를 알게 되어 걷기 시작했고, 이제는 비로소 제주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내게 말했었다. 난 그의 독특한 사연을 블로그에 쓰기까지 해 놓고서 그를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길 위에서 보내는 편지 22편 참조)

그는 못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 글을 써주셔서 학교에서 자기네 가족이 화제가 되었다면서, 방금 센터에서 받은 완주증 사진을 내 카톡으로 막 전송했다면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면서. 그 사이에 아빠와 두 아들(11살, 9살)은 얼마 전 개장한 추자올레 18-2코스까지 437킬로미터를 완주했단다. 그는 흥분한 어조로, 약간은 어색한 한국어와 유창한 영어를 섞어가면서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자신은 걸으면 걸을수록 제주 풍경과 제주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다음 주면 캐나다로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제주를 다시 찾을 거라고, 그때는 제주의 오래된 옛집을 사서 고쳐서 살고 싶다고. 그는 또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이 아름다운 제주올레 길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이 길은 그 아름다움에 비해서는 너무 덜 알려져 참으로 안타깝다고.

# 산티아고 길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두 남녀

그들 가족을 만난 지 사흘쯤 지났을까. 나는 또 다른 캐나다 교포 커플과 만나게 되었다. 장소는 역시 제주올레 여행자센터. 그날 나는 서울에서 휴가차 내려온 대학 선배와 센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비행기 연착으로 이십 분쯤 늦는다는 선배를 기다리던 중, 훤칠한 젊은 남녀가 카페로 들어섰다. 둘 다 어마어마하게 큰 배낭을 짊어진 채. ‘아니, 산티아고길을 걷는 것도 아닌데 저리 큰 배낭을?’ 생각했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그들 역시 직원에게 완주 도장이 찍힌 패스포트를 제출하고 직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서류를 작성한 뒤에, 주위의 박수세례 속에서 완주증과 배지를 받고, 완주자의 벽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그들의 싱그러운 젊음을 지켜보노라니, 50이 다 되어서야 처음으로 긴 여정에 올랐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도착한 선배도 그들을 지켜보면서 “난 청춘인 줄도 모르고 그 시절을 보냈는데... 청춘을 청춘답게 보내는 저들이 참 부럽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군가 나를 그들에게 귀띔했고 그들은 화들짝 놀라면서 반가워했다. 자기들도 산티아고 길을 완주했다면서, 얼마 전 산티아고협회와 제주올레가 공동 완주를 인정하기로 협약했다는 기사를 읽고 너무나도 기뻤노라고.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자연스럽게 우리는 자리를 같이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 그들의 사연은 우리가 상상한 이상이었다. 남자는 2살 때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 가서 줄곧 밴쿠버에 살던 캐나다 교포란다.(사흘 전에도 토론토에서 살던 캐나다 교포를 만났는데... 크크) 대학 졸업 뒤 미국계 대기업에 다니던 중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꼈고 우연히 산티아고길 정보를 접하고는 무작정 5일 뒤 떠나는 비행기 편을 예약해서 프랑스로 날아와서 길을 걷기 시작했더란다.

여자는 알고 보니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2016년 1년 휴직을 하던 중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가 이런 시기에 산티아고길을 다녀오라고 적극 권유를 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났더란다.

그럼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어요? 내 호기심이 본격 작동하기 시작했다. “걸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어요. 도시로 들어가는 어느 풀숲에 앉아 있는데 한 남자가 발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질 듯 다가오길래 너무 불쌍한 마음에 그냥 손을 잡아주었지요. 같은 순례자 입장에서 그런 거였지요. 그리곤 전 제 갈 길을 갔는데 나중에 보니 그가 제 뒤를 따라서 제가 묵는 알베르게를 일부러 찾아들어 왔더라고요.”

나흘째라! “그렇다면 혹시 팜플로나(Pamplona) 아니었나요?” “맞아요. 팜플로나였어요.”

그런데 지금 이렇듯 건강해 뵈는 근육질의 캐나다 교포 남성은 왜 피까지 흘리는 상황이었던 걸까? “대기업에서 근무하면서 거의 운동을 할 시간도 없었던 제가 의욕만 앞서서 너무 무리를 해서 걷다가 발병이 난 거지요.” 그렇다. 프랑스길 출발점인 ‘생 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스페인 지역으로 접어드는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피레네를 넘는 산길 26킬로미터는 내게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팜플로나 이후부터 함께 걷게 된 이들은 점점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단다. 첫날부터 한국인들끼리 대여섯 명이 같이 걸었지만, 둘 사이를 눈치챈 주위 어른들이 하나둘 이런저런 구실을 대면서 자기들 곁을 떠나더란다. 지금 돌이켜보면 두 사람이 오붓하게 데이트하면서 걷도록 배려를 해준 것 같단다.

남자는 Damien HJ park. 여자는 황현지. 두 사람은 알고 보니 스물일곱 동갑이었다. 두 사람은 종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 앞에 나란히 서게 되었고, 각자 사는 나라로 돌아간 뒤에도 3년간 원거리 연애를 한 끝에, 마침내 2019년 결혼에 골인하기에 이르렀단다. 사랑하는 여인과 한 나라에 살고 싶었던 그는 영어강사로 한국에 취업했단다. 자녀 교육을 위해 물설고 낯선 나라 캐나다로 이민을 감행했던 부모님은 한국으로 되돌아가는 아들을 말렸지만, 아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단다.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사단법인 제주올레

산티아고길과 제주올레를 다 걸은 이들 커플에게 물었다. 두 길의 느낌이 어떻게 비슷하고 달랐는가를. 두 사람은 유명 관광지 특성상 제주 물가가 꽤나 비싸 산티아고길에 비해 제주올레를 걷는 경제적 부담이 더 컸던 것 같다고 기억을 더듬으며 말해주었다. 다만 제주올레는 산티아고길과 달리 코스별로 시작점 또는 종점에 안내센터가 있어 필요한 정보를 그때그때 얻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편리했다고. “둘 다 무조건 편안한 길만 걷는 건 아니죠.

때로는 아스팔트 차도를 만나기도 하고 물 웅덩이나 경사진 길을 만나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의 길을 걸으며 나 자신의 가식 없는 진짜 모습을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끈기와 내려놓음을 통해 정신으로 한 단계 성숙하게 된다는 게 두 길의 공통점이었던 것 같아요.”

센터에서 우연히 만난,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캐나다 교포들. 그들을 만나게 해 준 것은 올레라는 길이기도, 여행자센터라는 공간이기도 했다. 사람의 인연을 이어주는 길에 대해서도, 수많은 올레꾼들의 만남의 공간인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도 감사하다는 마음을 새삼 느낀 한 주였다. <서명숙 /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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