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의 오늘]<24>초가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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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오늘]<24>초가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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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호회에서 문학기행 하면서 유명 예술인이 살았다는 초가집을 방문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과 구수하고 시큼한 흙내음이 옛날 어릴 적 어머니의 품안에서 느끼던 포근함과 그 속에서 맡던 살내음처럼 코끝을 자극하며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참으로 반가운 냄새다. 마치 내가 어릴 적에 살던 집에 들어서는 느낌마저 들었다.

순간 무심히 30여 년간 잊고 살던 초가집에 대한 내 유년 시절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반가움에 내 집 인 양 집안으로 들어가서 구석구석 보고 싶었으나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있어 아쉬움을 뒤로한 채 겉에서 눈으로만 감상하고 돌아왔다.

요즘에는 도시뿐만 아니라 외곽지에서도 초가집을 구경하기 힘들다. 가끔씩 TV드라마 촬영장소나 한 장의 옛날 사진 속에서 밖에….

내 유년기인 70년대에 시작된 전국적으로 ‘잘살아보세’라는 제목 아래 ‘새마을 운동’으로 사람들의 부가 늘어나면서 초가집이 하나 둘씩 없어지며 시멘트로 반듯하게 지어진 양옥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각각의 동네에는 절반 이상이 흙으로 지어진 전형적인 초가집이 주를 이뤘다.

물론 내가 살던 집도 초가집이었다. 겉으론 허름하지만 큰방 한 개에 작은 두 개의 방, 일반 초가집의 부엌은 안방과 연결되어 아궁이에 장작불을 피워 난방을 겸한 화로로 사용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웬 일인지 우리 집은 남들과 달리 부엌이 따로 없어 요즘의 원룸의 구조처럼 마루 한 켠에다 ‘곤로’라는 화기를 갖다놓고서 부엌처럼 사용하곤 했다. 그렇게 그런 아담하고 단출한 초가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다정하고 화목한 생활을 했다.

당시 동생과 나는 어려서 부모님과 함께 방을 사용하다 보니 남는 빈방은 세를 주기도 했었다. 당시 기억을 떠올려 보면 때론 갓 결혼해 집장만 하기 전인 신혼부부, 직장 다니는 누나, 시골에서 공부하러 올라 온 자취대학생 형 등 작고 아담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초가집을 거쳐 갔다. 그 중 대학교 다니던 형이 유독 나를 잘 챙겨주고 아껴주었다.

한번은 형이랑 내가 마루에서 장난을 치다가 나무로 된 마루가 무너지는 바람에 깨져 무너진 나무 사이에 내 발이 껴 다리를 크게 다칠 뻔했는데 형이 내 중심을 잡아주어서 큰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다. 형은 마치 자기 잘못인 양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마루 밑은 텅 비어 있었고 나무로 된 마루 위에 장판을 깔아놔서 장마철이나 비가 오면 습기가 차서 나무가 썩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들이 형 탓이 아니니 걱정 말라고 하시며 임시방편으로 나무를 잘라다 잇기도 하셨다. 또한 내가 장애가 있는 탓에 가장 불편했던 부분은 집 건물과는 동떨어져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도의 재래식화장실에는 생계수단 겸 푸세식이었기 때문에 청소용으로 화장실 밑에 돼지를 키우는 게 다반사였으나 우리 집에는 돼지가 없었다.

어쨌든 그런 화장실 사용을 힘들어 하자, 부모님은 은색 알루미늄 요강을 준비해 주시기도 하셨다. 나만을 위한 전용 화장실이었으나 동생도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무서우면 같이 사용하기도 했다.

내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줄곧 들어 온 무서운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재래식 화장실 귀신 얘기다.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남녀노소 모두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동네 형, 누나들이랑 저녁에 동네 한 귀퉁이에 모여 앉아 화장실, 학교, 공동묘지 등 무서운 얘기를 재밌게 듣고 나서 집으로 혼자 돌아올라치면 등골이 오싹함은 물론 그날은 화장실은 아예 갈 엄두를 못 내곤 했었다.

요강이 준비되기 전에는 아버지나 다른 한 사람과 같이 가서 내가 용변을 다 볼 때까지 화장실 문 밖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하고서 무섭고 두려움에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불러보기도 했었다.

간혹 짓궂은 형이나 누나들은 나를 골려 주려고 내가 부르면 처음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다가 귀신 목소리를 내기도 했었다.

그렇게 탈도 많고 사연도 많은 초가집이었지만 그때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어머니의 품처럼 참 따뜻하고 포근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가정을 꾸리게 되면 가족들과 함께 도심을 떠나 한적한 곳에 가서 옛날 방식 그대로 흙으로 지어진 초가집에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꿈을 키우며 글을 쓰련다.

오랜만에 초가집을 보니 당시 우리 집에서 자취하며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 주었던 대학생 형이 문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검은 머리 사이로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멋있는 중년 신사가 되어 있을 텐데….<헤드라인제주>

이성복 수필가 그는...
 
이성복님은 제주장애인자립생활연대 회원으로, 뇌변병 2급 장애를 딛고 지난 2006년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가을호에서 수필부문 신인상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수필가로 등단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원으로 적극적인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이성복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이성복 객원필진/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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