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985년 12월 총학생회장 선거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헤드라인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합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됩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보고자 합니다. <헤드라인제주> |
1985년 5월 첫 정치적 대중투쟁을 이끌어낸 제주대 학생운동권은 그해 12월 총학생회선거에 나서 지지후보를 당선시킨다. 이 선거는 그동안 내부 학습 소그룹(소위 '언더') 중심으로 이뤄지던 학생운동을 총학생회라는 공개된 조직 속에서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제주대 학생운동사(史)에 있어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총학생회장 선거를 계기로 해 학생운동권은 학습 소그룹과 학생회라는 두가지 틀에서 대중적 정치적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또한 이후 선거는 학생운동권이 직접 진출하면서 '자주적 학생회'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1986년 학습소그룹과 연대한 박희수가 당선된 후, 학습 소그룹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학생들이 연달아 당선된다.
1986년 11월, 총학생회장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경찰에 연행돼 구류처분을 받은 현길호가 학교당국의 제명처분에도 불구하고 '옥중당선'한 사례가 그 대표적인 예다. 제명된 학생의 총학생회장 당선으로 1987년 3월 실시된 재선거에서도 운동권인 송형관이 당선된다. 1987년 출범한 총학생회는 그해 6월과 7월,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면서 이른바 '6월항쟁'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1985년 11월 총학생회 선거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게 한다. 첫째, 종전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학교당국의 많은 통제와 간섭을 받았던 학생회 조직이 이 선거를 기점으로 해 분명한 선을 그으며 자주적이고 대중적 학생회를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번째, 학습 소그룹 중심의 정치투쟁이 '학생회'라는 공개적 조직 틀 속에서 펼쳐나가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즉, '결의한 소규모' 중심으로 행해지던 정치투쟁이 학생대중을 아우르는 대중적 투쟁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박희수씨의 이같은 학기초 복학생활은 운동권진영에서도 자연스럽게 스크린이 되었다. 선동력이 뛰어나고 사회정의감에 불타오르는 모습이 운동권 조직내부에서도 스크린이 되었던 것이다.
그해 5월쯤, 학내에서는 총학생회장을 직선제로 선출하는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었다. 기존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들 스스로 총학생회장을 뽑고, 자주적으로 학생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대중적 분위기가 제주대학 내에서도 물씬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총학생회의 부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학교당국에서도 못마땅해 했을 뿐만 아니라 이 논의를 주도적으로 해야 할 주체가 없었던 것이다.
"학생회 회칙을 제정해야 하는데, 골자는 직선제였고, 만들려고 했는데 만들지는 못했어요. 총학생회 구성이 무산될 위기에 있었던 것이죠. 그 때 저하고 사회학과 선배인 김충식씨 양용혁씨하고 3명이 '이대로 가서는 안된다. 어쨌든 총학생회는 구성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자치권이 주어지는 것인데 이를 포기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의견을 모았어요."
하지만 이 문제를 주도해야 할 대의원회의는 열리지 못했다. 당시 학생회가 없으니까 대의원 몇명이라도 모여서 대의원회 회의소집을 하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과대표를 만나서 설득했죠. '비상학생 총회를 개최할테니 우리에게 위임해달라고. 그래서 비상학생 총회를 준비하게 된 거에요."
김충식, 박희수, 양용혁 등은 5월15일 비상학생총회를 하기로 결정하고, 이의 준비에 들어간다. 학생회 회칙 초안을 만들어서 박희수씨의 집에서 등사기로 유인물을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대형현수막을 교문앞에 내걸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총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의 사회과학대학 위원 3명 중 한명이었던 김충식의 역할이 매우 컸다.
비상학생총회가 열리는 전날인 5월14일 공교롭게도 제주대에서는 '첫 대중적 정치투쟁'이라는 불리우는 김계완.강수경 주도의 5.18 집회가 열린다.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하면서 최루탄이 터지고 투석전이 벌어졌다. 학내는 최루연기로 가득했다.
학생대중을 결집시킨 성공적 정치투쟁이라고 평가되는 이 싸움 덕분인지, 5월15일 비상학생총회는 대성공이었다.
"학생들이 야외음악당을 가득 메웠어요. 뒤에까지 학생들이 아주 많았죠. 그 이전에는 상당히 무관심해 하던 학생들도 막상 총회를 하니까 많은 관심을 보였어요. 학생회 구성이 무산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학내 민주화라든지, 5.18 집회라든지, 그런 영향도 컸겠죠."
이날 비상학생총회는 김충식씨가 의장을 맡고, 박희수씨가 사회를 맡아 진행됐다. 학생회회칙은 원안대로 통과됐다. 그리고 이어 첫 총학생회장 선거가 직선제로 실시해, 김순민씨가 총학생회장에 선출된다.
그리고 12월 있을 총학생회장 선거를 앞두고, 10월말쯤 학생운동권 진영에서는 총학생회장 선거를 연대하는 문제에 대해 본격적인 협의가 이뤄진다. 그 때 대표적 인물이 바로 당시 인문대학 학생회장을 맡고 있었던 김현수씨.
김현수씨는 단과대학 학생회장 중 보기드문 운동권 출신으로, 사실 학습 소그룹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김현수씨가 운동권 진영의 의견을 모아 박희수씨를 만나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할 것을 제안했고, 박희수씨가 이를 수락하면서 본격적인 '연대'는 시작된다.
총학생회장 선거는 3파전으로 전개되면서 선거전은 매우 치열했다.
"관덕정 쪽 YMCA옆에 프로그램실로 쓰는 허름한 기와집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를 빌려 선거운동 캠프로 사용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회의장소였을 뿐, 실질적인 선거운동은 학내에 쳐진 천막안에서 이뤄졌어요. 학내에 천막을 치고 선거운동을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하더라구요."
당시 재학중이던 황인호씨(학생운동권 진영 추천으로 1986년 총학생회 집행부로 참여)는 "지금의 시각으로 그 때를 보면 별로 큰 것이 아닐 수 있다. 총학생회가 그 전에는 학도호국단 선거를 하면서도 돈 선거가 만연했는데, 말끔하게 천막선거로 전환한 것이다. 대학선거문화를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선거운동에 필요한 유인물이나 현수막 등을 제작하는 비용은 대부분 운동권진영에서 자발적으로 모은 돈으로 충당됐다.
선거는 결국 48.95%의 지지를 받은 박희수가 당선되었다. 학생운동권 진영과 연대한 후보가 처음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학습소그룹 3명 총학생회 집행부 인선...'4.3분향소' 설치
이듬해 총학생회 출범 직전 집행부 인선작업에서는 학습소그룹에서 추천된 3명(정광훈, 양용혁, 황인호)이 집행부로 들어갔다.
운동권진영이 포함된 총학생회가 구성된 것이다. 진보적 성향을 띤 1986년 출범 총학생회는 정례적 행사에 있어서도 종전 학생회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신입생환영회 행사가 민중적 행사로 치러진 것을 비롯해, 그룹사운드 공연 중심의 5월 축제는 '대동제'로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중에서도 1986년 4월3일, 총학생회가 그동안 말문을 열기 꺼려하던 4.3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4.3분향소'를 설치한 것은 크게 주목을 받았다.
박희수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4.3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대자보로 쓰고 4.3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래서 4월3일 아침에 학생회관 1층(현 본관 학생생활연구소 앞)에 4.3분향소를 설치하니까 학생들이 와서 분향하기 시작했다. 오전 11시쯤 되니까 난리가 났다. 학교당국에서 모두 분향소를 즉각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분향소를 설치하면 안기부나 경찰에서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까지 해댔다.
그래도 우린 못치우겠다고 버텼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교직원들이 모두 와서 사정사정 하며 제발 치워달라고 했다. 결국 낮 쯤 되어서야 학생회 사무실내로 분향소를 옮기게 된 것이다."
불과 몇시간 동안의 분향소 운영이었지만, 이 사건은 4.3문제에 있어 진상규명을 첫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당시 총학생회 간부를 지낸 모 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4.3에 대해 뭔가 해보려고 마음의 준비가 많았던 것 같다. 그는(박희수)4.3에 대해 첫 물꼬를 트고 대중적 관심을 갖게 했다. 그 당시에는 4.3이란 말만 꺼내는 것도 큰 거였다. 안기부와 경찰이 학내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어서.... 학생운동권이 처음으로 4.3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4.3은 그의(박희수) 아이디어였다. 4.3에 대해서는 그 만이 갖고 있는 생각이 있었다. 비공개로 준비했다. 분향소는 당일 아침에 준비했다.
그 전날 운동권내에서는 이 계획이 잘 알려져 있어, 학생과에서 분향소를 철거할 것을 요구할 때에는 학생들이 많이 와서 도와줬다."
이에대해 또다른 간부는 일부 반론을 제기했다.
"박희수 회장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운동권진영의 짜여진 프로그램이었다. 개인의 생각과 의도로 진행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운동권진영의 프로그램으로 준비되었던 것일 뿐이었다."
4.3 분향소 설치를 통해 4.3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를 시도했던 총학생회는 이어 4월19일 4.19기념행사를 갖는다. 사실 이 때부터는 제주대 내에서도 크고작은 시국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당시 총학생회에서 일했던 한 인사의 얘기다.
"그 전에는 학교에 대자보 하나 붙이는 것도 아주 큰 문제였는데, 그때부터는 아주 자연스러워졌다. 대자보가 크게 활성화됐다. 학습하는 사람도 아주 많아졌고, 학내 집회도 많이 이뤄졌다."
#5.18초청강연회를 앞두고 운동권진영과 갈등
하지만 1986년 총학생회는 5.18을 전후해 운동권진영과 갈등을 빚는다. 총학생회 일부 집행부가 5.18에 즈음해 박남선 선생(5.18항쟁 당시 전남도청 시민사수대 상황실장) 초청강연회를 준비하다가, 내부적으로 갈등을 빚으면서 이 초청강연회가 무산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학생운동권 진영에서 추천되어 총학생회 간부로 일하고 있던 황인호는 간부직을 사임하고 빠져나와 버린다. 정광훈도 그해 하반기 학생회 간부직을 사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명 중 양용혁만이 그대로 남아 차기년도 총학생회 선거까지 책임을 지며 운동권진영의 '창구역할'을 맡아 일한다.
양용혁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하면서 교지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집행부 내부 갈등은 있었으나 어쨌든 언더진영과 총학생회간 중간연계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끝까지 남게 된 것이다. 차기년도 총학생회 구성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차기년도 총학생회장 선거를 모두 마무리하고 인수인계를 할 때까지 총학생회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당시 총학생회 간부직을 그만뒀던 황인호씨의 말이다.
"결국 학생운동에 있어 총학은 총학 나름대로 자기 프로그램이 있는 것인데, 운동권진영은 그 나름대로 정치투쟁을 총학에 많이 요구했어요. 운동권적 성향의 총학생회를 출범시켜 얼마 안된 초창기이다 보니 서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직선제로 구성된 총학생회였지만, 대중적이고 자주적 학생회를 구현해내는데도 한계를 보였다.
"당시 학내 탄압도 아주 심했는데, 구체적인 정치적 투쟁문제에 대해서는 (학내 소그룹과 총학회가)이견이 엇갈렸다. 하지만, 신입생환영회와 대동제에서는 민중적 시각으로 잘 했다.
그때도 그런 두려움은 있었다. 언더가 아니라, 오픈된 상태에서 일하다 보니까 제약이 많았다. 차라리 언더였으면 정치적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도 밝히고, 여러가지 활동이 가능했는데, 총학생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총학생회 간부들 중 3명이 언더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역할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운동권 진영과 연대해 탄생시킨 첫 총학생회, 운동권진영의 총학생회로의 진출, 그리고 갈등 등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1986년 총학생회는 학도호국단 체제의 틀을 말끔히 벗어던지고, 학생대중의 구심으로 자리매김하는 역할을 해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학습 소그룹 출신의 모 인사는 "그동안 '언더' 중심으로 돌아가던 것이 학생회 중심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놨다. 1987년 이후 학생회가 완전한 자주적 학생회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틀이 1986년부터 노력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1986년 총학생회가 갖는 이러한 의미는 그해 11월 도서관점거사태와 현길호 옥중당선,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 1987년 송형관 총학생회장 당선, 1987년 6월항쟁 등 일련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헤드라인제주>
1991년 선거 때 그의 출마는 주변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이른바 '범민주단일후보'로의 추대였다. 당시 제주도의회 의원선거에 출마한 후보자 중 이영길 후보(전 제주도의회 의원 및 제주도 정무부지사)와 그가 범민주단일후보로 출마했다. 그때 그의 나이 32살. |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다음은 1985년 12월9일 제대신문 보도내용
총학생회장에 박희수군 당선
-여학생회장에는 진영옥(영교 2)양 당선
-투표율 65.59% 보여
86학년도 총.부학생회장 및 여학생회장선거가 지난 4일 치루어져 총.부학생회장에 기호 3번 박희수(법학 2) 박계수(축산 2) 후보가 득표율 49.85%(2천2표)로 선출되었다. 또한 정.부 여학생회장에는 기호 2번으로 출마한 진영옥(영교 2) 홍경희(사교 2) 후보조가 총 657표(득표율 43%)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들 당선이 확정된 총.부학생장 및 정.부여학생회장 취임식은 내년 3월 있게 되며 이날부터 임기가 시작된다. -중략-
<제대신문 1985년 12월9일자 1면>
1985년 11월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당선된 박희수씨(47. 전 제주도의회 의원). 그는 학습 소그룹 출신은 아니었다. 81학번인 그는 1학년을 마친 이듬해 군에 입대한다. 그가 근무한 곳은 광주 인근에 있는 31사단. 31사단에서의 군복무는 그에게 사회를 새롭게 보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폭도들의 반란'으로만 인식되었던 광주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것이다. '언더' 구성원들처럼 체계적인 학습과정을 밟지는 않았지만 그의 잠재적 내면 속에는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나름대로의 냉철함이 있었다.
"전남대 후문앞 서점에서 광주학살에 대한 사진과 노래테잎, 책, 유인물 등을 많이 가져온 기억이 있어요."
그런 그가 1985년 3월 복학하여 학내생활을 하면서 운동권진영에 '스크린'이 되었던 것은 부당한 것에 대해 당당히 항의하고, 자신의 의견을 가감없이 성토해내는 모습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자보 뜯어가는 학생과 직원에 맞서 격렬한 항의
학습 소그룹에서 활동했던 84학번의 모 인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집회만 하면 학생과 직원들, 심지어 교직원들까지 나와서 학생들을 만류하고 끌고가는 일들이 많았는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언제인가 박희수라는 학생이 학교당국에 격정적인 성토를 했던 기억이 있어요.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가 궁금해 했지요. 우리와 같은 조직 구성원은 아니고, 일반 학생인데 집회가 열려 '성토' 시간이 되면 그가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어요."
박희수씨도 이 부분에 대해 상황을 비슷하게 정리했다.
"복학을 해서 얼마 안된 3월, 우연히 몇명 안되는 소규모 집회현장을 보게 됐는데, 학생과 직원들이 집회를 못하게 막으려고 한 것을 보게 되었죠. 그 순간 '이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 학생과 직원들과 몸으로 부딪히면서 싸움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어느 집회에서인가 자유발언, '성토시간'이 있었는데, 그 성토시간에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자리였어요. 그 자리에서 성토를 하게 된 것이죠."
집회 때만 되면 나타나는 그의 성토는 매우 격정적으로 이뤄졌다. 내면의 감정을 토해내는 듯한 그의 성토는 학생들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보통 왜 이런 집회 자체를 못하게 하느냐.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다. 사회가 정의롭게 흘러가도록 우리가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해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내용의 성토였죠."
'뛰어난 성토' 뿐만 아니라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도 그냥 묵과하고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고들 말한다.
"한번은 학생회관 앞을 지나가는데 학생과 직원들이 '대자보'를 뜯어버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학생과 직원들에게 강하게 항의했죠. 처음에는 학생과 직원들도 누군지 몰라 하다가 나중에는 다 알게 되었어요."
#운동권 진영에 자연스럽게 '스크린'...김충식 박희수 양용혁 3명이 비상학생총회 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