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의 오늘]<31>남자의 주먹
상태바
[이성복의 오늘]<31>남자의 주먹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나브로 가을이 어깨너머로 온다.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좋을 만큼한 선선하다. 마음이 여유로워서 일까. 무더웠던 지난 여름이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한달이 넘게 더위가 이어진 어느날, 더위로 머릿속은 멍하니 아무 생각 없고, 먹고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땀범벅이 되는 통에 뭔가 해야 한다는 의욕도 상실했다. 작년까지는 그저 여름이니 덥구나 했었는데 올해는 나만 살이 쪄서 더운 줄로만 생각했었는데, 길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다 축 처져 있는 걸로 봐선 올여름이 무척 덥긴 더운 모양이다.

내가 총무를 맡은 친구들 모임 날이라 집에 있어도 덥기만 하여 모임은 저녁이지만 은행 일도 보고 그 동안 덥다는 핑계로 미뤘던 일들도 볼 겸 아침 일찍 채비해 집 밖을 나서려는데 때마침 한 줄기 비가 쏟아진다.

“젠장, 하필이면 비도 꼭 나가려고 하니 내리기 시작하네. 좀 시원해지려나.”하고 나지막이 투덜거리며 집을 나서 택시를 잡아타고서 조금 가다 보니 아주 폭우처럼 쏟을 것 같은 기세로 덤벼들던 비가 금세 그치더니 다시 뜨거운 태양빛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아이, 이놈의 날씨는 비도 내릴 거면 하루 종일이라도 내리던가. 그깟 것 내리려고 한꺼번에 쏟아 부었나. 정말 요즘 날씨 미치겠다, 미치겠어.” 하며 택시기사님도 순간 짜증을 내면서 “이런 날은 습도가 높아 서로들 조심해야 하는데 우리도 손님들하고 사소한 일에도 싸움이 커져마씨. 손님도 오늘 같은 날은 어딜 가도 조심헙써.”

“기사님도 안전운행 하세요.”하며 서로를 걱정해주며 택시 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 시원한 차안과는 달리 숨이 팍 막히는 것이다.

‘아 정말 조심하고 다녀야지’ 하고 은행에 들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나의 온몸을 감싸주는데 천국이 따로 없었다. 월요일 오전이라 창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지만 은행 안의 시원함에 짜증은 싹 사라지고 오히려 내 차례가 천천히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은행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또 숨이 헉! 막혀 오지만 나온 김에 미뤄 두었던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더위도 아랑곳 않고 여기 저기 다니며 일을 다 마쳤다. 온몸은 뭐 땀범벅이 됐다. 내 얼굴은 달덩이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고 아침도 안 먹은 터라 시원한 물회나 한 그릇 먹을까 하고 주위에 가까운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식당 앞은 인도를 새로 까는 공사를 하고 있었고 아침에 온 비로 흙탕물이 고여 있었다. 흙탕물을 피해 조심히 식당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가 또다시 몸에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너무 더운 탓에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시원한 물회 한 그릇에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었다.

그 행복도 잠시, 식당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식당 문턱에 발이 걸리는 바람에 식당 앞 흙탕물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아 이일을 어쩐다.’ 벌건 대낮에 벌어진 일이라 지나가던 사람들은 다 쳐다보고 몇몇 사람들은 내게 와서 부축해 일으켜준다. 고맙기도 했지만 창피한 생각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급한 대로 식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식당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걸레와 수건을 얻어 대충 흙을 털어냈지만 흙탕물이 하얀 바지에 모두 스며들어 속옷까지 다 젖어 있어 도저히 이 상태로는 모임에 참석할 수 없을 것 같아 택시를 잡아타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순간 어머니와 마주치고 말았다.

“오늘 모임이성 늦으켄 허지 안허연?”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댓구도 하지 않은 채 얼른 들어가려는데 “그 바지 무사 경해시 작산 것이 칠칠치 못허게 그게 뭐냐?”하며 잔소리를 늘어 놓으셨다. 난 내 자신에게 화가 너무 나 한마디 해명조차 하기 싫어 얼른 옷을 갈아입고 어머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친구들 모임 장소로 갔다.

도착해 보니 한사람 빼고 다들 와 있었다. 두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그런지 첫 술잔을 기울이며 모두들 반가워 웃음꽃이 만발했다.

나도 모두 반가웠지만 낮에 있었던 일과 모임 오기 전 어머니의 잔소리가 마음에 걸려 티를 내지 않으면서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요령껏 티 안 낸다고 했지만 친구 한 명이 “무슨 일 있냐? 어째 안색이 별로 안 좋다.”고 묻는다.

“아니 그냥 더위 먹어서 그래. 신경 쓰지 말고 마시자. 자, 건배” 하며 일차를 잘 마무리 하고 이차를 가려고 식당 밖으로 나와 어디를 갈까 하고 의논하며 커피를 마시다 서로들 장난치다 나에게 안부를 묻던 친구가 장난을 걸어 왔다.

순간 낮의 일을 생각하던 난 이성을 잃고 내 안경을 벗으면서 그 친구에게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 난 일이라 그 상황은 어떻게 정리가 안 되었고, 그 친구도 놀란 나머지 자기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며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아무 일도 아닌 일에 싸움은 시작됐고 그 친구는 내 얼굴을 향해 여러 번의 주먹을 더 날렸다. 나는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 저항도 않고 가만히 맞고만 있었고 옆에서는 말리느라 한참을 소란스러웠다.

서로가 화해를 못한 채 이차를 가게 됐고 난 일부로 그 친구의 옆자리로 가서 앉고는 화해의 술잔을 권하며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자 그 친구도 “그러니까 아까 내가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물어봤잖아. 이놈의 날씨가 하도 덥다 보니 서로가 조금씩 참았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친구야.”하며 화해를 했고 어색하던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모임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아침에 택시기사님이 했던 말만 기억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친구야 더위 먹고 순간 이성을 잃었던 내가 미안했고 다 안다. 내 얼굴을 때리던 너의 주먹에는 힘이 실어 있지 않았다는 걸 내가 안단다.'<헤드라인제주>

이성복 수필가 그는...
 
이성복님은 제주장애인자립생활연대 회원으로, 뇌변병 2급 장애를 딛고 지난 2006년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가을호에서 수필부문 신인상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수필가로 등단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원으로 적극적인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이성복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이성복 객원필진/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