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편견 극복,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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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편견 극복,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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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세상] (3) 영화 '내 이름은 칸'
영화 '내 이름은 칸' 공식사이트 캡처. <헤드라인제주>

잘 알려진 인도 영화 <내 이름은 칸>(감독 카란 조하르, 2010)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무슬림 ‘리즈완 칸’(샤룩 칸 역)에 관한 이야기다. ‘무슬림’과 ‘장애’. 칸에게 붙은 두 개의 꼬리표는 영화 속에서 많은 갈등 상황을 낳는 동시에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한 순수한 인간이 세상의 편견을 극복해 나가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감동과 함께 깊은 성찰의 기회를 준다.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졌지만 자폐아였던 인도 출신 칸은 어릴 때부터 차별 속에서 자랐다.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애정을 준 사람은 어머니 라지안 칸뿐. 당시 힌두교도들로부터 피해를 입은 이슬람교도들이 퍼붓는 욕을 그대로 따라하는 칸에게 어머니는 말한다. “아들아, 꼭 기억하렴. 이 세상 사람들은 단 두 종류뿐이야. 좋은 행동을 하는 좋은 사람, 나쁜 행동을 하는 나쁜 사람. 하는 행동이 다를 뿐, 다른 차이는 없단다.” 어머니의 말을 가슴속에 새긴 칸은, 세상에 대한 어떤 편견도 갖지 않은 순수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성인이 된 칸은 어머니가 죽은 이후 동생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가고, 거기서 애 딸린 이혼녀이자 힌두교도인 만디라(까졸 역)를 만난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어 노란색과 소음에 못 견뎌하던 칸은 자신을 돕고 이해해준 만디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칸의 엉뚱하면서도 순수한 심성에 끌린 만디라는 마침내 그의 끊임없는 결혼 공세를 받아들인다. 만디라는 힌두교도였지만 종교는 그들을 갈라놓을 중요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영화 '내 이름은 칸' 공식사이트 캡처. <헤드라인제주>

행복하게 살던 이들을 갈등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2001년 발생한 ‘9.11 테러’였다. 이후 미국내 이슬람 혐오주의가 극에 달하면서 칸의 가족은 끔찍한 비극을 겪는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밝히지 않는다). 격분한 만디라는 모든 것이 무슬림인 당신과 결혼했기 때문이라며, 미국 대통령 앞에서 자신의 이름은 칸이고, 자신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때 집에 돌아오라고 말한다. 칸은 만디라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 그때부터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한 칸의 여정이 시작된다.

“My name is Khan. and I’m not a terrorist.” 여행하는 내내 칸은 이 말을 되뇌인다. 그의 이름은 무슬림 성을 따른 ‘칸(khan)’이지만 9.11테러를 저지른 무슬림들과는 다르다. 칸은 같은 무슬림 중에서도 폭력을 사용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다. 뿐만 아니다.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아프리카 기금모금 행사가 기독교인들을 위한 행사임을 알고 난 후에도, 기꺼이 자신의 돈을 내놓는다. “아프리카에도 기독교인은 없거든요”, 사람이 사람을 돕는 데 종교가 뭐가 중요하냐는 것이 그의 반문이다.

칸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져버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종교적 틀 안에서 사람들을 구별하지도 않는다. 그가 인간을 보는 관점에는 오직 ‘좋은 행동을 하는 좋은 사람’과 ‘나쁜 행동을 하는 나쁜 사람’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그는 그저 힘들 때 자신을 꼭 안아주었던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다. 그 대상은 힌두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미국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상관없다.

영화 '내 이름은 칸' 공식사이트 캡처. <헤드라인제주>

세상의 많은 갈등은 ‘나와 다른 남’, ‘우리와 다른 남들’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다름’은 쉽게 ‘틀림’으로 변질되어 차별과 배척으로 이어지곤 한다. 지금 현재,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습격하고 600여명에 달하는 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대참사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정치, 경제, 종교 등 온갖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겠지만, 그 저변에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이 깔려 있다. 자신들이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는 민족이라 믿는 유대인들이 보기에,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그들이 정한 ‘인간’ 영역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흑인들 역시 백인에 의해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취급당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허클베리 핀’에서, 백인 소년 허클베리 핀은 고민 끝에 흑인 노예 친구였던 짐을 돕기로 한다. 마침내 그는 흑인을 ‘노예’가 아닌 ‘친구’로 생각하고, 자신과 다르지만 같은 ‘인간’으로 인정했다. ‘우리’라는 영역의 확장, 나와 다른 남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비로소 도덕적 진보는 이뤄진다.

칸은 일체의 편견에서 벗어나 ‘선’이라는 단 하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다. 장애가 있고 민족, 인종, 종교가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좋은 행동을 하는 좋은 사람’이면 될 따름이다. 당장 우리 일상에서도 장애인, 동성애자, 노숙자 등 우리와 조금 다른 사람들에 대한 편견 어린 시선이 존재한다. 연대의 시작은 그런 사소한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무슬림’이자 ‘자폐인’ 칸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헤드라인제주>

영화 '내 이름은 칸' 공식포스터. <헤드라인제주>

<김소영 인턴기자 / 저작권자 ⓒ 헤드라인제주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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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물 2014-07-24 10:58:23 | 14.***.***.232
요즘 시대에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군요.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소양이 우리 안에서도 많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