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잘못 만난 죄...4.3 흔적 없어도 상흔은 여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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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잘못 만난 죄...4.3 흔적 없어도 상흔은 여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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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도민연대, 6일 수형생존자와 전주형무소 순례
세월 따라 흔적 감춘 전주형무소..."추가진상조사 시급"

비단 제주도 뿐만이 아니다. 아스라이 스러져간 4.3영령들은 전국 구천에 깃들어 있다.

4.3사건 당시 제주에는 형무소가 없어, 불법 군법재판에서 '제멋대로' 형기를 선고받은 수형인들은 부산부터 개성까지 전국의 형무소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다. 다만 대부분 6.25전쟁에 즈음해 각 형무소에서 진행된 대규모 총살로 말미암아 숨진 것으로 파악될 뿐이다.

아직 잠들지 못한 4.3의 역사는 언제쯤 완전히 해결될 수 있을까.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공동대표 김평담, 양동윤, 이하 4.3도민연대)는 6일 전주형무소 수형생존자들과 함께 전주형무소를 찾아, 완전한 4.3해결을 위한 전국4.3유적지 순례를 진행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수형생존자는 김평국(83) 할머니, 김영숙(84) 할머니, 오희춘(82) 할머니, 박춘옥(86) 할머니 등 총 4명. 김경인(82) 할머니도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건강상 큰 아들인 이영창(64) 씨가 대신 참석했다.

왼쪽부터 김경인(82) 할머니 큰 아들 이영창(64) 씨, 오희춘(82) 할머니, 박춘옥(86) 할머니, 김영숙(84) 할머니, 김평국(83) 할머니.<헤드라인제주>

# 마지막 흔적마저 사라진 전주형무소..."진상조사 시급"

추미애 의원이 공개한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4.3사건 당시 체포돼,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두 차례의 군법회의에 회부된 제주도민은 총 2530명이다.

이 중 1차 군법에 48명, 2차 군법에 84명 등 132명의 제주여성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지역별 분포로 보면 제주읍 67명, 애월면 13명, 조천면 11명, 한림면 1명 등 제주시권 출신이 92명, 서귀면 8명, 남원면 13명, 대정면 4명, 성산면 1명, 안덕면 2명, 중문면 3명, 표선면 10명 등 서귀포시권 출신이 40명이었다.

4.3도민연대가 밝힌 교도관의 증언에 따르면 75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전주형무소에는 당시 1900여명의 수형인들이 이송돼 와 이감되지 않고 바로 처형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6.25전쟁 후에는 전주형무소, 인근 황방산 등지에서 대규모 학살이 이뤄졌다고.

제주4.3 전주형무소 수형생존자 할머니들이 흔적 하나 남지 않은 옛 전주형무소 터를 둘러보고 있다.<헤드라인제주>
김종혁 4.3도민연대 정책위원장이 수형생존자 박춘옥(86) 할머니께 없어진 옛 전주형무소 담장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울면서 갔던 자리 웃으면서 가는데 무슨 걱정이야. 살았으니까 가지, 죽었으면 갈 수 있었겠나. 이제 아흔이 다 돼 가는데 내년에 죽으면 언제 볼 수 있을는지. 66년 만인데 흔적이라도 봐야지..."

1948년 4월 3일로부터 66년이 흐른 지금, 할머니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전의 전주형무소 터는 온데간데없이 흔적을 감췄다. 지난 2007년 순례 때만 해도 '전주형무소 터' 표식과 15m 가량의 빨간 전주형무소 외벽은 남아 있었다.

특히 마을의 축대로 활용되던 형무소 외벽은 작년 가을께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시멘트로 뒤덮였다. 이제 전주형무소를 찾을 수 있는 이정표는 오직 수형생존자들의 기억 뿐이다.

이에 4.3도민연대는 "국가기록원 기록이 존재하고, 수형희생자들이 생존해 있는 지금 전주형무소 희생자 관련 진상조사, 즉 추가 4.3진상규명사업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 "우리도 나이 들어 절도 못할 지경...이 잔 받고 고이 잠들라"

제주4.3 전주형무소 수형희생자를 위한 진혼제를 허망하다는 듯 지켜 보는 수형생존자 김영숙(84) 할머니와 박춘옥(86) 할머니.<헤드라인제주>
제주4.3 전주형무소 수형생존자 김영숙(84) 할머니의 셋째 딸 김덕희(59) 씨가 제단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꽃보다도 더 고왔던 님이시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자식 남기고 막무가내로 끌려 나와 눈물 속에 보낸 님이시여. 오늘 이 자리에는 님들과 고락을 같이 했던 벗들 왔나이다"

이어 옛 전주형무소의 한 가운데로 추정되는 지점에 4.3영령을 기리기 위한 제단이 차려졌다.

이날 진혼제에는 수형생존자들과 4.3도민연대 회원들을 비롯, 4.3진상조사단연구원, 노래패 청춘, 4.3교육자 등이 참석해 분향해 향 안개를 짙게 피올렸다.

양용해 한국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의 추도사를 대독한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는 "4.3특별법 제정,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과, 국가추념일 지정 등의 성과로 인해 많은 이들이 4.3사업이 다 이뤄진 것으로 생각한다"며, "아직 진상규명과 법적명예회복의 역사적 과제는 남아 있다"고 전했다.

이어 김영란 시인이 수형생존자인 김경인 씨를 만난 후 썼다는 '이젠 몰라, 어떵사 해나신지' 를 낭독하자 순례단 중 몇몇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제주4.3 전주형무소 수형희생자를 위한 진혼제 제단 앞에 절을 하는 수형생존자 할머니들.<헤드라인제주>

"너무 억울하게 생각말고 이 잔 받고 고이 잠드소서. 우리는 살아 남았는 데도 일어 서서 절도 못할 지경입니다. 너무 늙어서..."

진혼제가 봉행되는 내내 허망한 표정으로 제단을 바라보던 수형생존자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차례가 되자 이내 곧 굽은 허리를 어렵사리 지팡이로 짚어 펴 냈다.

자신도 나이가 들어 절도 못하겠다고 푸념 섞인 말을 늘어 놓던 김평국 할머니는 그저 짙은 향 연기 속 전주형무소 터를 한번 둘러볼 뿐이었다.

# "죄가 있다면 시대를 잘못 태어난 죄...이런 세상 다신 오면 안 돼"

전주형무소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오희춘(82) 할머니와 김영숙(84) 할머니는 형무소 수감 이후 66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헤드라인제주>

"아이고 김영숙이라고 하니까 알겠네. 어쩐지 이름이...얼굴은 긴가민가 한데 이름은 기억나. 우리 뜨개질 일 하면서 벗 했었지. 일찍이 10년 전에 봤으면 알아 보기도 쉬웠을 텐데..."

오희춘 할머니는 이날 느즈막히 공항에 도착해 급히 자리를 옮겼던 탓에 전주형무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김영숙 씨와 대면하지 못했다.

전주형무소 코앞에 와서야 몇 마디 나누던 두 할머니는 그제서야 한 방에서 같이 지낸 형무소 동기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들의 떨리는 눈동자와 마주 잡은 손은 주위를 숙연케 하기에 충분했다.

오희춘 할머니는 "그 때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니까 하루하루 연명하느라 바빴어. 죄가 있다면 시대를 잘못 태어난 죄일 거야. 끔찍한 일이지. 이런 세상은 다시는 오면 안 돼..."라고 말끝을 흐렸다.

4.3사건 당시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던 수형생존자들의 66년 만의 동행길은 이렇게 마무리 되어 갔다.

전주형무소 순례를 마친 4명의 수형생존자 할머니 모두는 매해 한두 번씩 만나 사는 얘기를 나누기로 약속했다. 서로의 지난 66년 동안의 삶도, 앞으로의 삶도 너무나 궁금한 이들이다.

그러나 66년 전 4.3의 이야기는 흐르는 세월 속 그 향기만 더욱 진해지고 있다.<헤드라인제주>

제주4.3 전주형무소 수형생존자인 (왼쪽부터) 박춘옥(86) 할머니, 김영숙(84) 할머니, 오희춘(82) 할머니, 김평국(83) 할머니가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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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형무소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오희춘 할머니(82)와 김영숙 할머니(84)가 이날 진혼제에 참석해 66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lt;헤드라인제주&gt;
전주형무소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오희춘 할머니(82)와 김영숙 할머니(84)가 이날 진혼제에 참석해 66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양용해 한국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의 추도사를 대독하고 있는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lt;헤드라인제주&gt;
양용해 한국전쟁희생자유족회 회장의 추도사를 대독하고 있는 양동윤 4.3도민연대 공동대표.<헤드라인제주>

김영란 시인이 수형생존자인 김경인 씨를 만난 후 쓴 &#039;이젠 몰라, 어떵사 해나신지&#039;를 낭독하고 있다.&lt;헤드라인제주&gt;
김영란 시인이 수형생존자인 김경인 씨를 만난 후 쓴 '이젠 몰라, 어떵사 해나신지'를 낭독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제주4.3도민연대 회원들이 제주4.3 전주형무소 수형희생자를 위한 진혼제를 봉행하고 있다.&lt;헤드라인제주&gt;
제주4.3도민연대 회원들이 제주4.3 전주형무소 수형희생자를 위한 진혼제를 봉행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제주4.3도민연대 회원들이 제단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lt;헤드라인제주&gt;
제주4.3도민연대 회원들이 제단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수형생존자인 김영숙 할머니(84)의 셋째 딸 김덕희(59) 씨와 김경인 할머니(82)의 큰 아들 이영창(64) 씨.&lt;헤드라인제주&gt;
수형생존자인 김영숙 할머니(84)의 셋째 딸 김덕희(59) 씨와 김경인 할머니(82)의 큰 아들 이영창(64) 씨.<헤드라인제주>

제주4.3도민연대 회원들이 제주4.3 전주형무소 수형희생자를 위한 진혼제가 끝난 후 &#039;잠들지 않는 남도&#039;를 부르고 있다.&lt;헤드라인제주&gt;
제주4.3도민연대 회원들이 제주4.3 전주형무소 수형희생자를 위한 진혼제가 끝난 후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르고 있다.<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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