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제주의 사회상과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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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제주의 사회상과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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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21)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조선 중기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조선 사회가 크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제주는 온갖 부조리와 억압에 저항해나가는 변화의 시기였다. 혼란한 시대를 거치며 봉건 사회의 해체 과정에서 새로운 변혁 세력으로서 경영형 부농이 시작된다. 그간 조선에서는 최대 소비층인 양반이 대체로 농촌에 거주하면서 오랫동안 자급자족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고 근교 농업이 발달하면서 곡물과 상품 작물의 수송을 중심으로 포구와 도시의 시장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세기에는 장시가 전국에 1,000여 곳으로 늘어났다. 장시는 대체로 5일에 한 번씩 열렸는데, 화폐를 사용하거나 물물교환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졌다. 17세기 이후에는 대동법의 시행과 화폐 경제의 확산, 인구의 증가 등으로 도시화가 촉진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곳은 한양으로 한양의 인구는 18세기 이후 약 20만∼30만여 명에 이르는 도시가 형성된다. 하지만 수도를 제외하고는 도시화의 경향이 미미해서, 인구 2만 명을 넘긴 개성과 평양을 제외하면 인구 1만 명이 넘는 도시는 10여 곳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한반도에서도 자본주의 맹아가 트기 시작하는 괄목할만한 과정이기도 하다. 변화과정에서 경영형 부농층의 신분상승 현상이 있었고 이러한 신분의 변동은 역사 발전과정에서의 봉건제의 붕괴 과정이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농업 경영에서 기술 개선, 농지 소유뿐 아니라 임노동 고용 등을 통해 상업적 농업을 전개함으로써 부를 축적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서 광범하게 그 세력이 형성되어갔다. 양란 이후 조선에는 토지 제도와 농업 문제를 중심으로 농촌 경제의 변동에 따른 사회 변화의 측면을 폭넓게 진행된다.

임진왜란기에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전마(戰馬)를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산마장 개척자인 김만일(金萬鎰)이었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제주에는 1601년에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이 발생했고, 호남원병이 폐지되고 말았다.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은 1589년 정여립 사건에 가담했던 소덕유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말을 산다는 구실로 청포(靑布)를 갖고 길운절과 함께 제주도에 들어와 일으킨 사건이다. 호남 원병은 본래 제주 방어를 위해 전라도에서 제주에 파병된 군인들로, 군인 수의 감소로 인해 제주에 파병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제주는 전기와 같이 1목 2현 행정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그 이하는 면리제(面里制)로써 수령(지방관)을 통한 간접 통치가 이루어졌다. 관청 조직은 수령과 그 예하 조직으로서 6방 체제의 이청(吏廳), 군사기구인 장청(將廳) 및 지방 행정의 보좌 기구인 향청(鄕廳)으로 삼분되었다. 그 밑에는 면리임(面里任)과 최하 단위인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연결되었다. 극심한 생활고와 고역 등으로 출륙하는 도민들의 수가 증가되면서 조정에서는 제주도민들의 출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1629년(인조 7)부터 출륙 금지령(1629∼1823)을 내리기도 했다. 

1813년(순조 13) 12월에 제주인 양제해는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자극받아 변란을 도모했다. 조선 후기 제주 지방군은 아병(牙兵)과 마대(馬隊), 속오군으로 구성되었다. 제주도의 수취 체제는 토지를 대상으로 하여 곡물을 부과하는 조세인 전세(田稅), 제주영에 소속된 영둔전에 대한 세금인 영전세, 산전(山田)을 새로 일구어서 세금을 거두는 가경세, 그리고 장세미, 화전세 등이 있었다. 제주도에는 예외적으로 대동법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정 1인당 매년 전미(田米)(좁쌀) 5되씩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신 받았다. 제주인들은 요역과 군역에 시달려야 했으며, 환곡(還穀) 운영에 따른 폐단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환곡 운영을 위해 사창(司倉)과 민고(民庫)를 설치·운영하였다. 17세기 중엽의『탐라지』에는 제주목에 제주사창, 동별창(별방), 서별창(명월), 정의현에 정의사창, 정의 서별창(서귀), 대정현에는 대정사창 등 6개 창고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제주 내의 환곡 제도는 부실하게 운영되었다. 제주 고을 수령들은 자비곡(自備穀)을 마련한 다음, 그것을 본전으로 하여 민고를 설치·운영했는데, 진휼창, 보민창, 고마고, 목자고, 견역고, 장세고 등이 대표적이다. 18세기 말 흉년과 가뭄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김만덕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육지에서 쌀을 사다가 구휼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제주는 여전히 유배 지역이었다. 왕족이나 고관 현직에 있었던 사람은 주로 제주성 내에 안치되었으며, 대정현에는 광해군 때의 정온, 헌종 때의 김정희, 정의현에는 광해군 때의 김덕룡, 인조 때의 원종, 제주목에는 중종 때의 김정, 명종 때의 보우, 인조 때의 광해군, 숙종 때의 송시열, 김춘택, 고종 때의 최익현, 김윤식, 박영효 등이 유배되었다. 제주도에 있어서 19세기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자각의 시기이며 온갖 부조리와 억압에 저항해나가는 변화의 시기였다.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태동하고 있는 가운데 전국 곳곳에서 오랫동안 억압당했던 농민들의 울분이 민란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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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秋史)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자료=이성돈 객원필진.

제주도에서도 1862년 강제검, 김흥채 등이 주동한 임술(壬戌)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1890년에 김지가 주동한 경인(庚寅) 민란, 1896년에는 강유석과 송계홍 등이 주동한 병신(丙申) 민란, 1898년에는 방성칠이 주동한 무술(戊戌) 민란, 1901년에는 이재수의 난(신축 천주교란)이 발생했다. 특히 이재수의 난은 프랑스 함대, 일본 함대까지 끌어들여 한때 제주도에 전운이 감돌기도 했다. 19세기 말엽 제주도에 대한 일본 어업의 침략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이때 한·일간에는 조일 통상 장정(朝日通商章程)과 조일 통어 장정(朝日通漁章程)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일본 어선들이 제주 근해에 나타나 조업을 하면서 행패를 부렸고, 이에 제주도민들은 거세게 집단 항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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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태 목사의 지영록(왼쪽)과 최부의 표해록.

조선 후기 제주는 사면의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야 했던 제주인들은 뜻하지 않은 바람을 만나, 다른 지역으로 표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주 부근을 항해하던 선박이 뜻하지 않은 바람을 만나거나 파도가 덮쳐 제주에 표도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제주 주위의 중국, 일본유구(오키나와) 주민뿐만 아니라 서양인이 제주에 표류하기도 하였다. 제주와 서양과의 첫 만남은 1627년(인조 5년) 네덜란드의 벨테브레(J.J.Weltevree)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멜표류기를 통해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은 조선 효종 4년(1653년) 8월 16일 상선 ‘스페르베르’를 타고 대만 해협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대정현 해안에서 배가 난파돼 제주에 표착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조선 후기 제주를 정리해보면 극심한 생활고와 고역에 생존권 확보를 위한 민란과 함께 정치적인 유배지, 외부인 표류지 등 새로운 변화를 부르는 변곡점이 되는 시기이다.

※ 참고자료: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사회과학출판사(2012), <조선농업사>(원시∼근대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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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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