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에 몰려든 사상 최대 인파 원천봉쇄망 무력화...마침내 '6.29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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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에 몰려든 사상 최대 인파 원천봉쇄망 무력화...마침내 '6.29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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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15] 6월26일 대규모 가두시위와 '6.29선언'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 함성은 제주의 여름도 뜨겁게 달궜습니다.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침묵하던 이들의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성과와 보람은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함성의 울림은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6월항쟁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제주사회의 새로운 변혁의 동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드라인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합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됩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보고자 합니다. <헤드라인제주>

▲ <6월항쟁 20주년 제주사업추진위원회 DB>

[15] 6월26일 대규모 가두시위와 '6.29선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전국적으로 평화대행진을 벌이겠다고 사전 예고된 1987년 6월26일. 국민운동본부가 없어 학생지도부 중심으로 연일 가두시위를 전개하던 제주에서도 국민운동본부의 평화대행진 일정에 맞춰 6월26일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한다.

가두시위 계획이 확정되자 학생들은 6월25일 제주시내 곳곳에 유인물을 부착하며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가고 있었다. 최루탄으로 무장한 경찰력도 성난 시민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경찰은 6월26일 평화대행진을 무산시키기 위하여 노골적인 방해책동에 나선다. 전날 밤 유인물 살포가 끝난 후, 황인호(당시 제주대 제적, 1986년 12월 민정당사 화염병 투척사건으로 구속됐다가 1987년 5월 출소) 등 6명을 전격 연행했다.

황인호씨의 얘기다.
"25일 유인물을 뿌리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밤 12시가 넘어서 경찰이 들이닥쳤어요. 잠깐 조사할 것이 있다며 제주경찰서로 연행해갔죠. 그런데 경찰서에 가서는 별다른 조사도 하지 않더라구요. (26일) 집회만 끝나면 보내주겠다며 가만히 있으라고 하더라구요. 사전 격리차원의 연행이라고 직감했죠."

드디어 전두환 정권이 '6.29 항복선언'의 계기가 된 6월26일 오후. 기말시험을 전면 거부하고 연일 가두투쟁에 나서고 있는 제주대학교 학생들은 이날 역시 야외음악당에 모여 출정식을 가졌다. 출정식을 마친 2000여명의 학생들은 제주대학교 진입로를 따라 다시 시내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제주대 입구 외솔나무 근처에 배치돼 있던 전경들은 학생들이 대규모로 몰려 나오자 잠깐 대치를 할 뿐, 이렇다할 힘을 쓰지 못했다. 경찰은 이날 제주대 입구와 시내 가두투쟁이 예상되는 광양로터리와 남문로터리, 중앙로터리 일대에 경찰력을 대거 배치하고 차량을 전면 통제시키는 등 철옹성같은 원천봉쇄에 들어갔다.

하지만 제주대 입구가 뚫리자 제주시내 봉쇄망은 줄줄이 완전 무너졌다. 기세등등한 학생들은 광양로터리로, 남문로터리로, 중앙로터리로 뛰쳐나오며 '직선제 개헌'과 '독재타도'의 함성을 드높였다.

▲ <제주 6월항쟁 관련 보도사진, 제대신문 1987년 7월10일자>
오후 5시 학생들은 중앙로와 남문로터리를 중심으로 도로를 완전 점거해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제주대 학생을 중심으로 연좌농성을 벌이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이번에는 '여학생 부대'가 합류했다. 다름아닌 제주간호보건전문대학 학생들이 시위에 합류한 것이다. 또 제주전문대학과 제주교육대학 학생들도 시위대열에 합세했다. 뿐만 아니라 연도에 있던 시민들도 이에 가세했다.

제주도내 4개 대학 학생들이 이날 집회에 전격 참여하게 된 배경과 관련해 송형관 당시 제주대 총학생회장의 설명이다.
"처음 가두진출한 후, 시위가 범국민적 항쟁으로 전개되어 가자 다른 대학에서도 시위참여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한 분위기 속에 다른 대학 총학생회장들을 직접 만나게 됐죠. 현 시국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호헌철폐와 직선제개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내용이었죠. 그래서 가두시위에 함께 참여하자는 의견일치 뿐만 아니라 4개 대학 학생회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자는 얘기까지 발전을 보게 됐어요. 26일 집회에서는 특히 간호보건전문대학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어요."

▲ <제주 6월항쟁 관련 보도사진, 제대신문 1987년 7월10일자>
#삽시간에 1만여명으로 불어나..."할머니들까지도 오셨더라구요"

오후 7시, 이에따라 시위군중은 삽시간에 1만여명(당시 제대신문에서는 7000명으로 보도했으나, 실제 집회현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1만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으로 불어났다. 시위 군중들은 태극기와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중앙로에서 남문로, 광양로터리 일대를 행진했다.

시위 군중은 4.3이후 제주에서는 전무후무한 대규모 인파였다. 김정열 당시 제주대 써클연합회장의 얘기다.
"남문로터리쪽에서 중앙로쪽을 바라보니까 남문로터리에서 중앙로 현대약국을 지나 굽은 도로선상까지 사람으로 가득했어요. 시위대열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차도 인도할 것 없이 꽉 찼어요. 신문에 보니까 7000명이라고 나왔던데, 제가 보기에는 1만명은 훨씬 넘었어요. 제주 사람들 한 집에 한명씩은 전부 참여했다고 봐야죠. 할머니들도 많이 나오셨더라구요. 4.3이후 처음으로 자기 스스로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났어요."

시위대열의 선두에서는 송형관 총학생회장과 송영란 총여학생회장, 김정열 써클연합회장이 트럭에 올라 전두환 독재정권의 장기집권음모 획책에 대해 강력히 성토하며 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거리를 꽉 메운 인파 때문에 이들의 연설은 뒷쪽까지 전해지지가 않았다.
시위대열 앞쪽에서는 핸드마이크와 확성기를 통해 연설 내용이 전파되었으나 대열이 너무 길어 뒷쪽 대열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에 대열 앞쪽에서는 지도부의 선동에 따라 구호를 외치고, 뒷쪽 대열에서는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의 구호를 반복해서 외치며 제주의 여름밤을 뜨겁게 달궜다.

▲ 1987년 6월26일 중앙로에서의 집회전경. <제주신문 1987년 6월27일자 보도사진>
#데모하는 자식 데리러 중앙로에 온 부모도 '한 마음'

이날 집회에서는 소문에 소문을 듣고 '데모하는 자녀'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중앙로로 발걸음을 한 시민들도 많았다. 그러나 집회의 분위기에 짓눌린 때문일까. 정작 현장에 와서는 자식들을 억지로 데리고 가려는 부모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85학번의 한 인사의 얘기다.
"데모하는 자식을 데리고 가기 위해 중앙로에 온 부모들이 많았어요. 한 부모는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데모하느냐'며 자식의 손을 잡고 데리고 가려고 했어요. 이때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가서 설득했어요. 한참 얘기를 듣던 그 부모는 가두시위를 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 이해가 가던지 더 이상 억지로 끌어내려고 하지 않더라구요.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어떤 부모는 자식을 데리러 왔다고 말하고는, 데리고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시위하는 모습이 재미있는지 유심히 구경하다가 나중에는 노래와 구호소리에 손뼉을 치고 박자에 맞춰 발을 움직이는 모습에 얼마나 웃었는지..."

오후 8시, 중앙로터리에서는 시국대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는 운동권진영의 '선수'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 특징이었다. 연사로 나온 시민들은 저마다 호헌철폐와 민주헌법 쟁취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최루탄을 추방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시민도 있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제주 민주화운동은 명실상부 '대중과 함께하는 투쟁'의 성숙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시민은 빵을 들고 와 시민들을 격려했다. 어떤 시민은 요구르트와 음료수를 사들고 오기도 했다. 시위대를 격려하는 일에는 아까운 것이 하나 없었다.

한 시민은 시위학생들이 경찰에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우려해 손수건 등으로 얼굴을 가리자 인근 약국에 가서 마스크를 듬뿍 사고와 학생들에게 건네기도 했다.

이날도 어김없이 계속된 '민주성금함'에는 시위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정성어린 손길이 이어졌다.
시국대토론회가 끝난 후에는 제주도내 3개 대학 학생회의 성명서가 낭독됐다. 제주대학교 고창훈 교수(행정학과)의 양심선언서도 대독됐다. 최루탄피해자 사후대책위원회의 성명서도 낭독됐다.

연사들은 저마다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군부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최루탄 추방', '장기집권음모 분쇄', '언론자유보장' 등을 주장했다.

경찰은 시위가 평화적으로 전개되자 더 이상 이를 가로막으려 하지 않고 경찰력을 한쪽으로 배치시켜 지켜보기만 했다. 다음날인 27일 새벽 1시30분까지 계속됐던 시위는 전날 연행됐던 6명이 풀려나오자 자진해산했다.

평화대행진 제주대회가 26일 하오 8시 학생.시민 등 1천3백여명(경찰집계)이 참가한 가운데 중앙로터리에서 열렸다.이날 대회는 제주대 학생들이 주도했는데 대회를 마친 후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내 중앙로.남문로를 따라 광양로터리까지 행진했다.시위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됐던 6명이 풀려나오자 27일 0시40분에 자진해산했다.경찰은 26일 하오 5시부터 중앙로 일대의 차량통행을 전면 통제하는 등 원천봉쇄에 들어가 한때 학생들과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으나 학생들이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자 이들의 행진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한편 서귀포시내에서도 이날 하오 천주교 복자교회 앞에서 1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시위를 벌였다.<제주일보 1987년 6월27일자>

▲ <제대신문 1987년 7월10일자>
민주화 열기를 하나로
도심서 5일간 '민주헌법쟁취' 시위.농성 벌여

올해 본교 학생운동은 개강초 학원자율화 쟁취를 위한 일상투쟁으로부터 발전적 단계로 도심 가두시위를 기도하는 등 전면적인 정치투쟁을 벌여 학원민주화에서 사회민주화로까지 단계적 투쟁노선을 밟았다.
상반기 학원의 모습은 중간고사 거부라는 대중의식차원의 전체적 문제를 선택하여 지난해말 총장실 점거사태 관련 부당징계 철회와 4.3사건 대자보 관련 연행학생 석방 등 학원자율화쟁취를 위한 대중응집역량으로 대중의식 고양에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으며 궁극의 목표를 향한 부분적 단계현상을 보였다.
4.13 호헌조치와 6.10 대통령후보 지명전당대회와 같은 정국의 흐름에 조음하여 지난 6월21일부터 26일까지 볼 예정이었던 기말고사를 거부함과 동시에 민주화 열기에 동참, 도심 가두진출 전반적으로 비폭력.평화적 투쟁으로 사회민주화를 위한 전면적 정치투쟁의 대응양태로 나서게 되었다.
따라서 본교 학생운동의 양상은 학원자율화 쟁취를 위한 일상투쟁에서 정국의 흐름에 따른 정치투쟁까지 수행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비폭력.평화적 투쟁을 통해 대중응집 역량확대와 시민의식 고양에 기여했으며, 내형적으로는 투쟁방향의 궁극적 목표를 향한 부분적 단계상황을 연결시키게 됨으로써 대중들에게 응집의식을 표면적으로 구체화시켜줘 정치투쟁의 중요성과 자신감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지난 6월21일부터 6일동안 계속된 도심 가두투쟁을 되돌아 보며 정리해 보고자 한다.
<6월21일>
첫날인 6월21일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가투의 시발은 오후 1시경 일부 학과에서 기말고사 거부와 가투에 동참할 의지표명의 대자보를 게재하면서 학생 3백여명이 시내까지 약 8km거리를 비폭력 가투를 시작했으며 오후 2시경 사전원천봉쇄 돌파해 중앙로 종합시장 입구에 미리 집결한 학생 3백여명과 합류해 오후 3시경부터 남문로터리에서 학생 및 연도시민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범도민시국대토론회를 벌이고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독재타도' '비폭력 평화적 시위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청앞 민정당사까지 가두행진을 전개한 후 오후 6시50분경 광양로터리에서 자진 해산했다.
<6월22일>
둘째날인 6월22일 거의 전 학과에서 기말고사 거부와 가투에 동참할 의사가 개진되면서 오후 1시경 야외음악당에 모인 학생 2천여명은 제2차 출정식을 마치고 오후 1시40분경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시내까지 약 8km거리 행진을 시작하여 오후 3시15분경 광양로터리에 도착후, 서사로.중앙로.동광양로방면 3진으로 나눠 가두행진을 하고 오후 4시30분경 다시 합류한 학생 2천여명 및 시민 1천여명은 중앙로터리를 점거하여 범도민시국대토론회를 열었으며, 오후 11시경 시위 농성자를 위한 시민모금 등 시민들의 대거 호응으로 연좌농성은 오후 11시30분까지 계속되었으며 학생 1백여명은 중앙성당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6월23일>
세째날인 6월23일 오후 1시30분경 성당농성자와 합류키 위해 3차 출정식을 마친 학생 4백여명은 교수아파트 부근 및 교문 앞에서 가두진출을 저지하는 전경 2개 중대와 대치하여 오후 6시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도심 가두진출에 실패해 결국 개인별로 집결지에 모이는데 성공, 오후 7시경 시내중앙로에서 총학생회장 및 별동대 30여명이 시위를 벌이던 중 총학생회장이 연행되었다.
한편 중앙성당 농성자 중 가두진출을 시도하다가 총학생회 부회장 및 학생 11명이 연행되었다.
오후 7시30분경 중앙로에서 '연행학생 석방' '비폭력시위 보장' 등을 외치던 학생 및 시민들은 경찰측의 최루탄 난사로 해산되었다가 산발적 시위를 벌이던 중 오후 9시경 동문로터리에서 중앙로 방면으로 학생 2천여명과 시민 1천여명이 전경과 대치하여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몸싸움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고 비폭력.평화적 행진으로 중앙성당 농성자와 합류했으며 오후 11시30분부터 1시간 40여분동안 중앙성당에 모인 학생 및 시민 1천여명은 범도민시국대토론회를 개최하고 '연행학생 석방'을 경찰측에 요구, 새벽 1시10분경 연행자 23명 전원 석방과 함께 농성을 풀고 해산하였다.
이날 오후 10시20분경 중앙로터리에서 경찰측의 최루탄 난사로 인해 투석전과 화염병 투척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나 학생 및 시민들이 비폭력 시위를 고수 평화적인 연좌시위 및 행진으로 끝맺었다.
<6월24일>
네째날인 6월24일 새벽 2시경 중앙성당 농성자들은 농성을 풀었으며 오후 5시경 시민 및 학생 5백여명은 중앙성당에 모여 26일 열릴 범국민 평화대행진의 강행을 결정하고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범도민 민주화 투쟁일지'를 시내 각 곳에 부착한 후 해산하였다.
<6월26일>
다섯째날인 6월26일 학생 6백여명은 중앙로부터 광양로까지 사전 원천봉쇄된 경찰 저지선을 뚫고 중앙로.남문로터리를 점거, 농성을 벌였으며 오후 7시경 시위대는 7천여명선으로 불어나 중앙로터리에서 광양로터리까지의 평화의 대행진에 대거 참여 시국대토론회를 열어 이 자리에서 도내 '3개대학 성명서' 낭독, '본교 교직원 양심선언서' 대독, '최루탄피해자 사후대책위원회 성명서' 낭독 등이 있었고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군부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최루탄 추방', '장기집권음모 분쇄', '언론자유보장' 등을 주장하며 다음날 새벽 1시30분까지 농성 및 시국대토론회를 벌인 후 해산함으로써 그간의 가투는 일단락 지어져 휴지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대신문 1987년 7월10일자>

#전두환 정권, 마침내 '6.29 항복선언'

그리고 3일 후인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는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이른바 '6.29선언'을 한다. 노태우 대표는 직선제 개헌으로 1988년 2월 평화적인 정권이양, 선거법을 개정해 공명정대한 선거관리 등 8개항의 약속을 한다.

▲ <제주신문 1987년 6월29일자>
직선제로 합의개헌 실현
민정 노대표 김대중씨 사면.복권도 건의
이번 제의 관철되지 않으면
대통령 후보.당 대표 등 사퇴

<제주신문 1987년 6월29일자>

▲ <제주신문 1987년 6월30일자>
민주화 향한 거보에 찬사
민정 노대표 특별선언 따른 도민반응
집권 여당의 용기있는 결단
더 바랄 것 없는 획기적 제안

<제주신문 1987년 6월30일자>

▲ <제주신문 1987년 6월30일자>
문교부, 시위관련 제적생 복교검토
민주화조치 발맞춰

<제주신문 1987년 6월30일자>

제주신문은 1987년 6월29일자 '직선제로 합의개현 실현'이라는 제목으로 '6.29선언' 기사를 톱뉴스로 보도한다. '민주화 향한 거보에 찬사'라는 제목의 노태우 대표 특별선언에 따른 도민반응도 특집으로 실었다. '집권여당의 용기있는 결단, 더 바랄 것 없는 획기적 제안'이란 부제가 달린 이 기사에서는 그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제주대 교수의 입장을 비롯해 사회 각계 인사의 의견이 실려졌다.

다음날인 6월30일에는 노태우 대표의 특별선언에 따른 정부의 후속조치가 잇따라 발표됐다. 문교부의 경우 민주화조치에 발맞춰 시위관련 제적생의 복교를 검토하겠다는 발표기사가 게재됐다.

4.13호헌조치 이후 끈질기게 이어져 온 전 국민적 저항은 마침내 '위대한 국민승리'로 결실을 보고 있었다. 그 국민승리의 중심에는 '제주'도 당당히 서 있었다.                                <헤드라인제주>

<제주의 6월항쟁, 그 의미는...>

6월항쟁 당시 '서귀포 항쟁'(1987년 6월26일)의 주역이었던 진희종씨(5.18 광주항쟁 당시 전남도청 시민군으로 활동, 전남대 제적, 현 방송인)의 얘기다.
"제주 시민에게 있어 6.29선언의 직선제 개헌 쟁취는 거저 받은 선물이 아니다. 동참해서 쟁취한 것이다. 만약 전국적인 6월항쟁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제주에서 6월항쟁이 없었다면 6.29선언에서 제주 사람들이 민주적 주체성을 가질 수 있었겠나. 제주 시민들도 항쟁의 대열에 동참하고 함께 싸워서 얻은 '6.29 선언'이었기에 그 의미는 더욱 높다고 하겠다. 4.3의 혹독한 시련을 딛고 제주의 민주항쟁을 일궈냈다는 역사적 자부심을 갖는다.
정권의 항복을 받았더라면 어쩌면 자연스럽게 정권을 인수받아서 민주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는데, 일정부분 기습적으로 항복을 받아낸 부분도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8-9월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화운동의 자발적 폭발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으면서 1987년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데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제주대 써클연합회장으로, 학생운동권 진영의 지도부 역할을 맡아 6월항쟁을 주도했던 김정열씨(현 느영나영 영농조합법인 대표)의 얘기다.
"20년 전, 도민들이 밖으로 나가 자기주장을 펼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었다. 4·3사건 당시 많은 제주도민들이 대량학살을 당했기 때문에 시위를 하면 주위 사람들까지 모두 죽는다고 생각했다. 4·3사건에 대한 피해의식이 남아 있어 도민들 모두 숨죽여 살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6월 항쟁은 4·3사건 이후 처음 밖으로 나온 시위였다. 학생들도 처음에는 선뜻 함께 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규모는 커져갔다.
6월항쟁을 계기로 해 시민단체들도 속속 결성됐다. 제주문화운동협의회, 제주여민회, 국민운동본부, 민주화운동 협의회, 서귀포나라청년회 등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체들은 부당한 일이 있으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88년 송악산 근처 미군기지 설립반대 운동, 1989년 탑동매립반대 운동 등 6월 항쟁이 없었다면 반대시위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열씨는 이러한 성과와 더불어 아쉬운 점도 피력했다.
"6·29민주화 선언을 통해 대통령선거를 직선제로 한다는 발표가 난 후 모든 집회가 중단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발표가 난 후에도 싸움은 계속 돼야 했다. 6월 민주항쟁으로 시작했던 싸움이 6월 민주혁명으로 마무리돼야 옳았다.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 한 목소리를 냈을 때 군사정권 저지 운동도 펼치고 권력 앞에 빌붙어 부를 축척했던 이들을 뿌리 뽑아야 했다. 잘못을 저지르면 ‘사회적 심판을 받는구나’하는 것을 깨우치게 했어야 했는데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 아쉽다. 세상을 바꾸는데 끝까지 앞장서지 못한 것 같아 후회된다."

송형관 당시 제주대 총학생회장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다.
"민주화라는게 피를 먹고 사는 나무처럼, 그만한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제주에서도 6월의 그 치열한 싸움을 결코 좌시하지 않고 당당히 싸웠기에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그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화의 결실을 맺은 과정에서 일정정도 참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매우 아쉽다. 6월의 뜨거운 투쟁의 열기를 지금도 느끼고 있고, 어쩌면 지금도 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6월항쟁 당시 제주대 학생운동권의 소위 학습소그룹인 '언더'진영의 지도부격인 정원태씨(당시 제주대 사학과 재학, 현 제주감협 근무)은 6월항쟁에 있어 '운동권'의 역할 보다는 '시민의 힘'에 대해 강조한다.
"6월항쟁을 학생운동권 중심으로 얘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은 항쟁의 주역은 시민이었다는 것이다. 그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화를 열망하며 묵묵히 싸운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힘이 있었기에 6월항쟁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더욱 값지고 빛날 수 있었다."

천주교 제주교구 가톨릭학생회연합회장을 맡아 활동했던 박성룡씨(현 제주4.3연구소 사무처장)의 얘기다.
"외람된 제 개인적 소견 말씀드리면 그 때 싸움을 하지 않았으면 제가 살아가는 모습 어땠을 까 가끔씩 생각해 본다. 그 당시 투쟁했던 동지들, 그리고 투쟁에는 동참하지 못했지만 가슴 아파했던 도민들이 많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민주화의 발전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현재 각자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이번 6월항쟁 20주년을 기회로 각자 반성도 하고, 앞으로 열심히 후손들 위해서 살아가야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 <제주신문 1987년 6월27일자>

전국 37개 시.읍서 '대행진' 공방
제주와 서귀포서도 시위...경찰 원천봉쇄
지역따라 산발적...전국서 3천4백여명 연행
평화대행진 제주대회가 26일 하오 8시 학생.시민 등 1천3백여명(경찰집계)이 참가한 가운데 중앙로터리에서 열렸다.
이날 대회는 제주대 학생들이 주도했는데 대회를 마친 후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내 중앙로.남문로를 따라 광양로터리까지 행진했다.
시위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됐던 6명이 풀려나오자 27일 0시40분에 자진해산했다.
경찰은 26일 하오 5시부터 중앙로 일대의 차량통행을 전면 통제하는 등 원천봉쇄에 들어가 한때 학생들과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으나 학생들이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자 이들의 행진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한편 서귀포시내에서도 이날 하오 천주교 복자교회 앞에서 1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시위를 벌였다.
<제주신문 1987년 6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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