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공직사회, 요원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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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공직사회, 요원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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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강문상 수필가/한국문인협회 회원

강문상 수필가/한국문인협회 회원. <헤드라인제주>
입장이 있으면 퇴장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 해 12월, 지난 청춘을 다 바쳐 공직에 머물렀던 많은 분들이 어김없이 퇴장을 했다.

헌신적인 충성과 국민본위를 위해 달려온 보상에 대해 국가는 얼마간의 연금과 훈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빚을 갚았다. 몇 분은 훈장마저 고사했다.

언론 기고를 통해 밝힌 한 고위공직자의 변(辨)을 살펴보면, 훈장은 더없이 명예스러운 것으로 존중되어야 마땅하나, 지금과 같이 근무연수에 따라 남발되어진 의례적인 상훈제도에 대해 정중히 고사함으로써 스스로의 권위와 자긍심을 지키려는 모습이다.

훈장이란 가슴에 붙였을 때만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름대로 표현하고 있음에 누구도 돌을 던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또한, 그 분은 언제부터 정년퇴직이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는지에 대해서도 꼬집었다.

'고위공직자 연령 대기제'에 대해서도 철저히 직업공무원제도를 유린한 것이라고도 했다. 물론 그러한 제도가 공직사회 인사숨통 해소에 일정 부분 기여해온 것도 사실이나 명예로운 퇴장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후배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누구도 퇴장을 비켜갈 수는 없다.

물러나는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는 결국, 스스로에게 달려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권력은 잠시 머무르는 바람과도 같은 것

신묘년을 맞이하여 신년 인사회장에는 폭설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주도층이라 불리는 주요 인사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 가운데에는 前 도지사를 비롯해 시장 군수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태환 전 도지사의 경우, "새벽 6시쯤 일어나 자전거로 운동을 하고 대중목욕탕을 다녀온 후 하루 일과를 시작 한다"라며 한 언론사 인터뷰를 통해 여느 평범한 소시민과 다름없는, 최근 근황을 털어놓고 있지만 오늘 같이 공식적인 행사에 수행원 하나 없이 쓸쓸히 행사장을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그 분의 근황과 성품을 견주어 볼 때, 지난 6년 동안 제주도정을 이끌면서 결초보은을 입었던 수많은 고위공직자가 '곁에 서겠다는 것을 한사코 마다했지 않았겠나.' 나름대로 애써 정리해보면서도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공조직 사회에서는 일찍이 '권력을 놓았을 때, 아픔을 같이 해주며 고민을 털어놓고, 머리를 맞대며 소주잔을 기울일 수 있는 세 사람이 있으면 성공한 공직자'라고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공직사회는 냉정하고 비정한 세계이다. 가지고 있을 때에는 주위에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없을 때는 아무도 없는 허망한 것이다.

결국 권력은 잠시 머무르는 바람과도 같은 것일 뿐, 영원히 움켜쥘 수 없다.

국민은 잠시잠깐 공평무사한 집행권한을 맡겼을 뿐이며, 그에 대한 평가는 비로소 후에 내려진다.

공신은 죽어서 평가 받아야

삼국통일을 앞두고 있는 춘추전국시대, 싸움은 한치 앞을 보지 못하면서 영토 넓히기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쳤다.

드디어 통일이 되었다.

황제는 오늘의 통일이 있기까지 부모형제를 두고 나라위해 희생한 수많은 민초들의 시신을 수습하기에 앞서 살아있는 장수들의 개국공신 가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4년마다 개최되는 지방선거에서 도정을 탈환한 점령군 입장에선 갈수록 분열되고 있는 지역감정과 경제회생과 같은 대의는 뒷전인 채, 자칭 공신이라는 장수들의 자리보전에 우선 매달린다면 전자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도정의 2인자 자리를 놓고 공신들간 혈투를 벌이고 있다는 소문 가운데 특등공신 한 분은 '정중히 고사하였다'라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후에 들리는 말로는 "단체장이 모두 제사람 심기에 급급 한다면 여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을 것이고, 이는 결국 도백을 벼랑으로 내모는 꼴이다. 도백의 입지를 넓혀주려면 자신을 포함해 모두 자리를 고사해야 한다."라고 했다는 것.

그래도 그런 공신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은 어쩌면 도백에게는 행운일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주군이 어려움에 처할 때 끝까지 운명을 같이할 천군이라 할 것이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진짜 충신인지, 지난 선거에 자리보전을 받기 위해 도왔는지는 극명해진다. 따라서 진정한 공신은 권력을 잃은 후에야 알 수 있는 냉엄한 것이다.

관복의 명예는 스스로 지켜야

'관복(官福)도 타고나야 관복(官服)을 오래 입을 수 있다.'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설일 뿐, 자기 옷은 자기 스스로 지켜야 한다.

누군가 "당신! 옷 벗고 싶어?"하고 호통을 친다면 상대는 공직자다. 공직자가 아닌, 일반 기업에서는 옷은 없어지고 그냥 "당신, 그만두고 싶어?"라고 한다.

공직자에게만 붙여진 옷. 아마 예로부터 미관말직이나 정승에 이르기까지 관복을 모두 착용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어오지 않았나 싶다.

현재 판사가 입는 법복, 경찰이나 관세공무원 등이 착용하는 제복, 하다못해 행정공무원이 만원을 대할 때 입는 민원복까지를 총망라한다 해도 평상복으로 근무에 임하는, 그러니까 관복을 입지 않는 공직자가 더 많은 세상이지만 공무원이 비리에 얼룩져 그만두었을 경우에 세상은 아직도 "옷을 벗었다"라고 한다.

따라서 공직자들의 단순 평상복도 관복이며, 단순히 옷을 입은 게 아니라 모두가 제복을 입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또한, 어디를 가더라도, 어디에 서 있더라도 항상 국민은 제복 입은 공무원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염두해 두어야 한다.

공무원은 다수의 국민을 대상으로 행정을 펼치게 됨에 따라 그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국민은 공무원을 안다. 적극적인 행정, 봉사행정에 감명을 받았으면 우수공무원으로 인상에 남았을 것이며, 죽어도 안 된다며 불가 판정을 내렸다면 불친절 내지는 철밥통 공무원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무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그 자체가 제복 입은 형상이라는 사실이다.

공직자가 옷을 벗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오명이요, 수치다. 왜냐하면 정년이 다하여 퇴임하였다거나 원에 의하여 도중에 스스로 사직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말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옷을 벗었다' 함은 스스로 그 옷을 벗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도와는 달리 누군가에 의해 '옷이 벗겨졌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다.

그 누군가는 다름이 아닌, 국민이다. 물론 옷을 벗겨내기 위해 사정기관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통했을 테고, 여론과 대중매체를 통해 알려졌을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수단일 뿐, 벗기는 권한은 국민이다.

더욱 엄격해진 공직, 자기관리에 달려

과거와는 달리 미디어매체가 발달해진 요즘에는 공직자의 투철한 봉사관과 더불어 사생활까지도 더욱 엄격을 요구하고 있다.

빛나는 보석에 끼지는 못할지라도 진흙탕에는 아예 발을 담구지 않아야 상책이다.

예를 들어 일반 시민 다섯과 공무원 하나가 낀 도박단을 검거하였을 경우 필시 언론 제하의 기사는 '공무원 낀 도박단 검거'라고 대서특필하게 된다.

일반기업체에서 골프장 하나를 통째로 빌려 단합대회를 하였다 해도 관심 밖이겠지만 뒤집어서 어느 기관에서 내 돈 내고 골프를 쳤다하더라도 아마 9시 메인 뉴스에 "정신 나간 공무원"이라며 난리들일 것이고, 사정기관을 통해 청와대까지 일일 사건보고로 올려질 것이다.

일반 시민, 보통 사람들은 가십 한 줄 거리도 안 되지만 공무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거지는 특종감이다. 이쯤 되면 옷을 입었건 안 입었건 공무원이란 신분에 얽매인 자체만으로도 모두가 제복 입은 공무원이니 엄청난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

결국 자기의 관복은 스스로의 역량에 달렸을 것이다.

아름다운 공직문화조성, 스스로의 신념에 달려

어느 중앙신문의 여기자는 고정칼럼을 통해 "공직이란 그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봉사정신으로 하면 족한 일"이라 했다.

또 "공무원이란 그렇게 어려운 시험을 거쳐야 할 일도 아니"라는 말도 했다.

즉, 아무리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 들어온들 그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학과시험이라는 수단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공직사회가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는 뜻이다.

세계 언어에 능통하고, 법령을 줄줄 외는 수재가 아니어서 인터넷을 뒤지면서 쫓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문제는 머리가 아니라 국민을 섬길 줄 아는 심성이 우선이다. 그 심성이 우선시되지 아니하고는 투명한 공직사회는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금, 오로지 승진이라는 입신양명만을 위해 공직사회가 움직이는 것은 아닌가 싶다.

자리는 한정된 탓에 상대를 누르려 이골이 붙어버렸고, 동료와 동기간의 초심은 헌신짝 같이 버려진지 오래이다.

고개는 아래를 향한지가 언제인지, 오로지 위만 쳐다본 해바라기만 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신분사회가 타파된 21세기 대한민국 공무원이라 말하면서도 스스로 족쇄에 채워진 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참봉사 정신은 공직 입문에서의 나부랭이로 변하고, 권력다툼의 시녀로 변했다.

신묘년에는 우리 공직사회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해야 할 전환기의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힘에 부칠 때, 당겨주고 밀어주는 그 아름다운 공직문화는 반드시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파이팅'을 외쳐 본다.

<강문상 수필가/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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