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의 제주감귤 이야기] 감귤 세계에도 덕이 싹트고 키워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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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의 제주감귤 이야기] 감귤 세계에도 덕이 싹트고 키워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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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헤드라인제주
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조합장 ⓒ헤드라인제주

제주 감귤세계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거대하고 투명한 벽에 가로 막혀있다. 이 벽을 어떻게 건너뛰고 넘을 것인가를 궁리하고 또 시도하는 일이 시급하다. 곧 시대를 건너고 돌파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시대를 돌파할 수 있을까. 문제의식을 포착한 지성인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특히 제도권 안에 있는 유관기관 지성인들이 그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지성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이다. 나에 갇힌 생각을 우리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있던 나를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곳에서 안 보이고 만져지지 않은 곳으로 옮겨 가려고 몸부림 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미 있는 익숙한 것을 지키면서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익숙함에서 과감히 이탈하여 열리지 않은 어색한 곳으로 건너가려고 발버둥치는 마음의 율동이 바로 덕이다. 그런데 왜 덕은 잘 발휘가 되지 않을까요? 방해꾼들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왜 우리는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지 못할까. 그것은 다른 것들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지식, 이념, 신념, 가치관, 믿음, 체계 등등이 나를 내쫓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즉 후진성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언어적 표현으로 형식화 된다. 언어화한 모든 것들이 덕을 어지럽힌다는 일갈은 일찍이 공자님 하신 말씀이다.. 잘 꾸며진 말이 덕을 어지럽힌다 巧言亂德. 지식이나 이념이 교묘한 방식으로 다양하고 세세하게 분화되어 세력화 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분명하지만 종교나 학술 혹은 정치영역에서 그 극단을 볼 수 있다.

독립적 주체라야, 이념이나 지식에 제한되거나 매몰되지 않은 자기의 맨 얼굴로 우뚝 선 자라야 이 세계의 움직임을 그대로 받아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 혹은 봐야하는 대로 보지 않고, 보이는 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 추수편에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 이야기를 하거나 논변 즉 따지기를 잘 하는 사람과의 사이에는 크기가 다르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보다는 크기가 다른 사람이다. 크기가 굵고 굵은 사람이다. 이것을 함량이라고 한다. 동양에서는 덕德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서 항우와 유방을 비교하면 유방이 덕이 더 크다. 항우는 귀족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유방은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새로운 역사의 진행을 정확히 이해하고 거기에 참여한 사람이다. 항우는 시대흐름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구태의연한 프레임으로 그 흐르는 시대를 제어하려고 했다. 여기에서 행보가 갈린다.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덕을 갖추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오리무중의 세계 즉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살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된다. 자기한테 있는 프레임으로 세계의 흐름을 보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덕이라고 한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자기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자기이게 하는 내면의 힘이 발휘되게 하는 것이다. 이 힘이 덕 또는 함량이기도 하다.

莊子 秋水編에서 추수란 가을에 장마 들어서 물이 불어난 상황이다. 가을에 홍수가 나서 온갖 시냇물이 황하로 쏟아져 들어 온다 추수시지 백천관하 秋水時至 百川灌河. 물이 불어나자 강이 넓어져 저쪽에 있는 것이 소인지 말인지 구분이 안 된다.

경류지대 우계저애지간 불변우마 涇流之大 雨溪渚崖之間 不辨牛馬. 황하에 사는 신인 하백이 가을에 물이 불어나자 내가 지배하는 왕국이 이렇게 넓구나 하고 의기양양하였다 어시언하백흔연자희 이천하지미위진재기 於是焉河伯欣然自喜 以天下之美爲盡在己.

넘치는 물을 타고 동쪽으로 흘러가니까 끝이 보이지 않는 물이 보인다. 순류이동행 지어북해 동면이시 불견수단 順流而東行 至於北海 東面而視 不見水端. 이리하여 하백은 바다를 돌아보며 감탄을 하면서 말을 하는데 이 물이 바로 북해이다 어시언하백시선기면목 망향향약이탄왈 於是焉河伯始旋其面目 望鄕向若而歎曰. 북해에는 북해약이 살고 있었다.

하백이 북해약을 보자 깜짝 놀라면서 말을 한다. 들판에 돌아다니는 말 즉 들리는 말, 속담에 의하면 도를 백가지 들으면 자기와 같은 사람이 없다. 野語有之曰 問道百以委莫己若者. 백개 정도의 도를 들으면 도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없으려니 하고 보통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도 그랬다 我之爲也.

그런데 당신을 보니까 깜짝 놀랐소. 하백이 감탄해서 말하기를 당신을 보니 참으로 감탄스럽소 망향양약이탄왈 望洋鄕若而歎曰. 백이숙제나 공자도 우습게 안다는 말이 있는데 나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소. 자기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 같아도 그것에 근본을 따져보면 사실은 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왜 우리가 수양을 하느냐. 수양이라는 것을 마음을 무심無心의 경지로 진화시키는 것이다. 내 마음이 없는 단계까지 나를 끌고 가는 이유는 무엇이냐. 내 마음이 없어야 내 마음에 안 드는 것 그렇지만 이 세계에 있는 것 그렇지만 진실일 수도 있는 것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백도 도를 백 정도는 들은 사람이다. 이 사람도 백이숙제나 공자를 우습게 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나도 믿지 않았다. 당신을 보니까 내가 얼마나 작은지를 알겠소. 내가 끝이 보이지 않는 당신의 크기를 보았소, 감히 바다를 보았으니 강중의 강이라고 하더라도 바다를 보았으니 얼마나 깜짝 놀랐겠소, 나는 직접 목격했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의 문전에 오지 않았다면 큰 일 날 뻔했소. 나는 오랫동안 도를 터득해서 뛰어나게 된 사람들한테 비웃음거리가 될 뻔 했소.

북해약이 이렇게 말을 한다. 프로의 세계는 그렇지 않아요.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에 대해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간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여름 한 철 사는 벌레는 가을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시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좁은 범위 내에서 명성을 얻은 선비인 곡사曲士는 제한된 범위 내의 지식이나 경험을 가진 사람은 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관념, 이념, 교육된 바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北海若은 사람을 가두고 제한하는 것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어떤 공간에 살았느냐. 어떤 시간을 살았느냐.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관념을 갖고 살았느냐. 이것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제한한다. 하백이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까요. 북해약이 말하기를 당신은 한계를 벗어났다. 그래서 大海를 보고 당신이 얼마나 추한지, 부족한지를 알아버렸다. 이제야 말로 당신을 도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당신은 한계를 벗어나서 얼마나 추한지 부족한지를 알았기 때문에 도에 대해서 더불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장가여어대이의 爾將可與語大理矣. 바다인 나는 미려라는 구멍을 통해서 물이 빠져 나간다 미려설지眉閭泄之. 물이 아무리 빠져나가도 줄어든 적이 없고 홍수가 나도 많아지지도 않는다고 하여 내 자신이 대단하다고 하오. 그렇지만 내가 대단하다고 마음 먹어본 적이 없다 이오미상이차자다자 而吾未嘗以此自多者.

설명하자면 하백은 스스로 대단하다고 느껴 본적이 있고, 백해약은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느냐 하면 하백은 그릇과 함량이 작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 일, 자기가 터득한 진리, 자기가 경험해서 얻은 통찰을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북해약은 그런 것이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껴 본 적이 없다는 차이는 바로 그릇, 함량의 차이다.

그렇지만 하백이 북해약을 만나서 스스로 함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대함이다. 하백이 자기보다 넓고 큰 북해약을 만나서 스스로 자신이 추하고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반성력이라고 한다. 하백이 반성력을 갖게 됨으로서 북해약이 하백을 인정하고 서로 함께 도를 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반성력이 있는 지성을 탄성이 있는 지성 또는 탁월한 지성이라고 하고 반성력이 없는 지성을 푹 퍼진 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푹 퍼진 지성은 있는 것만 가지고 주장을 하고, 반성력이 있는 지성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보는 능력이 있다.

이 한계는 진리가 필연적으로 제공하는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보다도 시대가 변하기 때문에 그 진리의 적용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계는 원론적으로 이야기 하면 수시로 제기되고 수시로 제기되어야 된다. 제기되는 이 한계를 보고 그것을 자기의 생각과 활동에 송곳, 자극을 쓴 것을 반성력이라고 한다.

수학 문제처럼 어느 정도의 지식에는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다는 문제가 아니라 한계는 수시로 제기 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유동하고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유동적 전체성이다. 지식이나 앎은 쉽게 고정되고 부분적이다.

그래서 유동적 전체성 안에서의 지식과 자아의식은 깨어 있다면 항상 한계와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 한계에 직면하는 하는 태도를 반성력이라 한다. 한계에 대면하는 태도가 준비되지 않고 일정한 범위의 지식과 깨달음으로 일정한 범위 안에서 칭송을 듣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이 사람을 논어에서는 향원鄕原이라고 한다,

동네원님이란 뜻이다. 일정한 범위인 동네 안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일정분량의 신념과 이념을 가지고 거기에서 존경과 인정을 받는 사람을 말한다. 공자는 향원을 덕의 파괴자라고 하였다 자왈 향원 덕지적야 子曰 鄕原 德之賊也. 하백을 가장 큰 향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얼마나 추한지를 모르는 상태의 하백을 향원이라고 할 수 있다. 향원들은 덕을 파괴한다. 함량을 파괴한다. 너를 너이게 하는 근본적인 힘, 동력을 찾지 못하게 한다. 향원을 대단한 사람으로 보면 즉 하백으로서는 자기는 하백 이상으로 할 수 없다. 이 하백이 스스로 존경받는 것에 만족하고 좋아하면 밑에 있는 사람들을 한계를 돌파해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꽉 붙잡아두는 꼴을 하게 된다.

그래서 동네에는 동네향원이 있고, 자기 안에는 자기향원도 있을 수 있다. 향원은 함량이 작다. 범위가 작고 깊이가 얇다. 그러한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한 그 동네 사람과 그 사람은 자기 한계를 볼 수 없는 한 이 다음을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가질 수 없다. 덕의 힘은 지금의 나에서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끌고 가는 힘이다.

이 힘을 질문이라고도 하고 욕망이라고도 하고 의지라고도 하고 배짱이라고도 하고 그릇이라고도 하고 하여 덕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향원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향원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한계를 넘어서는 덕을 발휘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향원을 덕지적야 德之賊也 라고 말하는 것이다.

보통 한계 중에서 인간의 의식과 삶을 규제하는 가장 강력하고, 진리와 선의 옷을 입은 한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치적 신념, 윤리적 신념, 도덕적 신념이다. 이게 가장 강력한 것이다, 정치적 신념, 윤리적 신념, 도덕적 신념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이탈 하려면 그 신념에 관련된 지식을 계속 섭취하는 것으로는 더 강화될 뿐이다.

흔히들 덕성을 먼저 갖추는 것이 재주나 능력을 갖추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도 된다. 덕은 지식을 지혜로 넘겨주는 힘이다. 경험을 행복과 자유의 영역으로 넘겨주기도 한다. 게다가 인격적 기품까지 제공한다. 이 인격적 기품과 지적인 성숙 그리고 인문적 통찰, 이것들은 모두 다 하나의 동력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정말 자기로 존재하는 힘 바로 덕이다. 덕의 바탕위에서 이루지지 않은 지식은 그 사람에게 한때 지식인이라는 호칭이 주어졌을지 모르지만 움직이는 감귤세계의 전체성을 관조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해가 넘기면서 그 지식은 참고는 될지언정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김용호 전 제주감귤농협 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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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maca 2022-11-15 18:42:21 | 122.***.***.140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

macmaca 2022-11-15 18:41:32 | 122.***.***.140
세계사로 보면 한나라때 동아시아 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세계종교 유교가 성립되어 지금까지 전승. 이와 함께 한국 유교도 살펴봄.한국 국사는 고려는 치국의 도 유교, 수신의 도 불교라고 가르침. 고려시대는 유교 최고대학 국자감을 중심으로, 고구려 태학, 백제 오경박사, 통일신라 국학의 유교교육을 실시함. 유교사관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던 나라.
http://blog.daum.net/macmaca/3057

@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

인간다움 2022-11-15 14:31:07 | 110.***.***.146
나를 인간다운 곳으로 인도하는 힘이 덕이고, 이의 힘량이 높을수록 관념에서 벗어나 더 나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데 큰 공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