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궷물' 정호가 조천을 그리며
조천관민(朝天舘民)의 기억 속에 사라져버린 조천관(朝天舘)을 이제 필자가 그 자태를 그려보려고 합니다. 조천관(朝天舘)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니까요.
우선 교수 곽기수(敎授郭期壽)의 조천관 중창기(朝天舘重創記) 중 일부입니다.
(전략) "건물들은 중앙에 官衙를 두었고 삼면에는 回廊을 만들었는데, 堂과 무기고, 부엌이 있다. 건축물들은 법도에 맞게 갖추어지고, 규모도 알맞아 높지도 낮지도 않으며 사치스럽지도 빈약하지도 않다. 웅장하고 아름다워 장로의 송(張老之頌)을 드릴만 하며, 처마는 새가 날개를 치켜 올린 듯하고 추녀는 꿩이 날아가는 듯하여 사간의 시(斯干之詩)를 읊조리기에 알맞다."고 하였습니다.(원문 및 이하생략) -출처; 역주 탐라지 2005-
다음 17세기 말 이익태 목사는 탐라십경도 화첩 '朝天舘'에 朝天鎭城 가운데 가장 높은 건물을 조천관(朝天舘)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탐라십경도는 쉽게 구할 수도 없으므로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을 보시면 성안 가운데 가장 높은 건물을 조천관(朝天舘)이라고 아시면 됩니다. 이제 문헌과 화첩으로 朝天舘을 보셨으니, 직접 자태를 떠올리며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1), 「朝天誌」 金寶鉉(김보현), 제주시 교육장 역임, 1976년 편집한 소책자에 「객사터」는 ‘비석거리 동쪽 70m 지점, 옛날 客舍 있었던 곳’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2), 「朝天邑誌」 金玟奎(김민규), 조천면장 역임 1991년 발행한 향토지에 객사터에 대한 내용은 (1) 朝天誌의 내용과 같고,
「고려말 전국적으로 三館을 설치할 때 仁川館, 釜山館, 제주에 朝天館을 설치하였다. 처음 朝天館을 창건한 것은 1,374년(공민왕 23년) 박윤청 목사 당시로 알려지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잘못된 내용입니다.
(3), 「具述者(구술자)」 김세혁, 오현중학교 교장 역임, ‘19, 7, 29
구술은 역사이기 이전의 기록으로, 귀중한 자료입니다.
「객사왓은 조천리 2657번지로 조모께서 경작할 때까지 주춧돌들이 나왔었는데 경작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치워버렸다.」
「2664번지의 현재 건물은 나(구술자)의 5대조가 세운 주거용 건물로 ‘조천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건물이다.」라고 구술하여 주었습니다.
(4) 「조천읍 역사문화지」 제주특별자치도지사. 2011년 발행한 종합지로서의 읍지입니다.
조천리 편에 「조천리는 일찍부터 ‘조천’이라 하였는데, 朝天舘을 설치하면서 ‘조천관마을’(朝天館里· 朝天舘里)이라 하다가 ‘관’을 생략하여 ‘조천마을’(朝天里)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朝天舘은 적어도 14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21년 윤2월 임오)에서부터 朝天舘을 확인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 세종 21년은 1439년입니다.
「조천관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 절제사 李沃과 조선 선조 32년(1599)에 목사 성윤문 등이 여러 번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탐라지」) 그러므로 조천관은 적어도 14세기 초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틀린 내용입니다.
(5), 「조천관 중창기」 1591년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가 쓴 記文으로 1590년 목사 李沃이 조천관을 중창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6), 「탐라지」 제주목사 이원진, 효종 4년(1653년)
방호소 편 「조천소에 조천관과 주구(廚廏), 군기고가 있으며 東城 위에는 쌍벽루와 연북정이 있다」. 하였고,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의 Ⅱ-(5) 「조천관 중창기」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일부 번역본에 廚廏(주구)를 ①‘부엌과 마구간’, ②‘군마의 마구간’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일반 부엌이었다면 기록으로 남길까? 도내의 모든 貢馬를 조천포로 반출했다면 貢馬의 마구간?
# 정리에 들어가겠습니다.
조천리는 일찍부터 ‘조천’이라 하였는데 朝天館이 설치되면서 ‘조천관마을’(朝天館里· 朝天舘里)이라 하다가 ‘관’을 생략하여 ‘조천마을’(朝天里)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朝天舘의 설치연대는 미상이지만, 문헌에 「세종실록」(21년 윤2월)에 朝天舘을 확인할 수 있다.」 하였으므로, 1439년 이전에 세워졌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 옛터인 객사터(왓)에 대하여 현재까지 당국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향토지인 「조천지」와 「조천읍지」에 ‘비석거리 동쪽 70m 지점, 옛날 객사 있었던 곳 ’이라는 기록이 있고, 구술자(김세혁)가 객사왓은 조천리 2657번지라고 구술하였으므로, 조천관은 처음에 성 밖에(城外) 세워졌는데, 교수 곽기수의 조천관 중창기(1591)에 “이와 같이 성이 비좁고 건물은 낡아 허물어졌으니”라고 성과 조천관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으로 봐서 1590년 목사 李沃이 朝天舘을 중창하기 이전 성안(城內)으로 옮겨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현재 조천관은 처음 세워졌다는 성 밖(城外)에도 옮겨 세웠다는 성 안(城內)에도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朝天館의 옛터인 객사터(객사왓; 조천리 2657)에 대하여는 당국에서 조속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朝天館 표지석은 객사터(왓)에 대한 고증이 끝날 때까지는 조천리사무소에서 일단 회수하여 보관하다가, 고증이 끝난 후에 설치하여야 할 장소(객사왓 또는 조천진성)를 정하여 다시 세워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음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바르게 고쳐져야 합니다.
조천관이 「공민왕 23년(1374)에 세워졌다」는 Ⅱ- (2)「朝天邑誌」, Ⅱ- (4)「조천읍역사문화지」의 기록은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사실과 틀린 내용입니다.
Ⅱ- (4) 「조천읍역사문화지」의 고딕체 부분 「조천관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 절제사 李沃」으로 되어 있는데, 절제사 李沃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 인물이 아니라, 조선 선조 23년(1590) 인물입니다.
다음 「조천관은 적어도 14세기 초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하였는데, 朝天舘은 “세종실록 (21년 윤2월)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하였으므로(세종 21년은 1439년임) 14세기가 아니라 15세기 초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인용한 글만도 Ⅰ-(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 Ⅰ-(3) 「朝天鎭터」 표지석, Ⅱ-(2) ‘朝天邑誌’, Ⅱ-(4) ‘조천읍 역사문화지’ 등 여러 기록에 朝天館을 처음 창건한 것을 1,374년(공민왕 23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으로 (가)는 쓰고, (나)는 인용하고, (다)는 퍼 나르니, 이렇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조천관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처음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고 쓰시는 분들! 누군가에게는 써도 틀리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게 할 수 있는 무책임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책자의 내용은 점차 고쳐지고 사라져간다 하더라도, 「朝天鎭터」 표지석은 하루라도 빨리 고쳐져야 합니다. 궁하면 틀린 부분을 파내서라도.....
다음은 블로그에 올려있는 사진과 글의 일부입니다.
"오늘 주인 아주머니를 우연히 뵙고, 드디어 조천관 내부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야호~"
"여기에 있는 야자수는 관리를 잘하셔서 푸릇하지만 이 정원과는 안 어울리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Ⅱ-(3), 김세혁씨의 구술 내용과 비교하여 보십시오.
조천관(朝天館) 표지석만 보고 일반 주거용 건물을 조천관으로 믿은 한 네티즌이 올린 글인데, 객사 건물에 웬 야자수냐고 꼬집고 있습니다. 바르게 정리하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도 이렇게 믿게 될 것입니다.
다음 편에는 Ⅲ. 戀北亭(연북정)에 대하여가 이어집니다.
탐라십경도 화첩 '朝天舘'에 朝天鎭城 가운데 가장 ①놓은 건물→높은 건물로,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을 보시면 성안 가운데 가장 ②놓은 건물→ 높은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