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관은 객사이고 연북정은 정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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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관은 객사이고 연북정은 정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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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궷물' 정호가 조천을 그리며](1) 朝天鎭(조천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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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궷물' 김정호.ⓒ헤드라인제주
- ‘궷물’ 정호가 조천을 그리며-

성인께서는 나이 40세에 불혹(不惑)하시고, 70에 이르러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거슬리지 아니하였다(從心) 하셨는데, 저는 40세에 미혹하여 일흔(70)에 이르렀음에도 不惑은 커녕 여전히 미혹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조천관(朝天館)'은 조천+ 객사 관(館)이니 조천에 있던 객사이고, 연북정(戀北亭)은 戀北(북쪽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함) +정자 정(亭)이니, 북녘에 계신 임금님을 그리워하던 정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북정은 객사(客舍)로......" 시작하는 글이 예상외로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주에 올레코스가 생기면서 18코스에 소재한 조천진성과 연북정(조천관의 옛 모습은 현재 볼 수 없음)을 많은 올레꾼들이 답사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던 유홍준 교수까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에서 학생들이 "제주 답사 일 번지는 어디예요"하고 묻자, 그는 "조천, 구좌"라고 답하였습니다.

제 나이 일흔(70)에 이르러, 이제 이 언덕을 넘어 저 언덕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조천관과 연북정에 대한 미혹함이 저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리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며~

제주의 관문으로 후풍소(候風所)였던 조천진(朝天鎭)

1.  '제주특별자치도의 방어체제' - 3성 9진 25봉수 38연대 

왜구 침입에 대비한 본격적인 제주 방어체제는 고려 말부터 논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19년(1437)에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이 제주도 방어체제를 정비하여 방호소(防護所) 12개소와 수전소(水戰所) 10개소를 설치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제주에는 제주성ㆍ정의성ㆍ대정성 3성만이 축성되어 있었고, 봉수시설도 22개에 불과했었다. 조선조 제주도의 방어체제로 알려진 ‘3성 9진 25봉수 38연대’는 그 이후에 차례로 정비되어 완성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鎭’과 ‘防護所’는 같은 뜻입니다.

○조천진; 조천포는 화북포와 함께 내륙에 드나드는 주요 포구로 경래관(京來官) 출입이 많았고 조공으로 바치는 말(馬)이 반출되었다. 조천포는 처음엔 관(館)이 있는 조그만 성에 불과했다.

선조 23년(1590) 이옥(李沃) 목사는 출륙하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무는 곳으로서, 적 침입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포구임을 관민에게 호소하여 농한기를 이용해 성을 축조하게 했다.

2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둘레 428척, 높이 9척의 작지만 짜임새 있는 성을 축조했다. 특히 "성을 동북쪽으로 물려 쌓아 그 위에 초루를 세워 객사로 삼고 ‘쌍벽(雙璧)’이라 했다. 선조 32년(1599) 성윤문 목사는 쌍벽정을 중수하여, 북녘에 계신 임금님을 사모하는 뜻을 담아 ‘연북정(戀北亭)’으로 이름을 바꿨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하 생략)

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교수 유홍준

"조천진은 제주에 있던 9개의 진지 중 하나로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조천관을 세웠다는 기록이 가장 오랜 기록이다."하였습니다.

3.  '朝天鎭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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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천진(朝天鎭) 성터', 고려시대부터 제주도의 주교통항으로 성이 축조돼 있었으며, 1374년(공민왕 23)에 조천관(朝天館)이 창건되었다. (이하 생략)

#정리에 들어가겠습니다.

'朝天鎭(조천진)에 대하여'는 Ⅰ-(1)'제주특별자치도의 방어체제'에 설명한 것을 요약하면 ‘조천진성’은 설치 연대가 미상이지만, 세종 19년(1437)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이 제주도 방어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과 선조 23년(1590년)에 목사 李沃이 성곽을 뒤로 물러 쌓았다는 기록으로 봐서 1437년 이후 159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9진 가운데 가장 작지만 연북정과 조천관으로 인하여 널리 그 이름을 알려왔습니다.

▶다음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바르게 고쳐져야 합니다.

Ⅰ-(1),'제주특별자치도의 방어체제'의 고딕체 부분, "성을 동북쪽으로 물려 쌓아 그 위에 초루를 세워 객사로 삼고 ‘쌍벽(雙璧)’이라 했다."는 내용은 1591년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의 '조천관 중창기'를 인용한 글인데 원문 [城子則退築東北上安譙樓 其名雙碧]을 한글로 옮기면 이옥 목사는 "성곽은 뒤로 물려 쌓고 동북쪽에 譙樓(초루)를 세워 雙碧이라 하였습니다." 객사라고 한 사실이 없습니다. 또한 譙樓는 정자가 아니라 門樓이므로 쌍벽정이 아니라 ‘쌍벽루’이며, 또한 ‘벽’자는 구슬 ‘璧’이 아니라 푸를 ‘碧’자입니다.

다음 "선조 32년(1599) 성윤문 목사는 쌍벽정을 중수하여, 북녘에 계신 임금님을 사모하는 뜻을 담아 ‘연북정(戀北亭)’으로 이름을 바꿨다."라고 하였는데 성윤문 목사가 중수한 사실을 확인한 바 1765년 '증보탐라지'와 1841년 '탐라지초본'의 원문 내용이 같은데 원문[扁以雙碧 己亥 成允文重修 改扁曰戀北]을 한글로 옮기면 "(이옥 목사가) 편액을 쌍벽(雙碧)이라 했고, 기해년(선조32년,1599) 성윤문 목사는 雙碧을 중수하여, 편액을 戀北으로 고쳤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쌍벽정이 아니라 쌍벽루이고, 연북정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니라 ‘戀北’으로 고친 것입니다. ‘戀北’은 전신인 '쌍벽루'를 이어서 '연북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Ⅰ-(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의 "조천진은 제주에 있던 9개의 진지 중 하나로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에 조천관을 세웠다는 기록이 가장 오랜 기록이다."하였는데, 고려 공민왕 23년(1374)에 세워졌다는 기록은 사실과 틀린 내용입니다.

Ⅰ-(3) ‘제주특별자치도의 방어체제’의 내용을 보면 제주 9진 중 맨 처음 축조된 진성이 韓承舜(한승순) 목사의 건의에 의하여 세종 21년(1439)에 세워진 수산진성(성산읍 수산)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Ⅰ-(4) '朝天鎭터' 표지석에 "고려시대부터 제주도의 주교통항으로 성이 축조돼 있었으며, 1374년(공민왕 23)에 조천관(朝天館)이 창건되었다."고 하였는데 朝天鎭성의 축조 시기는 Ⅰ-(1) ‘제주특별자치도의 방어체제’를 참조하기 바라며, 조천관 또한 1374년(공민왕 23)에 창건된 기록이 없습니다. 유적을 관리하는 관계기관이 앞장서서 잘못된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 다음 편에는 Ⅱ, 조천관(朝天館 · 朝天舘)에 대하여가 이어집니다.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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