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당시 뿌려진 유인물들...'새소식' '혈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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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뿌려진 유인물들...'새소식' '혈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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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5-4) 새소식, 그리고 혈화(血火)와 정보(情報)

수회에 걸쳐 8·15 해방이후부터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주사회에서는 어떤 정치사회단체들이 태어나 어떤 활동하다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출현했던 좌우익의 흥망사이면서,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이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이 속에는 제주4.3사건 발발이전에 뿌려진 삐라의 생산 주체들에 관한 이야기와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과 배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에 연재되는 글들은 지난 5월 12일 ‘제주언론학회’·‘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희생자 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고영철이 발표한 내용(제주4·3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가운데, 원고분량 관계로 세미나 자료집에 다 싣지 못했던 내용들 중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이 연재는 자료집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된다. 미력하나마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필자의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처음 제시한 '글 싣는 차례'의 순서를 바꿔 '신문형 삐라'부터 계속 연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필자 주>

4) 『새소식』

『새소식』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것은 『4·3은 말한다』 제2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서술된 『새소식』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5.10 선거를 앞두고 제주섬에는 응원경찰과 서청, 경비대원들이 속속 들어 왔다. 이 무렵 본토의 통금시간은 밤 10시부터 시작됐지만, 제주섬에서는 저녁 8시로 앞당겨졌다. 그러나 제주읍을 벗어난 지역에서는 밤이 되면 군정당국의 통치력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응원경찰이 주둔했던 곳에서도 경찰관은 향보단까지 보초 서도록 하면서 지서 지키기에 급급했다.

위급한 사태가 발생해도 한밤중에 경찰대가 출동하는 일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치안이 진공상태가 되는 한밤중에 삐라가 마을 골목마다 뿌려졌다. 개중에는 좌익계열에서 발행하는『새소식』이라는 정기유인물도 끼어 있었다. 이들 선전문에는 “경찰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민이여! 단결하자.”, “투표하면 인민의 반역자이다!” , “단선에 참가한 매국노를 단죄하자!”는 등의 구호가 들어 있었다(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제2권, 1994, 207쪽).

이 기록에 따르면 『새소식』은 5·10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되기 전에 도내에 살포되었던 좌익계의 여러 선전물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는 이 유인물에 쓰여 있는 “투표하면 인민의 반역자다”라고 한 구호이다.

‘4·3 취재반’은 이 삐라를 정기유인물이라고 했지만,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새소식』관련 내용의 출처도 알 수 없다. 즉 ‘4·3 취재반’이 실물 삐라를 직접 보고 쓴 것인지 아니면 문헌 기록이나 목격자 증언을 근거로 기술한 것인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자료의 출처를 표시하지 않을 경우 모조 또는 조작한 것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높다.

각종 문헌 조사결과, 『새소식』에 관한 기록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새소식』이라는 선전물이 정확히 언제부터 발행되기 시작하여 언제쯤 자취를 감추었는지, 더 이상 검증할 수가 없다.

5) 혈화『血火』와 정보『情報』

5·10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되기 전에『혈화』와『정보』라고 제호가 붙은 선전 유인물이 제주도내에 살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관한 정보를 맨 처음 언론에 알린 것은 1948년 4월 16일부터 4월 28일까지(주1) 제주도 4·3사건을 진압하기위해 선무공작대로 현지에 갔다 온 경무부 경찰공보실장 김대봉(金大奉)이다.

그는 선무공작 임무를 마치고 상경한 후에 중앙언론기자들에게 ‘제주시찰담’을 발표하였다. 이 시찰담은 1948년 5월 6일자 『조선중앙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서울신문』, 『자유신문』 등에 보도되었다.

각 신문에 보도된 ‘시찰담’을 비교한 결과, 신문의 성향에 따라 보도내용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혈화』와 『정보』에 관한 내용은 『조선중앙일보』만 보도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우선 『조선중앙일보』에 보도된 기사내용부터 살펴보자

「편의대(便衣隊) 활약으로 곤란 / 제주도에서 김 공보실장 귀환담」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金大奉)씨는 제주도 사태의 선무차 지난 16일 제주도로 향하였던 바 어제 4일 귀임하였는데 동씨 담에 의하면 방금 제주시내의 치안이 확보되고 있다 하며 치안 일체는 국방경비대가 담당하고 있어 도 밖에서 들어온 모모 청년단체원들의 활동은 일체 금지되고 있다 한다.

폭도들의 연락같은 것은 전화를 이용하는 경찰측보다도 빠르고 상당한 지도급의 인물 1∼2인이 체포되었으나 일체 함구하여 말하지 않는 것과 신문 「혈화(血火)」 「정보(情報)」 등이 무수히 배포되고 있는 것 등을 보면 상당한 훈련을 받은 것 같다고 하며 폭도들과 국방경비대와 대전하고 있는 중간부락민들은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있다 한다.

이곳은 47년 전에 소위 ‘이좌수난’이 있었고 52년 전에는 소위 ‘방성칠난’이 있었던 곳인데 일본측 방송에 의하면 산중 폭도는 200∼300명 정도가 아닌가 추측된다 하며 소위 편의대(便衣隊)들이 활약하고 있어 곤란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다음은 경향신문(1948년 5월 6일)에 보도된 김 공보실장의 담화 내용이다.

「귀순자도 다수 / 제주 성내는 평온했다 / 선무공작 갔다온 김(金)공보실장 담」

제주도 소요사건을 진압하고자 선무공작대로 현지에 갔다온 경무부 경찰공보실장 김대봉(金大奉)씨는 현지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순전히 폭도로 인정할 만한 수는 200~300명에 불과하다. 여기에 부락민과 학생들이 가담하고 있는데 그들의 전술은 중국 팔로군의 그것과 같으며 최근에 와서는 게릴라 전술로 변하였다. 이들 중 귀순한 자도 40~50명 있는데 조사한 후 석방했다.

그들은 ‘단정반대’ ‘UN 나가라’, ‘양군철퇴’ 등을 구호로 내세우고 있으나 실제 행동은 순전히 살인 폭동으로 나오고 있는데 참으로 참혹하기 짝이 없다. 가장 심한 곳은 화북이며 제주 성내는 대체로 평온하여 모두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같은 기사 서울신문 48. 5. 6)

『조선중앙일보』보도에 따르면『혈화』와 『정보』는 김대봉이 제주에 머무르는 기간중(4.16.∼4.28)에 최소한 1번 이상은 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봉은 『혈화』· 『정보』 등이 무수히 배포되는 것을 보았다고 뭉뚱그려서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개의 유인물이 동시에 제작 살포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번갈아 가면서 제작 살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둘 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기관지였는지 아니면 하나만 도당의 기관지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주민들 대상으로 뿌려지던 ‘제호’달린 삐라 중에 하나였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김대봉은 이들을 신문이라고 했지만, 실물은 제호가 붙은 한 장짜리 선전 삐라였을 것으로 보인다.

『경향신문』의 경우 『혈화』 『정보』에 관해서는 묵살·비보도한 반면에 김대봉이 폭도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당시 요구했다는 구호, 즉 ‘단정반대’ ‘UN 나가라’, ‘양군철퇴’ 등을 강조 보도하고 있다. 아마도 이들 구호가 선전유인물의 주요 내용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의 신문의 보도 내용은 『경향신문』의 보도와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소장된 실물이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실제 어떤 내용들이 삐라에 쓰여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혈화』에 관한 기록은 이후에도 3개 문헌에 등장하지만, 『정보』의 경우 이것이 처음이고 또한 마지막 기록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보』는 중간에 제호가 다른 이름으로 바뀌거나 아니면 폐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

주1)『 동광신문』1948년 5월 4일자 기사(제목: 무고한 노유(老幼)만 죽이는 제주폭도의 만행 / 경무부 선무사 김대봉씨 귀래담)는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金大奉)씨는 부하 3명을 대동하고 지난 29일 목포에 도착하여 여정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29~30 양일에 걸쳐 일반 부민(府民) 및 청년단체, 각 중등학생들에게 이번 총선거에 대한 강연을 했다”라고 보도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김대봉은 4월 28일 저녁에 제주를 출발하여 29일 오후에 목포에 도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주도와 각 항(港)간 항행시간은 다음과 같다(조선일보 1948년 5월 6일).

운행시간: 부산발 화요일 오후 6시, 제주착 수요일 오전 11시, 제주 발 목요일 오후 4시, 목포착 금요일 오후 5시, 제주착 금요일 오후 5시, 제주 발 토요일 오후 3시, 부산착 일요일 오전 8시.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필자) 약력

2023년 7월 현재 그는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홍보학과)로 활동중이고, 2019년 12월에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언론ㆍ출판부문)’을 수상한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제주언론 돌아보기1>, <제주언론의 보도방식과 수용자>(공저), <언론이 변해야 지역이 산다: 지역언론의 정체성과 과제>, <브랜드 홍보론>(공저), <고영철 사회비평집: 구라(口羅)>, <지역신문정책과 지원효과>(공저)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캠페인관련 뉴스 프레임 및 뉴스정보의 출처에 관한 연구: 국내 5대 일간지의 세계7대 자연경관선정캠페인 보도를 중심으로” , “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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