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회에 걸쳐 8·15 해방이후부터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주사회에서는 어떤 정치사회단체들이 태어나 어떤 활동하다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출현했던 좌우익의 흥망사이면서,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이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이 속에는 제주4.3사건 발발이전에 뿌려진 삐라의 생산 주체들에 관한 이야기와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과 배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에 연재되는 글들은 지난 5월 12일 ‘제주언론학회’·‘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희생자 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고영철이 발표한 내용(제주4·3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가운데, 원고분량 관계로 세미나 자료집에 다 싣지 못했던 내용들 중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이 연재는 자료집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된다. 미력하나마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필자 주>
▲글 싣는 차례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및 해소
2-1) 미군의 진주, 조선인민공화국 탄생과 좌절
2-2)조선인민공화국의 각료 발표와 아놀드와 하지의 인공 부인 성명
3) 조선건국준비위원회 濟州島 지부 결성
4) 좌익단체 및 정당 출현
5) 우익단체 및 정당 출현
6) 좌익쇠퇴, 우익의 부상 징조들(신문광고 분석)
7) 좌익쇠퇴, 우익의 부상 징조들(남로당 탈당 성명서분석)
8) 신문형 삐라의 解題(➀∼➆)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9월 6일 저녁에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이 수립됨으로써 그 다음날인 7일 오후 2시 옥인정(玉仁町)에 있는 인민공화국정청에서 집행위원회를 열고 건준의 해소를 결의하고, 8일에는 정오부터 숙명고등여학교에서 위원장 이하 전원이 참집하여 건준 해소식을 장중히 거행하였다.(자유신문, 1945년 10월 9일)
9월 7일, 건준의 해소를 결의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조선인민대중에게 격함― 조선인민공화국 탄생에 제하야” 라는 성명서와 전날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결정된 인민위원 명단과 표어 등을 한 장의 삐라로 만들어 살포하였다.
성명과 표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주21)
◇노동자 농민 급(及) 조선의 인민대중 제군!
36년 동안 일본제국주의의 철쇄 밑에서 신음하든 조선은 해내해외(海內海外) 의 여러 동지의 오랜 혁명적 투쟁과 소미영중 연합국의 힘으로 자유와 해방의 길을 얻게 되었다. 참으로 우리의 민족적 기쁨은 이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과 일체의 인민대중의 권리와 이익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적 인민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받쳐왔다.
그리하야 모든 준비조건이 성숙한 9월 6일 드디어 경성부 경기고녀 대강당에서 전국 각도와 해외 각지의 각계각층의 인민대표 천여명이 소집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을 건설하고 다음과 같은 조선인민위원회 인민위원을 선거하였다. 아! 조선인민대중 제군! 조선의 역사는 새로운 막을 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군국주의적 팟쇼적 억압 밑에서 아무런 정치적 자위도 같지 못했던 우리는 우리의 인민대중이 총의에 의한 인민정부를 갖게 되었다.
아! 이 얼마나 감격에 넘치는 일이냐!
우리의 공화국은 로동자 농민 및 일체 인민대중의 이익을 위한 공화국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 농민 및 조선의 인민대중 제군 만세! 우리는 8월 15일과 똑같은 환희와 감격을 가지고 우리의 대표로 조직된 정부 인민위원회를 절대 지지하자!
◇ 표어
△ 조선인민공화국 만세 ! △ 조선인민위원회를 절대 지지하자 ! △ 조선혁명 만세! △ 쏘비에트 동맹의 붉은 군대 만세! △ 민주주의 연합군 환영만세! (1945. 9.7.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은 각지의 도-시-군-면 단위의 인민위원회(이하 인민위)를 조직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건준 지부가 자연스럽게 ××인민위(지방자치정부)로 개편되었고, 또는 새롭게 조직되는 경우도 많았다. 최초의 인민위는 9월 11일 결성된 조선인민공화국 경성시 인민위였으며(매일신보, 9월 11일), 11월 10일에 경기도 인민위가 구성된 것이 마지막이다. 이렇게 결성된 인민위는 도 7개, 시 13개, 군 131개에 달하였다.(주22)
인민공화국의 수립 선포한 이틀 후인 9월 8일, 인민공화국 정부를 운영할 중앙인민위원회 부서를 결정하기 위한 중앙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가 건준 본부에서 개최되었다. 회의를 당연히 주재해야 할 여운형은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9월 7일 여운형이 원서동에서 계동으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해방 후 두 번째 습격을 당해 요양차 가평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이다.(주23) 이날 중앙인민위원회는 허헌, 이강국, 최용달, 이만규, 정태식 등 27명의 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이강국의 사회로 개최되었으며 선거방법, 정강 발표, 각 기관 접수, 임시위원 선거 등의 안건을 토의하고 각 부서 책임자 결정(조각)은 정, 부위원장에게 일임하여 일주일 후인 9월 14일에 발표하기로 하였다.(주24)
여운형은 정부를 조직, 발표하는 데는 미국의 양해를 얻는 것이 필요하고 정부로서 체면을 유지할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에 부서 발표를 미루려고 했었다. (주25) 하지만 이러한 여운형의 의사가 잘 반영되지 않은 체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 결정으로 9월 14일에 인민공화국 각 부서명단과 선언·강령, 시정방침 등이 발표되었다.
9월 14일 오후 3시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정부부서’의 명칭과 그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이 내용은 삐라로 만들어 살포되었다.
◊朝鮮人民共和國 政府發表(9월 14일 오후 3시) 朝鮮人民共和國 政府部署
▲주석 리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부부장 김구(임시대리 허헌) ▲외교부장 김규식(臨時代理 呂運亨) ▲군사부장 김원봉(臨時代理 金世鎔) ▲재정부장 조만식 ▲보안부장 최용달 ▲사법부장 김병로(臨時代理 許憲) ▲문교부장 김성수(臨時代理 李萬珪) ▲선전부장 이관술 ▲경제부장 하필원 ▲농림부장 강기덕 ▲보건부장 이만규 ▲체신부장 신익희(臨時代理 李康國) ▲교통부장 홍남표 ▲로동부장 이위상 ▲서기장 이강국 ▲법제국장 최익한 ▲기획국장 정백 (매일신보 1945년 09월 15일)
각 부서 명단 중에는 임정요인 또는 보수진영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임시 대리라는 편법을 쓰고 있어 건준 위주로 짜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인공은 그 의도야 어찌되었든 간에 ‘벽보내각’ 또는 ‘삐라내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인공에서 인민위원 또는 정부요인으로 발표한 사람의 상당수가 국내에 거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 있다고 하더라고 인공과의 관련이 없다는 것을 선언해 정치문제 외에도 ‘명의도용’이라는 도덕적인 문제마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주26)
비판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당시 외국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과 김구 등을 내각의 명단에 올려놓았던 것은 해방정국에서 중경의 임시정부가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고, 어느 정도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한 것도 민중과 미군정으로부터 어느 정도 확고한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때문이었다.
기대와 달리 조급한 인공 선포와 부서 책임자 발표는 미군정의 인공 부정과 우익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인공은 미군정과 우익의 집중적인 공격 타켓이 되었다. (주27)
9월14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 결정 발표한 선언, 정강, 시정방침은 다음과 같다.
○ 宣言
1945年 9月 6日은 8月 15日과 함께 우리 조선민족 해방사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날이다.
이 날 조선민족해방을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투쟁을 계속하여 온 海內 海外의 각계 각층을 망라한 혁명적 투사 천여명의 회합하에 ‘전국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조선인민공화국은 비로소 발생하였으며 정부를 조직하고 이를 운영할 인민위원은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조선민족은 그 독립의 거대한 제일보를 내어 딛게 되었다.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서 제국주의적 봉건적 탈취와 압박하에 모든 방면에 있어서 자유발전의 길이 막히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의 해방을 위하여 혁명적 투쟁을 계속하여 왔다. 이 끊임없는 혁명적 투쟁과 전후문제의 민주주의적 국제해결에 따라 조선은 제국주의 일본의 기반(羈絆)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민족의 다난한 해방운동사상에 있어서 새로운 제일보를 내어 디디었음에 불과하다.
완전한 독립을 위한 허다한 투쟁은 아직 남아 있다. 우리는 우리 앞에 가로 놓여 있는 모든 난관을 돌파하고 우리들이 선출한 혁명동지와 인민대중의 기본적 요구에 응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을 완전히 구축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외래세력과 반민주주의적 반동적 모든 세력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통하여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을 기한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는 조선인민 대중생활의 급진적 향상과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고 밖으로는 蘇聯, 美國, 中國, 英國을 비롯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민주주의적 제국가와 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보에 노력하려 한다. 우리는 右와 같은 의도하에서 아래와 같은 정강과 시정방침을 발표한다.
○ 政綱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1.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적 잔재세력을 일소하고 전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충실하기를 기함.
1. 우리는 노동자 농민 기타 일절 대중생활의 급진적 향상을 기함.
1. 우리는 세계민주주의 제국의 일원으로서 상호제휴하여 세계평화의 확보를 기함.
1945年 9月 14日 朝鮮人民共和國中央人民委員會
○ 施政方針
1) 일본제국주의의 법률제도 즉시폐기
2) 일본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분배함
단 비몰수토지의 소작료는 3·7제로 실시함
3) 일본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광산, 공장, 철도, 항만, 선박, 통신기관, 금융기관 및 기타 일절 시설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4) 민족적 상공업은 국가의 지도하에서 자유경영을 許함
5) 공업의 급속한 발달을 위한 제정책의 실시
6) 언론 출판 집회 결사 及 신앙의 자유
7) 18세 이상 남녀인민(민족반역자는 제외함)의 선거권의 향유
8) 모든 특권을 말살하고 전인민의 절대평등
9) 부인의 완전한 해방과 남녀동권
10) 8시간 노동제 실시
만14세 이하의 소년노동 금지, 만18세 이하의 청년노동은 6시간제로
11) 최저임금제 확립
12) 표준생활에 의한 최저생활의 확보
13) 노동자, 농민, 도시소시민의 생활의 급진적 향상
14) 실업방지와 그 구제대책의 확립
15) 평화산업의 신속한 복구와 생활필수품의 확보
16) 생활필수품의 공정평등한 배급제도확립
17) 미곡 기타 일절 강제공출제의 철폐
18) 징용 강제부역 강제저금의 철폐
19) 통화정책 及 물가안정대책의 확립
20) 일절 가감잡세의 철폐
21) 고리대금업제도 철폐 고리대금적 대차관계의 확보
22) 부양, 보건, 위생, 오락 문화시설의 대확충과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23) 일반대중의 문맹퇴치
24) 국가부담에 의한 의무교육제 실시
25) 민족문화의 자유발전을 위한 신문화정책의 수립
26) 국가공안대와 국방군의 즉시 편성
27) 민주주의적 진영인 美國, 蘇聯, 中國, 英國과의 긴밀한 제휴를 위하여 노력하며 일절 외래세력의 내정간섭에 절대 반대함
(출전: 매일신보 1945년 09월 19일)
조선인공화국이 내건 27개의 시정방침 가운데 18세 이상의 남녀에 대한 선거권 부여, 남녀의 동등한 권리, 8시간 노동제 실시(만14세 이하의 소년노동 금지, 만18세 이하의 청년노동은 6시간제로), 최저임금제 확립, 실업 방지, 강제공출제 철폐, 의무교육제 실시 등은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대체로 온건한 내용들이었으며, 일본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와 민족반역자들의 광산, 공장, 철도, 항만, 선박, 통신기관, 금융기관 등 중요 산업기관의 국유화 등은 사회주의정책이라 하여 우익세력의 반발을 샀으나, 중요 산업기관의 국유화와 토지관련 정책은 대다수의 국민과 농민들로 부터 크게 환영받았다.
인공에 대한 대다수 인민의 지지를 무시한 체 아놀드 군정장관은 10월 10일 아주 격렬한 용어로 인민공화국을 중상모략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인공을 해산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다음은 매일신보(1945. 10. 11)에 실린 내용 중의 일부이다.
“한국 언론에게: 내가 오늘 기자제군에게 발표하는 이 메시지를 각 신문 제1면에 게재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명령의 성질을 가진 요구이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정부는 맥아더원수의 포고와 하지중장의 정령과 아놀드소장의 행정령에 의하여 정당히 수립된 것이다. 아놀드군정장관과 군정관들이 엄선하고 감독하는 조선인으로 조직된 정부로서 행정 각 방면에 있어서 절대의 지배력과 권위를 가지었다. 자천자임한 관리라든가 경찰이든가 국민전체를 대표하였노라는 대소의 회합이라든가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든가 자칭 ‘조선공화국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연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고관대직을 참칭하는 자들이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면 그 동안 즉시 그 극을 폐막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괴뢰극의 막후에 그 연극을 조종하는 사기한이 있어 어리석게도 조선정부의 정당한 행정사무의 일부분일지라도 단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맹연각성하여 현실을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출을 당연 정지하여야 할 것이다.(……) “ 1945年 10月 10日 미군정장관 육군소장 A. B. 아놀드(출전: 매일신보 1945년 10월 11일)
이에 대해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14일 다음과 같이 즉각 반박 성명을 발표하였다.
△ 聲明
1) 조선민족은 일본제국주의의 성격으로부터 해방을 위하여 40년동안 혈투를 계속하여 왔다. 일본제국주의의 악독은 세계사상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것이었으나 우리는 신음의 구렁에서도 형극의 길에서도 反帝 反駁鬪爭을 감행하여 왔다.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암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의 조선민족의 해방을 우리의 자력만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과대평가이다. 민주주의연합국의 전승의 결과임을 우리는 명기하여야 하며 우리의 해방을 위하여 용전한 연합군에 대하여 우리는 언제나 감사의 念과 경의를 가져야 한다.
민주주의의 승리에 의하여 우리는 해방되었으며 국제문제의 민주주의적 해결에 의하여 조선의 독립은 자주적이어야 한다. 조선완전독립 독립국가의 건설은 국제적 후원을 기대할지언정 조선민족의 손으로만 우리의 힘으로만 달성되는 것이다. 사대주의 他力依存은 우리가 자신의 과대평가를 삼가야 하는 이상으로 배격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조선에 진주한 미·소 양군에 대하여 우리는 그 공과 그 노를 충심으로 감사하여 독립국가건설을 위한 우리 노력에 성원있기를 기대한다. 민주주의 옹호를 위하여 勇戰한 연합국 특히 미소 양국의 진보적 사명이 이 곳에 있을 것이며 그 盡力의 유종의 미도 또한 이 곳에서 결실될 것으로 우리는 확신한다.
2) 조선의 완전독립을 위하여서는 조선민족의 통일이 절대로 요청된다. 일본제주의의 주구가 되어 황민화운동으로 조선민족의 착취와 압박으로 강화시키며 일본제국주의 강탈전을 동양민족해방을 위한 성전이라 하여 조선청년을 전장으로 채찍질하여 몰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죄악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그들은 또 다시 조선민족의 희생에서 저의들의 생명재산을 유지하려고 조선민족진영을 분열시키며 완전독립과 통일정부수립을 저해하고 있다. 그들은 또 다시 외력에 의존하여 민중을 억압하려고 한다. 이 민주반역자들을 배격하고 타도하고 매장함으로서만 우리 민족의 통일은 완성되며 완전독립의 기원은 달성될 것을 조선의 인민은 깨달아야 한다. 민족반역자의 존재와 도량(跳梁)을 허용하는 것은 조선민족의 치욕이며 우리에게 가하여 오는 민족적 회멸(悔蔑)은 이 도배의 음모로 생기는 민족통일의 분열에 기인한다는 것을 명기하라.
3)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은 조선인민의 총의이며 국제문제의 민주주의적 해결의 일환이다. 제2차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소집은 완전독립에의 거보이며 진정한 민주주의원칙에 기한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를 확립하려는 우리 성의와 표현이며 우리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이다. 우리 독립국가건설은 해방될 조선인민에게 부여된 자유이며 이것이 또한 국제헌장의 정신이요 사명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군정은 우리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군정은 모름지기 우리의 완전독립을 후원할 것이요 우리의 통일정부수립을 조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대로 速한 기한내의 군정철폐를 요구하며 기대하나 군정일반을 반대하며 이에 대립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또 그러한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인민정책에는 절대로 반대한다.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아놀드군정장관의 愚弄的 회욕적 성명은 이 반인민정책의 집중적 표현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미 우리의 유감의 뜻을 표명하였거니와 조선인민의 총의로 되고 국제헌장의 정신에 근거를 둔 조선인민공화국은 엄연한 존재이다.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혈투로부터 8月 15日의 해방 이후 우리가 걸어 온 길은 유일 정당한 길이었으며 앞으로도 오직 이 길뿐이었으며 이 길만이 정당한 것이다. 조선인민공화국의 건전한 발전 조선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조선민족은 완전히 통일되어야 하며 조선민족의 총역량을 집중하여야 한다. 민족반역자의 배제에 의해서만 이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민족적 모욕에 대한 유일한 회답이다.
과도한 흥분은 삼가라! 무용의 마찰은 피하라! 그리고 조선인민은 오직 그에게 지향된 길을 굳세게 걸어라! 그에게 부여된 사명을 다하라.
1945年 10月 14日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매일신보 1945년 10월 14일)
이보다 앞서 11일에 발표한 하지의 성명에 대한 ‘인공 중앙인민위원회’의 반박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작일(昨日) 아놀드군정장관의 발표는 우리에게 대한 몰이해이며 조선민족에게 대한 모욕이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조선인 자신의 비열한 자기모독과 왜곡된 보고에 기인한 것임을 생각할 때 민족적 치욕을 느끼며 통분함을 금할 수 없다.
(……)‘자천’이니 ‘참칭’이니 ‘연극’이니 하나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오, 조선인 자신이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정치적 능력을 표명함에 불과하다.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은 미군 상륙 이전의 기존사실이며 제2차 전국인민대표대회가 1946年 3月 1日을 기하여 소집되는 것은 제1차 인민대표대회의 결의에 의하는 것이다. 신국가가 건설되려 할 때 인민의 총의를 모아야 하는 것은 국제헌장의 정신이며 규정이다. 이를 위하여서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소집이 당연한 것이며 또한 최신의 방도라고 확신한다. 자유는 인민의 신성한 권리의 주장이며 행사이다.(……)(매일신보 1945년 10월 11일)
그리고 10월 12일에는 각계 지도자 19명이 아놀드의 성명에 대하여 비판· 비난· 충고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매일신보 1945년 10월 13일자 기사내용을 참고하기 바람)
인공을 중상 비방하는 악의 찬 아놀드의 성명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은 10월 세 번째 주에 “배신자와 애국자”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제작하여 서울 지역에 배포하였다. 이 자료에는 친일파와 반미파라고 알려진 한국인 명단을 공개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미 군정에서 고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 자료에는 한국인들이 일제 강점기 당시 미국에 반대했을 것 같지 않은 행동과 발언을 소개하였다. (주28)
이 팸플릿에는 친일주구가 친미주구로 하루아침에 둔갑한 반역자들의 죄행을 낱낱이 까밝힌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예를 들면, 김성수는 호남 벌의 대지주로서 친일의 대가로 만석꾼이 된 대부호였다. 미군이 진주하자 대미 충신으로 변신하여 고문회의 의장직까지 따냈다.송진우는 일본에서 헌병대의 끄나풀 노릇을 하였고 ‘황국신민화’운동과 민족개량주의 선전에서 앞장섰던 친일파이다. 김용순은 모르핀 거래에서 일확천금하여 조선에서 최대갑부가 되었고 일본군에 대한 의약품 조달에 공로를 세운 자이다.
이용설은 1943년 6월 <경성일보>에 일제의 태평양 전쟁을 고무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던 자이다. “ 미국의 건국사 자체가 기나긴 세월에 걸친 약탈과 유혈의 역사이기 때문에 미국인에게 있어서 정의나 도덕 같은 것은 전연 아무런 의미를 못 갖는다. (…) 미국의 마귀들을 몽땅 태평양 물속에 깊이 수장하지 않는 한 우리 동양의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주29)
보다시피 마땅히 민족반역자로 인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할 역적들이 미군의 비호와 고무를 받으면서 급격히 부활하였다.
12월 12일에는 하지 주한 미군사령관이 군정청출입기자단과 서울방송국을 통하여 인민공화국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내가 통솔한 미군이 조선에 진주하기 전에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의 명칭이 표시하는 바와 같이 이 단체는 한 정당이라기 보다 오히려 정부로 조직된 것이다. 그리고 이 단체의 지도자들도 조선인에게 이것이 그들의 신정부라고 선전한 것이다. 이것이 민간에 많은 오해의 원인이 되었고 조선독립을 원조하려는 나의 노력에도 지장이 되어 왔다.(……) 어찌되었던 조선인민공화국의 명칭과 행동으로 인하여 생기는 오해로 어떤 민중은 조선인민공화국 기치하에 군정에 반항하며 또는 공공연히 혹은 비밀리에 군정행정에 반대까지도 해왔다. (……) 조선인민공화국은 그 자체가 채택한 명칭 여하를 불문하고 어떤 의미에서든지 정부도 아니고 그러한 직능을 집행할 하등 권리가 없다. 남부조선에서 사용하는 유일한 정부는 연합군최고지휘관의 명령에 의하여 수립된 군정이 있을 뿐이다. (……) 앞으로 오해와 가장된 소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떠한 정당이든지 정부로 행세해 보려는 행동이 있다면 이것은 비법적 행동으로 취급하도록 하라고 나는 미주둔군과 군정청에 명령을 내렸고 미군 점령지역내 어느 곳에서든지 연합군의 명시 부여한 권리가 없이 정부행세를 하는 정당이 없도록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만반 조치를 즉시 해 놓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
1945년 12월 12일 재조선미국주둔군최고지휘관
육군중장 존 R. 하지. (출처: 전단 1945년 12월 12일)
조선인민공화국의 경쟁자인 한국민주당은 하지 장군의 발언이 별로 강력하지 않다고 반응하였으나, 조선인민공화국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격렬했다.
인민공화국은 미점령군으로 부터 정부로 승인받으려던 여러 가지 노력을 했지만, 미군정이 인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공격하면서 이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해방직후부터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건준과 인민공화국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특히 여운형이 1945년 11월 12일에 조선인민당(the Korean People’ Party)을 창당함에 따라 조선인민공화국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이 여운형과 함께 조선인민당으로 떠남에 따라서, 결국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도자 중에는 여운형의 오랜 동지인 허헌과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인 박헌영만 남게 된다.
이에 따라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도력과 호소력은 점차 감소하였고, 좌익 세력의 지도력은 점차 여운형과 그가 주도하는 조선인민당, 그리고 새로운 좌익 계열의 조직 민주주의민족전선(the Democratic People's Front)으로 이동하였다.(주64)
이 글의 마무리는 다음과 같은 여연구의 글로 대신하고자 한다.(주31)
하루는 장권이 테러의 후유증으로 앓고 있는 아버지(여운형)를 병문안 와서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주먹으로 땅바닥으로 내리쳤다.
“분합니다. 어떻게 되어 그 쥐새끼만도 못한 매국역적들이 또 다시 이 땅에서 주인행세를 한단 말입니까? 왜 우리는 그때 그자들을 숙청하지 못했습니까?” “나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네. 해방 후 애국적 민주역량이 한데 뭉쳤더라면 한줌도 못되는 매국노들을 능히 제거할 수 있었는데….”
여운형의 눈에도 회한의 빛이 역력히 어리었다. 돌이켜 보면, 해방 후 남조선에 미군이 들어올 때까지는 근 한 달이라는 기간이 있었다. 이때 정세는 애국적 민주역량에 결정적으로 유리했다. 자기 손으로 일제식민지 통치기구를 짓부수고 각급 인민위원회를 수립한 우리 인민의 기세와 열의는 얼마나 높고 희망과 포부는 얼마나 컸던가. 만약 그때 남조선의 애국적 민주역량이 하나로 튼튼히 뭉치어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들을 숙청했더라면 남조선 정세는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갔을 것이다. 우리 인민이 바라는 대로 통일된 자주 독립국가가 세워졌을 것이다.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주>
주21) 심지연, 70∼71쪽
주22) 우리역사넷-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주23) 이기형, 211쪽
주24) 송남헌, 51쪽
주25) 이기형, 212쪽
주26) 심지연, 29쪽
주27) 임영태(2021. 1.4).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②. 통일뉴스.
주28) 주한 미군사2> 2부. 2장. > B 조선인민공화국
주29) 여연구, 161∼162쪽
주30)주한 미군사2> 2부. 2장. > B 조선인민공화국
주31) 여연구, 168쪽
<참고문헌>
츠카사키 마사유키(2007).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 정세 - 일본군 전보문을 통해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3권, 227∼286.
이기형(1984).『몽양여운형』. 서울: 실천문학사.
송남헌(1985).『해방 3년사 1』(1945-1948). 서울: 도서출판 까치 .
심지연 엮음(1986). 『해방정국 논쟁사 1』. 서울: 도서출판 한울.
이완범 (2007).『 1945-1948 한국해방 3년사』. 파주시: 태학사.
정병준(1995).『몽양 여운형 평전』. 서울: 한울.
중앙일보 현대사연구팀(1996).『발굴자료로 쓴 한국현대사』. 중앙일보사.
여연구(2001).『나의 아버지 여운형』. 서울: 김영사.
박세길(1988).『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서울: 돌베개.
송건호(1984). 『한국현대인물사론』. 서울: 한길사.
매일신보 1945년 8월부터 12월말까지.
임태영(2020.12.28).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①. 통일뉴스.
임영태(2021.01.04.) .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②. 통일뉴스.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1945 - 우리역사넷 history.go.kr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필자) 약력
2023년 7월 현재 그는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홍보학과)로 활동중이고, 2019년 12월에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언론ㆍ출판부문)’을 수상한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제주언론 돌아보기1>, <제주언론의 보도방식과 수용자>(공저), <언론이 변해야 지역이 산다: 지역언론의 정체성과 과제>, <브랜드 홍보론>(공저), <고영철 사회비평집: 구라(口羅)>, <지역신문정책과 지원효과>(공저)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캠페인관련 뉴스 프레임 및 뉴스정보의 출처에 관한 연구: 국내 5대 일간지의 세계7대 자연경관선정캠페인 보도를 중심으로” , “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