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당시 뿌려졌던 수 많은 '삐라', 그 내용과 의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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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뿌려졌던 수 많은 '삐라', 그 내용과 의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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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 명예교수, '4.3 삐라' 목적.의도 규명 연구결과 공개
"무력충돌 과정, 토벌대-무장대 '심리전' 대표적 수단 적극 활용"
12일 열린 제주언론학회 학술세미나에서 '제주4.3 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 결과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고영철 명예교수.ⓒ헤드라인제주
12일 열린 제주언론학회 학술세미나에서 '제주4.3 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 결과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고영철 명예교수. 사진=함광렬 기자 ⓒ헤드라인제주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제주4.3의 무력 충돌과정에서 소위 '삐라(전단)'를 활용한 심리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된 가운데, 당시 살포됐던 다양한 유형의 삐라들의 내용과 의도를 분석한 연구 결과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는 12일 오후 KCTV제주방송 공개홀에서 열린 '제주4‧3 저널리즘과 평화 네트워크'를 주제로 한 제주언론학회 학술 세미나에서 '제주4.3 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4.3기간 동안 무력충돌의 당사자인 두 행위 주체가 살포한 삐라들을 설득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발행주체, 메시지 주제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심리전의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 밝히려는 목적에서 이뤄졌다.

연구 범위는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로 잡았다. 제주4.3특별법에 정한 제주4.3기간보다 앞당겨 넓게 잡은 것은 각종 문헌 확인 결과 해방직후 각종 반미 시위가 발생하고 현수막과 벽보가 등장하고 삐라가 살포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기간 문헌 및 자료들을 정독하면서 그 속에 나오는 '삐라' 또는 전단, 벽보 그리고 등사기(가리방)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 또는 구절(句節)을 모두 추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결과 총 300여건의 삐라가 수집됐고, 중복되는 내용을 추려된 후 최종적으로 206건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분석 결과, 우선 삐라가 뿌려진 시기는 1948년 4·3 이후 1948년 8.15 정부수립 이전시기가 33.5%(69건)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3·1절 기념행사 이후 1947년 3.1~1948. 4·3이전 27.7%(57건) △1949년 1월부터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이전 16.0%(33건) △8·15 정부수립 이후부터 1948년 12월 말(대토벌기) 15.5%(32건) △1945년 8.15 해방 이후 3·1절 기념행사 이전 3.9%(8건) △6·25한국전쟁발발 이후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될 때까지 3.4%(7건) 순이다.

12일 열린 제주언론학회 학술세미나에서 '제주4.3 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 결과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고영철 명예교수.ⓒ헤드라인제주
12일 열린 제주언론학회 학술세미나에서 '제주4.3 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 결과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고영철 명예교수. 사진=함광렬 기자 ⓒ헤드라인제주

고 교수는 "시기별로 보면 1945년 8·15행방이후부터 3·1절 발포 사건 이전까지 살포되거나 부착된 삐라는 전체의 3.9%에 해당하는 8건에 불과했지만, 이후 급격히 늘어났다"면서 "이는 '소리없는 종이폭탄'이라고 불리는 삐라가 심리전의 주요 무기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근거들이다"고 말했다.

삐라를 발행한 주체의 경우 좌익진영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공식명칭 없이 막연히 좌익진영이 제작 살포한 것으로 알려진 삐라가 123개(59.7%)로 가장 많았고, 이어 군경토벌대 28개(13.6%), 학생 17개(8.3%), 남로당 14개(6.8%), 경찰 8개(3.9%), 우익단체 및 정당 8개(3.9%)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시기별로 보면 해방 직후부터 3.1절 행사 이전에는 익명 좌익이 6개(75.0%), 우익단체가 2개(25.0%)를 제작 살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발행주체 유형을 좌익진영, 우익진영, 학생 등 3개로 분류해 재분석한 결과, 좌익진영이 발행(부착)한 삐라가 140개(건)(68.0%)로 우익진영이 살포한 46개(22.3%)보다 3배 이상 많았다. 학생도 20개(9.7%)을 발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발행주체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좌익진영의 삐라살포 비율은 8·15 해방이후부터 1948년 말까지 계속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1949년 1월 기점으로 대폭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 반면에 군경토벌대를 위시한 우익진영의 경우 그 반대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학생 집단의 경우도 3.1절 행사 이후 무력충돌이 벌어졌던 시기에 집중적으로 삐라를 제작 살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발행 주체별로 삐라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발행 주체에 따라 주제에 있어서도 차이가 명확하게 확인됐다. 

우익진영의 경우 귀순권고 삐라(28건, 65.1%), 현상금/대주민 협조요청 삐라(5건, 11.6%), 회원모집(4건, 9.3%) 등과 관련 삐라를, 전체 평균치보다 더 많이 살포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좌익 진영에서 살포한 삐라의 경우 저항 유도/투쟁촉구 삐라(26건, 31.3%)와 경고위협/공포감 조성 등(25건, 30.1%)과 관련된 삐라가 많았다. 

발행주체에 따라 삐라에서 주목하는 대상도 달라졌다.

우익진영의 삐라는 인민군 유격대와 산쪽으로 피난 간 주민들을 적 또는 설득 대상으로 간주해 주목한 반면에, 좌익진영에서는 경찰, 우익단체 및 친일파, 미군정, 이승만 등 매우 다양한 집단을 주목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고 교수는 "우익진영에 비해 화력이 열세에 있었던 좌익진영에서는 '소리 없는 폭탄'으로 일컬어지는 삐라를 무기처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결과와 관련해, 고 교수는 "많은 기록에 의하면 4·3 기간 중에 무장대와 토벌대, 토벌대에는 미군정, 경찰, 군인 그리고 대동청년단을 비롯한 우익 정당단체 등을 포함하여 무력충돌이 있었는데, 이 뿐만 아니라 두 주체간 심리전을 중요하게 활용했던 것으로 확인된다"면서 "심리전은 전투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무력충돌의 당사자인 양측 모두가 4·3사건기간동안, 전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각종 포고문, 담화문, 경고문, 성명서, 호소문, 투쟁촉구문 등을 수시로 발표했다"면서 "이것은 상대방의 전투의지를 소멸시키거나,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는 시키기 위한 조치들"이라고 말했다.

또 "때로는 벽보 형태로, 때로는 팸플릿 형식으로, 때로는 신문형식으로 온갖 종류의 전단들이 격한 목소리를 내뿜으며 곳곳에 뿌려졌는데, 5.10 단독선거 단정반대 투쟁 선전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는, 아침마다 깨어나 마당에 나가보면 삐라들이 눈처럼 소복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4.3 기간동안 뿌려진 삐라는 신문이나 못지않게 대중들을 동원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이번 연구의 의의를 강조했다.   

12일 열린 제주언론학회 학술세미나.ⓒ헤드라인제주
12일 열린 제주언론학회 학술세미나. 사진=함광렬 기자 ⓒ헤드라인제주

한편, 이날 세미나는 제주언론학회(회장 김동만)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및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공동으로 마련됐다.  

고영철 교수 외에 이완수 동서대학교 미디어콘텐츠대학 교수는 '기억에 대한 기록: 제주4·3 사건에 대한 기억 재현 방식'에 대해, 이정원 제주한라대학교 방송영상학과 교수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통한 평화 네트워크 확대의 현실적 한계,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각각 주제 발표를 했다.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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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2023-05-15 13:34:40 | 175.***.***.94
가록하지 않으면 후세들읔 알수가 없죠. 특하 4.3에 대한 왜곡과 폄하가 여러형태로 아직도 존해해 가슴아픈데, 교수님의 노년의 연구가 소중하게 와닿습니다

대단 2023-05-13 00:09:22 | 175.***.***.190
대단하십니다. 명예교수님.
70년 넘은 삐라 다 찾아내어 분석하는 일이 쉽지 않으셨을텐데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