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3) 제주도 건준위와 인민위원회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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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3) 제주도 건준위와 인민위원회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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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회에 걸쳐 8·15 해방이후부터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주사회에서는 어떤 정치사회단체들이 태어나 어떤 활동하다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출현했던 좌우익의 흥망사이면서,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이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이 속에는 제주4.3사건 발발이전에 뿌려진 삐라의 생산 주체들에 관한 이야기와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과 배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에 연재되는 글들은 지난 5월 12일 ‘제주언론학회’·‘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희생자 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고영철이 발표한 내용(제주4·3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가운데, 원고분량 관계로 세미나 자료집에 다 싣지 못했던 내용들 중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이 연재는 자료집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된다. 미력하나마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필자 주>

▲글 싣는 차례

1)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및 해소

2-1) 미군의 진주, 조선인민공화국 탄생과 좌절

2-2)조선인민공화국의 각료 발표와 아놀드와 하지의 인공 부인 성명

3) 조선건국준비위원회 濟州島 지부 결성

4) 좌익단체 및 정당 출현

5) 우익단체 및 정당 출현

6) 좌익쇠퇴, 우익의 부상 징조들(신문광고 분석)

7) 좌익쇠퇴, 우익의 부상 징조들(남로당 탈당 성명서분석)

8) 신문형 삐라의 解題(➀∼➆)

앞에서는 거시적 입장에서 8·15 해방과 동시에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9월 6일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이어 9월 8일 조선을 점령한 미군이 조선총독부로부터 통치권을 이양 받아서(9월 12일) 미군정을 실시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모습과 자주독립 민주적 국가를 건설하려던 인공의 꿈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렇다면 제주지역에서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제주지부와 인민위원회가 언제쯤 결성되고 도대체 어떠한 활동을 했을까? 이들의 결성과정과 활동 내용 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주요 문헌 및 자료들을 출판 연도별로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여러 문헌을 언급한 이유는 건준과 인민위원회와 관련된 기록을 조사하다 보면 어느 문헌의 기록과 증언이 정확하고 옳은 것인지 판단하기가 애매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의 진위(眞僞)를 가려내기 위해 많은 자료를 뒤지게 되었음을 밝혀둔다.

① 김봉현·김민주공펀(1963).『濟州島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일본대판:文友社.

② 부만근(1975).『광복제주30년』. 文潮社.

③ 김봉현(1978).『濟州島 血의 歷史 - <4·3> 무장투쟁의 기록』. 일본: 도서간행회.

④ John Merrill(1980). The Cheju-do Rebellion. 『Journal of Korean Studies』, No. 2.

⑤ 강용삼・이경수 편저(1984). 大河實錄 濟州百年. 서울: 태광인쇄사.

⑥ 양삼규(1986).『연동향토사』. 연화친목회.

⑦ 조남수(1988).『4·3의 진상』. 도서출판 월간관광제주.

⑧ 제주4·3연구소(1989). 『이제사 말햄수다』1권. 서울:한울.

⑨ 박용후(1990).『최남의 港都- 摹瑟浦』. 도서출판 제주문화.

⑩ 김동만(1991). 제주지방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역사비평』, 제14권.

⑪ 제주4·3연구소(1992). 『4·3 長征』 5호. 제주: 나라출판.

⑫ 제주도(1993).『제주도지』 제2권. 제주: 泰和인쇄사.

⑬ 제민일보 4·3취재반(1994). 『4·3은 말한다』제1권. 서울: 전예원.

⑭ 한라일보사(1995).『한라연감 1996』. 제주: 耕信인쇄사.

⑮ 신상준(2000).『제주도4·3 사건』(상권). 한국복지행정연구소.

⑯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2003).『제주도4·3사건 진상보고서』. 도서출판 선인.

⑰ 츠카사키 마사유키(2007).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 정세 - 일본군 전보문을 통해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53), 227-256쪽.

⑱ 김종민(2017.4.11) . 갑작스런 해방...제주도 '건준' 결성은 언제? 『제주의 소리』.

(註: 본 발표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 보다 앞서 이미 2017년 4월 11일 <제주의 소리>에 일본 학자 츠카사키 마사유키(塚崎昌之)의 논문(2007)을 인용해서, 현재 定說로 통용되고 있는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결성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지적한 김종민(4·3 중앙위원회 전문위원)의 글을 뜻밖에 발견하였다. 이 신문기사는 내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하나는 우리의 모든 연구는 앞 사람들이 한 연구결과를 계속 수정하면 눈덩이처럼 불려나가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관계문헌의 조사과정의 중요성을 재차 되돌아보게 한 점이었다. 김종민의 글을 사전에 알았으면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 도(島)건준과 인민위원회의 정확한 결성일이 언제인지를 확인하려고 헛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표 1>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 결성일 등 비교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인민위원회(島人民委員會)의 결성일(9월 23일)은 어느 정도 일관성을 보이고 있지만,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일(9월 7일, 9월 10일, 10월 9일과 10일, 10월 1일과 10월 9일 등등)에 대해서는 어느 주장이 정확하고 옳은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또한 어디서부터 기록이 잘못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자료의 출처를 명시하지 않고 서로가 베끼다보니 생기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오류가 어디서부터 발생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우선 이 사건을 가장 먼저 문자화한 3개의 문헌 내용을 비교해 보겠다. 제주도에서도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는 것을 맨 처음 알린 것은 김봉현·김민주의 공편(共編)『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1963)이다. 그 다음은 부만근의『광복제주30년』(1975)이고, 그 다음은 김봉현의 『濟州島 血の歷史-4·3武裝關爭の記錄』(1978)이다. ➂은 ➀의 수정·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문헌에 기술된 관련 내용을 발행연도별도 살펴보겠다.

①『 濟州島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에서 이 사건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애국투사들은 인민들의 절대적인 지원하에 해방 초기 각지에 산재하였던 유명무실의 제단체의 대표들을 규합하고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1945. 9.10)하였다. 이들의 대표들은 미제가 파견하여 온 <워달-文達>(미군정 법무관) 島司 代理인 千田 사무관, 서장, 永津 군사령관 등의 회담에서 다음과 같은 3개 항목을 요구하고 완강히 투쟁하였다.

1.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을 위한 정치활동에는 절대 간섭과 방해를 말 것.

2. 일군(日軍)과 경관(警官)은 즉시 무장해제 할 것.

3. 행정은 건준(建準: 약칭)이 도(島) 읍(邑) 면(面)의 결성과 함께 양도할 것 .

이상은 우리민족의 당연한 권리의 요구이며, 도민들이 당면한 건국사업을 수행하는데 가장 합리적이며 적당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미일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군의 도(島)군정장관이 부임치 않았다느니 중앙청에서의 지령이 없다느니 하면서서 이를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소지하고 있었던 무기로써 이들을 위협 공갈하고, 심지어는 어떻게 해서라도 인민들의 조직체를 파괴해보려고 발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국적인 인민들은 美日침략자들의 잔악한 무력탄압을 일축하고 부강한 자주 통일과 완전한 민족 해방을 위한 조직체들을 조직하는 전면적인 정치투쟁으로 발전 지향하려는 애국역량의 총결집체인 제주읍 인민위원회가 1945년 9월 15일 향교에서 결성되었다. 9월 하순까지에는 이와 같은 조직체가 제주도 전역에 걸쳐 빈틈없이 확립되었던 결과, 섬사람들이 그렇게 열망했던 제주도인민위원회도 감격의 파동 속에 농교에 결성(1945. 9.22)되었다.

② 광복제주30년(1975)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해방 한달 뒤인 45년 9월부터는 도내에 정치 및 사회단체들이 생기고 민족진영과 좌익세력간에 대립이 시작됨으로써 사회가 불안을 띠어 갔다.

8월 17일 건국준비를 위해 회합하던 일부 인사들이 패전일군에 체포되어 권총 위협과 구금을 당한 후 한동안은 정치단체결성 움직임이 뜸하더니, 9월 7일 건국준비濟州島위원회가 본도 최초의 정치단체로 결성됐다. 이 단체는 여운형· 안재홍 등이 중심이 돼 서울에서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의 하부조직이었다.

이어서 9월 중순에는 공산청년동맹 濟州島위원회, 9월 22일에는 제주도인민위원회, 12월에는 조선공산당濟州島 위원회 등 좌익단체들이 생겼다.(43쪽)

➂『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1963)가 출판되고 나서, 약 15년이 지난 뒤 김봉현의『濟州島 血の歷史』(1978)가 출간되었다. ➂는 ➀의 내용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정정한 수정·증보판이라고 할 수 있다. ➀과 ➂의 책자를 펴놓고 비교해 보면 많은 부분이 수정·보완된 것을 알 수 있다.

➂에서는 앞의 ➀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수정·보완하고 있다.(207-208쪽)

점차 타오르는 도민대중의 열기 속에 9월초, 몇몇 독립운동 그룹이 결집하여 ‘도(島)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다음의 3개 항목을 도사(대리 千田 사무관)와 제58군 香川 사령관에게 엄중히 전달했다.(註: 제58군 사령관 香川은 永津佐比重의 오기로 생각된다)

1.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을 위한 정치활동에 절대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을 것

2. 일본군과 경찰은 즉각 무장 해제할 것

3. 행정권을 도·읍· 면의 건준 결성과 동시에 이양할 것

이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하여 그들은 “ 제58군은 여전히 존재하며 지금도 여기에 건재해 있다”, “아직 상부에서의 지시가 없다”, “미군정 장관이 결정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그것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라고 하며. 무력으로 위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도민을 ‘민족통일전선’으로 결집시키기 위한 운동이 강력히 전개됐다. 그 결과 무서운 속도로 조직이 확대되었다. 우순 제주읍 인민위원회(9.15)를 시작으로 각 지방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거기에서 선출된 대표 의원에 의해 제주도 인민위원회(9. 22)가 결성되었다.

대회에서는 민주적인 모든 도민을 결집하여 첫째, 자주· 통일 ·독립이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투쟁과제라는 원칙과 둘째, 민주주의적 건국 사업에 있어서 최대의 장애로 되고 있는 일제 잔재세력과 국제 파시스트의 주구를 청산하여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적 발전에 기여한다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정책노선이 채택되었다. 이것과 병행하여 청년·부녀·교육자· 노동자· 문화인의 운동도 활발히 진행되어 9월 하순 전도적인 통일기구인 ‘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 결성되었다. 95-96쪽

④ John Merrill(1980). The Cheju-do Rebellion. 『Journal of Korean Studies』, No. 2.

(註: 존 메릴은 제주4·3사건을 주제로 1975년에 미국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 사건과 관련된 서술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노영민, 1988, 27쪽).

미국은 점차 제주도 지배를 확대해 갔다. 미군의 제주도 배치는 약간의 차질이 있었는데, 우선 일본법령을 폐기하고 일본군 송환계획을 포병부대가 수행하였다.

11월 중순이 되자 미 59사단이 상륙했다.

그동안 인민위원회가 ‘제주도 유일의 정당, 정부’(E. grant Meade, 1951, p. 185)로서 위치를 확고히 다져가고 있었다(주: 제주도 행정기관(읍· 군 등)이 인민위원회에 의해 접수되었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미군이 최초로 상륙하기 5일전 9월 23일 설립되었다. 처음 이 단체는 해방 후 한 달 정도 우후죽순격으로 결성된 청년, 정치단체 중의 하나였다. 해방후 한 달 정도 주둔했던 일본군은 이 활동을 억제했다. 몇 개의 정치그룹이 서로 암투하는 제주도의 정치적 상황은 불안정했다. 11월 초 백여 명이 다친 좌·우익의 무장충돌로 사태가 정리되었다.(김봉현 ·김민주(편), 13쪽/ Meade, 185쪽)

1980년에 발표한 자신의 논문에서 존 메릴은 제주도 인민위원회에 관해서는 여러 차례 기술하고 있지만, 건준에 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건준의 활동에 관해 기록할만할 특이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건준이 결성되자마자 얼마 없어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론으로 되돌아가 앞에 나오는 ➀과 ➂문헌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일이, 김봉현·김민주의 공저(1963)『濟州島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 나오는‘9월 10일’은 아닌 것만을 확실히 보인다. 왜냐하면 『濟州島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의 개정판이라고 볼 수 있는 김봉현의『濟州島 血의 歷史』(1978)에서‘9월 10일’을 ‘9월초’라고 수정했기 때문이다.

김봉현이 뒤늦게나마 건준의 결성일이 잘못 기술된 것을 알고 ➂에서 ➀의 내용을 수정· 보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대다수의 저술가와 연구자들이 ➂의 내용을 무시한 채, ―특히 관계 문헌들을 철저히 고찰하지도 않은 체― 잘못 서술된 ➀의 내용을 무작정 베껴 전달하다보니 오류가 사실인 것처럼 통설로 고착화되고 재생산되어 왔다. 그 원인 중 하나는 1차 자료부족과 오래된 기억에 의존한 증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쓴 글이나 말은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여 무비판적으로 베껴 쓴 결과들이다.

따라서 <표1>에 제시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결성일과 관련, 위의 문헌의 기록이 전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건준과 인민위원회의 정확한 결성일은 언제로 봐야하는가?

이를 추론할 수 있는 자료로는 츠카사키 마사유키가 2007년에 발표한 논문(‘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정세-일본군 전보문을 통해서’)에 수록된 제주주둔 제58군 사령부의 전보문과 『조선인민보』(1945년 10월 10일)의 기사 그리고 <주한미군사> 3편의 기록을 들 수 있다. <고영철 /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다음편에 내용 계속 이어집니다. 

<주>

(주1) 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오대진, 대표 안세훈, 김영관, 강성모, 조남수 외 2명

(주2) 도건준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오대진(吳大進 대정면), △부위원장 최남식(崔南植 제주읍), △총무부장 김정노(金正魯 조천면), △보안(치안)부장 김한정(金漢貞 중문면), △산업부장 김용해(金容海 애월면), △집행위원 김시탁(金時鐸 조천면) 김필원(金弼遠 조천면) 김임길(金壬吉 대정면) 이원옥(李元玉 대정면) 조몽구(趙夢九 표선면), 현호경(玄好景 성산), 문도배(文道培 구좌면)등 10여명(출처 : 이운방 (85. 대정면 하모리 ,당시 대정면 건준 대표)의 증언).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필자) 약력

2023년 7월 현재 그는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홍보학과)로 활동중이고, 2019년 12월에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언론ㆍ출판부문)’을 수상한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제주언론 돌아보기1>, <제주언론의 보도방식과 수용자>(공저), <언론이 변해야 지역이 산다: 지역언론의 정체성과 과제>, <브랜드 홍보론>(공저), <고영철 사회비평집: 구라(口羅)>, <지역신문정책과 지원효과>(공저)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캠페인관련 뉴스 프레임 및 뉴스정보의 출처에 관한 연구: 국내 5대 일간지의 세계7대 자연경관선정캠페인 보도를 중심으로” , “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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