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삐라 관련자 증언을 통해 본 '샛별' 신문의 실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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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삐라 관련자 증언을 통해 본 '샛별' 신문의 실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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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4·3당시 살포된 '신문형' 삐라 <5-3> 샛별

수회에 걸쳐 8·15 해방이후부터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주사회에서는 어떤 정치사회단체들이 태어나 어떤 활동하다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출현했던 좌우익의 흥망사이면서,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이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이 속에는 제주4.3사건 발발이전에 뿌려진 삐라의 생산 주체들에 관한 이야기와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과 배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에 연재되는 글들은 지난 5월 12일 ‘제주언론학회’·‘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희생자 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고영철이 발표한 내용(제주4·3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가운데, 원고분량 관계로 세미나 자료집에 다 싣지 못했던 내용들 중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이 연재는 자료집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된다. 미력하나마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필자의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처음 제시한 '글 싣는 차례'의 순서를 바꿔 '신문형 삐라'부터 계속 연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양해를 바랍니다.<필자 주>

<5-3> 샛별

『샛별』은 남로당 제주도당 선전부에서 주간으로 발행했던 기관지 가운데 하나로 추정된다.

현재 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 문헌에 등장한다.

① 제민일보 4·3취재반(1997), 『4.3은 말한다』 제4권, 423-424쪽.

② 제주4·3연구소· 제주4·3평화재단(2010), 『갈치가 갈치 꼴랭이 끊어 먹었다 할 수밖에』, 제주: 도서출판 한그루. 65-82쪽.

①은 강행일의 증언을, ②는 강두봉의 증언을 토대로 『샛별』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둘 다 제주 4·3 당시 산으로 피신해 도당(또는 면당)의 선전부와 조직부(연락병)등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토벌대에 체포되었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이다.

우선 강행일의 증언채록부터 살펴보자.

조천중학원생이던 강씨는 마을에 삐라를 붙이다 토벌대에게 쫓기게 되자, 이른바 악명 높은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던 1948년 11월께 입산해 선전부에 배치됐다. 강씨는 1949년 3월께 헌병대에 붙잡혔지만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뒤라 방위군에 편성됨으로써 목숨을 구했다(423쪽). 그가 도당 사령부 선전부에서 활동했던 기간은 약 5개월 정도이다. 그는 산에서 자신이 했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술하고 있다.

도당 사령부는 어승생 오름 서쪽 밀림지대에 있었습니다. 도당 산하에는 선전· 조직· 총부· 군사부가 있었지요. 당책과 각 읍·면책 등 소위 캡들의 모임 때 습격 일시와 장소 등이 결정됐습니다. 난 선전부에 소속돼 『샛별』이란 신문을 주간마다 발간했습니다. 16절지 크기의 마분지 2장 분량이었는데(주1), 약 5백부를 등사했습니다. ① 주로 노랑개(주: 군인의 별칭) ○○명 섬멸, 검은개(주: 경찰의 별칭) ○○ 사살 등 전과를 적었고 중산간 대학살을 알리면서 봉기를 선동하는 문구로 썼습니다.  그런데 당시 무장대 병력은 미미했습니다. 또 도당 비밀아지트가 발각되는 바람에 여러 번 쫓겨 다녔습니다. 무장은 군사부만 갖고 있었습니다.

군사부는 모두 4개 지대로 나뉘었는데 제1지대( 조천면 관할)는 이덕구(신촌리 출신), 제2지대(구좌면)는 김대진(신촌리 출신), 제3지대(남원면)는 김의봉(와흘리 출신), 제4지대(대정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오아무개(대정면 출신)가 각각 맡았습니다. 이중 제1지대만 1백 명 안팎이고, 나머지는 50명가량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모두 합쳐야 250명 가량인데, 이중 무기가 없는 대원도 많았습니다. 또 제4지대는 예비지대입니다. 이러니 본격적인 토벌전에 맞설만한 힘은 없었습니다(제민일보 4·3취재반, 1997, 424쪽).

다음은 강두봉(가명은 해인)의 증언 채록 가운데 일부이다.

그도 강행일처럼 조천중학원에 다니던 시절, 1947년 6월경 조천 신작로에 신문지와 책을 찢어서 붓으로 ‘신탁통치 절대반대’라는 삐라를 써서 붙인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동년 8월경 북촌리를 경유해 입산한 자이다. 그는 입산 후 도당과 면당 선전부와 조직부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11월경부터 대토벌전이 전개되자, 도당의 지시에 따라 3인 1조가 되어 산에서 내려오다가 두 하르방(주: 할아버지)과 함께 1949년 3월경 토벌대에 붙잡혀 헌병대로 넘겨진다. 두 사람의 증언채록 내용을 읽다보면 이명동인(異名同人)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단, 두 사람의 증언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면 이들의 입산시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강두봉이 말하는 『샛별』신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선전부는 삐라하고 『샛별』신문을 제작했습니다. 그것을 각 면당으로 갖고 가는 거예요. 공문발송이나 연락도 하고. 그때 전부 등사기로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각 면당에 배부하고 하는 것이 그럭저럭 1년이 됐습니다. ‘샛별’은 남로당 기관지였는데, 과장도 좀 있었어요. 취재는 따로 다니지 않고 정보가 다 올라왔어요. 선전부장이 작성하고 카프한테 가서 사인을 받고 나서 발간을 합니다. 배포는 조천면에 10부, 구좌면에 10부, 각 면마다 몇 부 해서 조직부로 넘기면 연락병들이 가져갑니다.

내용은 신문 발간하듯이 조그만한 사건을 이만큼씩 부풀려서 쓰고, 정보에서 누가 왔다 하면 그걸 가지고 또 다 씁니다. ②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도 정보가 올라와서 ‘샛별’ 기관지에 실었습니다. 군인들이 입산한 것도 올라오는데 이름까지 다 올라오지요. 군인들이 올라온 것을 보면 주목받아서 9연대에 들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전요원은 10여명 정도 되지만 중학원생으로는 나 하나뿐이었습니다. 농업학교 학생도 있었고······. 선전부에서는 등사판 져서 다니지, 흑판 가져다니지, 종이 가져다니지 열 명이면 다 한 짐씩 져야 했지요. 또 무전기도 들고 다니는데, 이 무전기는 제주도 안에서 치는 것입니다. 각 면당과 기관으로 칩니다(76쪽).

(……) 도당이 교래리에 있을 때 총토벌 명령이 내려 온 모양입니다. 그 때 도당에서는 어떻게 말했냐 하면, “여기 있으면 다 잡힐 것니까, 3인조로 해서 다 해산하라”고 해요. 그때 “이 토벌이 끝나면 어디 어디서 만나자고 해서 비밀번호를 줬어요. 다 내려와서 잡힌 사람들은 잡히고, 귀순한 사람들은 귀순하고 거의 잡혔습니다. 군·경 합동 2만여 명이 토벌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음력으로 10월경이었어요.

(……) 그때 3인1조를 편성해서(피해 있다가) “며칠 후에 토벌이 끝나면 어디로 오라”고 했어요. 그때는 한라산을 포위해서 토벌할 때니까 아주 시급할 때였습니다. 토벌대가 올라오니까 산이 포위되어 나올 틈이 없게 되고. 굶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우리 3인조는 나하고 하르방 2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명도암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때가 3월쯤 됐어요. 비행기로 자수하라고 삐라 뿌리고 해서 많이 내려왔어요. 주둔소가 있는 것도 모르고 내려와서 보니까, 명도암에 성이 막 쌓여있어요. (……) 거기에 잠복하고 있었던 군인들이 총을 빠방 쏘고 하면서, 두 하르방은 도망가다가 잡히고 나도 잡혔습니다. 잡혀서 헌병대 봉개출장소에서 와서 수갑들을 채웠습니다(78쪽).

두 문헌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첫째, 『샛별』은 16절지 크기의 마분지 2장정도 분량으로 매주 마다 등사판으로 간행되었으며, 1회에 약 5백부를 등사해 도당의 소속 연락병들이 각 면당에 10부씩 배달했던 것으로 보인다.(주2) 이로 미루어 보면 『샛별』은 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기관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도당본부가 해체되기 전까지는 도당과 면당 그리고 무장대간에는 무전기로 정보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샛별』이 언제부터 제작·배포되기 시작하여 중단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5·10단독선거 반대투쟁 이후부터 11∼12월 중산간 대토벌전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는 수시로 제작 배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밑줄 친 ➀과 ➁번을 들 수 있다.

밑줄 친 ①번은 『샛별』이 1948년 음력 10월경부터 12월 말까지 중산간 마을에 주민 소개령을 내리고 대토벌전이 전개되던 시기에 있었던 토벌대의 양민 대학살 모습과 무장대의 크고 작은 전과 등을 보도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밑줄 친 ②번은 박진경 연대장이 부임한 직후인 5월 20일 9연대 소속 병사 41명이 모슬포 부대에서 무기와 탄약 등을 갖고 집단으로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기 위해 입산한 사건과 1948년 6월 18일 새벽 3시경 박진경 대령(제주도 경비대 제11연대장 )이 그의 숙소에서 부하에게 피살된 사건(6사단 G-2 보고서, 1948년 6월 18일)을 말한다. 단편적인 것이지만 이들의 편집내용을 보면 『샛별』은 당원들의 투쟁의지와 결의를 고양시키고 항쟁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보도 내용을 입증할 실물삐라라든지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있지가 않다.

셋째, 강두봉의 증언이 전부 사실이라고 한다면, 남로당 제주도당 지휘부의 방침에 따라 1949년 3월경에 강두봉과 3인 1조가 되어 하산하다가 군경 토벌대에 붙잡힌 두 하르방 가운데 한분은 도선전부장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중앙에서 내려온 ‘오르그’로 추정된다. 따라서 역산해보면 대략 1949년 2월경부터 제주도 도당 간부와 행정원들이 조를 편성해 피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샛별』을 계속 발간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는 『이제사 말햄수다』 제①권(1989)에 나오는 네 번째(조천중학원 1; 47∼51쪽)와 다섯 번째 증언(조천중학원 2 ; 52∼54쪽)이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증인은 같은 사람이다. 이들의 이름은 익명으로 처리되었지만, 이들의 구술 내용으로 보아 익명의 조천중학원생은 강두봉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주3)

그 근거로 입산동기와 과정, 강씨의 어머님이 처형당한 이유와 날짜(도피자 가족/1949년 1월 4일 총살) 그리고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 수 있다.

△ 1949년 가을(주: 봄의 오기로 보임)에 산에서 내려올 때 상황을 얘기해 주십시오.(주: 증언 채록자의 질문)

그때는 대토벌을 헐 시기라. 군인, 경찰이랑 온 사름덜이 백록담까지도 올라완 토벌을 헐거렌 소문이 돌았주.

높은 사름덜도, “큰일났다. 그냥 있으면 다 죽는다. 그러믄 몇 사람씩 짝을 짓고 피난민들하고 같이 마을로 내려간다”. 일이 그렇게 된거라. 우린 3명씩 조를 짜고 내려오는디 나하고 한 조가 된 사름은 도선전부장허고, 중앙에서 내려온 오르그라. 선전부장은 어디출신인지 잘 모르고, 이름이 김인관이랜 했주만, 그것도 가명이라. 우린 귀순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려오는 거라. 아래서야 귀순도 했주만 선전부나 조직부에는 귀순이렌 헌 건 없어. 그냥 내려오는 거라(50쪽).

(……) 앞의 담이 있는 쪽에서 “왈카닥닥, 왈카닥닥” 소리가 나더니만은, “누구냐 손들엇” 허대. 잠복에 걸린거라. 손들고 나갔주. 그땐 수갑이 아니라, 포승줄로 우릴 묶언 데려가. 봉아름(주:봉개)엔 제 1주둔소렌 허연, 헌병 주둔소가 있었는디, 거기로 데려가는 거라. 주둔소장이 조연구렌 헌 헌병인디 육지사람이라. 그 방으로 데려가데. (……) 그 창고에서 6개월을 살아시난 어떻게 될거라. 어덩이가 다 헐고, 깡보리밥에 소금만 먹어시난(……) 죽어질 것 닮데. 6개월 살아 나오난(51쪽). (이하 생략)

<표> 강두봉과 강신일의 구술내용 비교

<주>

주1) 절지(切紙)는 전지(全紙)를 나눈 종이라는 뜻이다. 이 전지를 16으로 나눈(切) 종이(紙)가 16절지(切紙)고, 8로 나눈(切) 종이(紙)가 8절지(切紙)다. 8절지는 B4에 가깝고, 16절지는 A4와 가깝다. 즉 16절지는 대략 일반 공책의 크기이고. 8절지는 학교에서 시험 볼 때 시험지로 사용되었던 종이를 말한다.

주2) 전라남도의 한 행정구역이었던 濟州島는 1946년 8월 1일 미군정의 군정법령 제94호(1946.7.2 공포)에 따라 제주도(濟州道)로 승격되었으며 제주도(濟州道) 아래에 북제주군과 남제주군 2개 군을 설치하면서 1도 -2군- 1읍-11면(조천면, 구좌면, 애월면, 한림면, 대정면, 안덕면, 중문면, 서귀면, 남원면, 표선면, 성산면) 체제가 되었다.

그리고 1956년 7월 8일 법률 제393호에 의해 「한림면」이 「한림읍」과 「한경면」으로 분리 설치된다.

주3) 강두봉이 『이제사 말햄수다』 제1권에서 익명으로 한 증언에서는 두 하르방의 정체(신분)를 밝히고 있지만, 실명으로 한 증언 (②)에서는 두 하르방의 신분을 숨기고 있다. 필자는 증언 채록자들을 만나서 그 이유를 확인하지 못했다. 재검증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필자) 약력

2023년 7월 현재 그는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홍보학과)로 활동중이고, 2019년 12월에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언론ㆍ출판부문)’을 수상한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제주언론 돌아보기1>, <제주언론의 보도방식과 수용자>(공저), <언론이 변해야 지역이 산다: 지역언론의 정체성과 과제>, <브랜드 홍보론>(공저), <고영철 사회비평집: 구라(口羅)>, <지역신문정책과 지원효과>(공저)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캠페인관련 뉴스 프레임 및 뉴스정보의 출처에 관한 연구: 국내 5대 일간지의 세계7대 자연경관선정캠페인 보도를 중심으로” , “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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