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생존수형인 2차 재심 열리나...8일 개시여부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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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생존수형인 2차 재심 열리나...8일 개시여부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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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법, 8일 수형인 8명 제기 재심청구 수용여부 결정
불법 군법회의 '억울한 옥살이'...일반재판 수형인 1명도 포함
지난 6월, 4.3 재심재판 개시결정을 위한 첫 심리가 시작되기 전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청구인들. ⓒ헤드라인제주
지난 6월, 4.3 재심재판 개시결정을 위한 첫 심리가 시작되기 전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청구인들. ⓒ헤드라인제주

72년 전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구순의 4.3수형인에 대한 재심 개시여부가 8일 결정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장찬수)는 8일 오전 10시 법원 201호 법정에서 4.3수형인들이 청구했던 4.3재심에 대한 개시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이번에 재심을 청구한 수형인은 총 8명으로, 이중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의 김묘생 할머니(92)를 비롯해, 김영숙(90. 제주시), 김정추(89. 부산시), 송순희(95. 인천시) 할머니와 장병식(90. 서울) 할아버지, 지난 3월과 7월 타계한 故 변연옥 할머니(향년 91세. 경기도 안양)와 故 송석진 할아버지(향년 94세. 일본 도쿄) 등 7명은 불법군사재판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사례다. 

불법군법회의 사례의 경우 지난해 열렸던 1차 재심에서 모두 무죄취지의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진 바 있는 만큼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질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나머지 1명은 일반재판으로 투옥됐던 사례의 김두황 할아버지(92)이다. 일반재판 생존수형인의 재심 청구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 할아버지의 경우에도 검찰이 "판결문이 존재하므로 유죄 확정 판결이 존재하고, 경찰관들로부터 불법구금, 고문을 당하는 등 수사기관의 불법체포 감금 또는 폭행 가혹행위의 존재가 입증되므로 형소법 제420조 제7호 등에 따라 재심사유가 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하면서, 재심결정 가능성이 높다.
  
한편, 4.3당시 영문도 모른채 군.경으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고 최소한의 적법한 절차도 없이 불법적으로 행해졌던 계엄 군사재판의 '초사법적 처형'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도민 4.3수형인은 약 253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상부명령에 따라 집단처형(총살) 됐거나 행방불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번에 청구인 중 김묘생 할머니는 18살때인 1949년  표선면 가시리 마을 인근 동굴에 숨어있다가 잡혀 고문과 구타를 당하고 전주형무소로 끌려가 옥살이를 했다.

김영숙 할머니도 18살 때인 1948년 제주시 영평리에 부모님과 살다가 소개령으로 집이 불타면서 살 곳이 없어 제주시 남문통으로 내려왔다가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한 후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김정추 할머니는 17살때인 1948년 서귀포시 하효 집에 있다가 동네 노인단장에게 끌려간 후 서귀포경찰서로 잡혀갔다. 조사과정에서 동네에서 해녀모집을 하면서 명단에 손도장을 찍은 것이 이유였다. 

고 변연옥 할머니는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출신으로, 19살때 산에서 겨울을 나면서 장티푸스에 걸렸고, 봄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합류에 산에서 내려갔다가 경찰에 붙잡혀 전기고문을 받고 전무형무소로 수감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고 송석진 할아버지는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출신으로, 22살때인 1948년 이유도 모른채 관덕정 쪽 경찰서로 끌려가 구금됐다가 목포형무소로 이송돼 수감됐다. 그는 배에 태우니 그때서야 형무소에 끌려간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송순희 할머니는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출신으로, 23살때인 1948년 겨울 딸을 업고 시어머니와 산에 피신해 있다가 토벌대에 잡혀 끌려간 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누명이 씌워진채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 

장병식 할아버지는 제주시 이도동 한짓골 출신으로, 1948년 집에 가던 중 서북청년단에 의해 끌려가 쇠파이프 등으로 구타를 당하고, 죄명도 모른채 인천형무소로 이송돼 수감됐다. 

일반재판 수형인인 김두황 할아버지는 스무살 때인 1948년 11월 16일 서귀포시 성산읍 난산리 소재 집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조사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구타와 폭행이 이뤄졌고 심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그를 취조하던 경찰은 총을 겨눠 죽인다면서 협박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해 11월 30일쯤 일반재판이 열렸으나 판사는 질문도 하지 않았고, 그에게 진술할 기회도 주지 않고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그는 목포형무소로 이송돼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판결문에는 '1948년 9월 25일 오후 8시45분께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면 난산리에서 김두홍의 집에서 김관삼 등 6명과 무허가 집회를 열고 폭도에게 식량을 주기로 결의됐다'고 적시돼 있다. 그러나 이번 재심청구 심리과정에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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