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7년차 미국 남자, 그가 올레길에 푹 빠진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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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7년차 미국 남자, 그가 올레길에 푹 빠진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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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13) 제주 올레길 완주 원어민교사 로저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위에서 전하는 편지>는 그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다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그를 처음 만난 건 초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어느 날, 이중섭 거리에서였다. 십여 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미국 여자 크리스티나와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수다를 떠는데 한 외국 남자가 지나갔다. 크리스티나가 그를 불러 세우더니 내게 소개했다. 서귀포 외국어 학습관에서 함께 영어를 가르치는 원어민 교사 로저란다. 이번에는 로저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 분이 바로 올레마 마야!” (올레의 엄마라는 뜻으로 붙은 내 별칭이다) 그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지더니 한국말로 외쳤다. “아니 이 분이 올레 마마? 서명숙 씨? 맙소사. 설마 꿈은 아니겠지?”

​이번엔 내가 더 놀랬다. 국적을 알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외국인인 그가 이렇듯 유창하게 우리말을닫기우리 말을 구사하다니, 그리고 날 만난 것에 대해 이토록 감격스러워하다니.

그에 대해 슬며시 호기심이 생겼다. 간단한 호구조사에 들어갔다. 플로리다에서 온 미국인이고, 올레길을 이미 완주했고 완주 후에도 틈만 나면 여기저기 코스를 친구들과 걸으러 다니는 찐 올레 팬이란다. 올레길을 걸을 때마다 대정지역 국제학교 교사들이나 외국인 여행자들을 종종 만났지만, 서귀포에 외국인 완주자가 있다니 더욱 반가웠다. 개인 수업 가느라고 서둘러 대화를 마친 로저는 훗날을 기약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23일 저녁이었다.

(이 모든 대화는 순전히 한국어와 가끔은 제주어로 진행되었음을 밝힌다)

# 그렇게 가난했던 나라가 부자 된 비결이 궁금했다.

한국 나이로 31세인 그는 족보 자체가 글로벌했다. 친가 쪽 조상은 터키, 외가 쪽은 중남미 온두라스, 그는 온두라스에서 미국 플로리다주로 이민 온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피부색이 검다 보니 유색인종 차별을 어릴 때부터 숙명처럼 견뎌내야 했지만,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부터 두 아들을 위해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어머니는 ‘ 너희는 공부를 많이 해서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라고 늘 아들들을 독려했다. “한국 엄마들이랑 되게 비슷하죠?”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그래서 그는 이민 2세로는 보기 드물게 워싱턴 DC의 조지 타운대에 진학해서 국제관계와 국제개발학을 전공했다.

“대학 전공과목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새마을운동에 대해서 많이 배웠어요. 자연히 한국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지요.”

아프리카 비슷한 이미지였던 최빈국 한국이 불과 50여 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된 배경, 자원이 빈약하고 인구도 많지 않은 나라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비결이 뭘까 궁금하더란다. 그래서 한국의 원어민 보조교사 선발시험에 자원했더란다.

​“지금도 합격통지를 받았던 장소를 또렷하게 기억해요. 칠레를 여행 중이었고 그곳의 높은 산에서 추수감사절 파티를 하던 중에 전화를 받았어요. 남미의 산에서 다른 대륙의 산으로 가라는 통보를 받은 거죠. 설문대 할머니가 저를 이곳으로 발령 냈다고 생각해요.”

이 친구, 제법이다. 제주 사람들이 걸핏하면 크고 작은 일, 궂은일 좋은 일에 끌어다 대는 제주 여신 설문대 할머니까지 인용하는 센스라니!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 지미봉 포기했던 그, 지금은 날마다 고근산을 오르내린다.

그가 제주에 도착한 건 2015년 2월 25일. 그의 말에 따르면 "못 살겠다 못살포(모슬포)" 서귀포시 대정읍의 안덕중학교가 첫 근무지였다. 그도 상당수 외국인들이 그렇듯 액티비티 활동을 좋아하는 트레커였을까 궁금했다. 천만에, 만만의 말씀이란다.

"플로리다가 워낙 평평한 곳이잖아요, 트레킹 코스도 별로 없고 걸어본 적도 없었어요, 근데 학교 동료들이 자꾸 권하길래 살도 뺄 겸 시작한 거죠. 보다시피 제가 좀 살이 쪘잖아요. 크크."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외국인 친구 네 명이랑 처음 걸은 코스는 하필이면 지미봉이 있는 올레 21코스였다.

"지미봉 그때 처음 봤어요. 진짜 보기만 했어요. 그 이전까지 걸은 것만 해도 지친데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었어요. 너무 높아서 무서웠어요. 저만 그냥 패스했지요."

그가 다시 올레길에 도전한 건 2018년 3월. 이번엔 아예 올레 패스포트를 구입했다.

"첫 시작 코스는 우도였어요. 스페인 출신 원어민 교사랑 함께 갔는데, 표식을 잘 못 찾아서 길을 자주 잃어버렸어요. 우도봉을 내려오다가 표식 헷갈려서 다시 올라가고. 정말 죽을 뻔했어요. 그런데 조금씩, 조금씩 나아졌어요. 그리고 점점 올레길이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이 이방인에게 올레길이 뭐가 그리 좋았던 것일까.

"풍경은 당연하지만 그 길에서 제주의 역사를 배우는 것도, 제주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도, 다른 마을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참 좋았어요." 그러면서 그는 18코스의 불탑사에 대해 한참 그 유래를 이야기했다.

우리 대화 자리에 함께 한 제주도 토박이 후배가 엄청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로서는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 가보지 않은 장소였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11,12,13은 좀 어려웠어요. 대정읍, 한경면 이 지역은 바람이 너무 세고 좀 지루한 밭길이 많잖아요. 당산봉, 수월봉, 녹남봉 세 개가 연달아 나오는 12코스는 처음 걸었을 때 죽을 만큼 힘들었어요."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좋은 순간, 행복한 코스는 없었던 거냐고 물었다.

"아, 너무 많아요. 행복했던 순간도, 좋았던 순간도. 가장 큰 건 성취감이에요. 제지기, 삼매봉, 고근산, 도두봉.... 첨에는 오름이랑 싸우고, 중간에는 나랑 싸우는 느낌인데, 다 오르고 나면 성취감이 들어요. 정상에서 보이는 그 멋진 풍경과 성취감 때문에 그동안 힘든 걸 다 잊어버리고, 종점에 도착하고 나면 내가 저 길을 다 걸었다니, 스스로 너무나 뿌듯해요. 동행도 참 중요해요. 18코스는 스페인, 볼리비아, 에쿠아도르, 콜롬비아 여자들이랑 걸었어요. 네 명 다 제주대에 유학 중인 학생들이에요. 모두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 출신이라서 걷는 내내 깔깔거리면서 원 없이 스페인말로 대화를 나눴어요. 정말 행복했어요."

​두려웠던 순간으로는 1코스 말미오름에 올라갔을 때를 꼽았다. " 황소 여섯 마리가 딱 길바닥에 버티고 서 있었어요. 너무나 무서워서 그냥 딱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황소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더라고요. 휴우 다행이었죠."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그 말 끝에 그는 갑자기 내게 무슨 띠냐고 물었다. 외국인에게서 띠 이야기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안 했기에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갑갑하다는 듯 그는 "십이간지로 말이에요" 라고 보충설명을 한다. 세상에나, 별 걸 다 아는 로저다. 옆에서 듣던 후배가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는 듯 농담을 던졌다.

"로저, 수상해. 혹시 미국 간첩 아니야? 왜 이렇게 한국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아는 거야? 너 스파이 맞지?" 그랬더니 로저는 웃으면서 다 자기의 못 말리는 호기심 때문이란다.

자신은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엄마의 고향 온두라스에 대해서도 엄마보다도 더 잘아서 가끔 엄마를 놀라게 한단다. 그는 내 후배의 띠를 묻더니 말띠라는 대답에 양띠나 호랑이띠 남자랑은 사귀지 않는 게 좋단다. 그녀는 작년에 양띠 남자 친구와 성격 차이로 헤어진 터였다. 허걱.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그는 말했다.

"올레길은 내 다리에 근육을 붙여주었어요. 처음엔 숨을 헉헉대면서 올랐던 고근산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가요. 그뿐인가요? 여러 가지 공부도 시켜주고, 사람들도 만나게 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요. 그래서 제가 이 길을 처음 시작한 올레 마마를 꼭 만나고 싶었는데, 그날 메이비에서 만나고 정말 꿈만 같았어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어찌 이렇게 한국말을 이렇게 잘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심지어 제주어까지도.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한국에, 제주에 계속 살고 싶으니까요."

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 그는 또 다른 발령 전화를 받았단다. 내년부터 제주시 외국어 학습관으로 출근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면 제주시로 이사를 가야 한단다. 그는 내년부터는 아마도 고근산 대신 도두봉을 날마다 오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서귀포 공부를 얼추 마친 로저의 제주시 공부 결과가 자못 기대된다. <서명숙 /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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