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호' 그날의 기억, 서귀포시를 짓누른 슬픔과 통곡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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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호' 그날의 기억, 서귀포시를 짓누른 슬픔과 통곡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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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 (11) 돌아와요, 서귀포항에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기 어려운 지금,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길이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치유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 <길위에서 전하는 편지>는 그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다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서귀포 구 도심 주변 바닷가와 공원길을 걷거나 천천히 달린다. 집 근처 정방폭포로 향해 물길이 천천히 흐르는 정모시공원을 지나서 아담한 불로초 공원, 진시황의 사신 서복이 이 근처를 지나갔음을 기려서 조성한 서복공원, 여름방학 때마다 물놀이를 즐겼던 자구리 공원... 춥고 고단하고 외로웠던 서울살이 30년 만에 길을 내러 고향에 돌아오기를 얼마나 잘했던가.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떠올리거나 ‘나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아름다운 자연을 늘 누릴 수 있는 다이아몬드 수저 출신이구나’ 새삼 실감하면서 이동한다.

​허나, 서귀포항 주위에 쳐진 푸르른 철책이 나오면 마음의 결이 대번에 달라지곤 한다. 가슴 한켠에 아릿한 통증을 느끼거나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고 한다.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자신의 저서 <이스탄불>에서 ‘모든 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고 설파했다. 서귀포항은 그의 의견에 절절하게 동의하게 만드는 곳이다. 서귀포항에 깃든 슬픔이 섶섬, 문섬, 새섬, 범섬이 점점이 떠 있는 미항의 풍경을 더 비극적으로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처절한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 그날, 서귀포시 전체를 짓누른 슬픔과 통곡소리

아직도 그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부푼 마음으로 여중생이 된 그해 1970년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를 무렵, 겨울방학을 눈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기말시험 때문인지, 선생님이 일찍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다. 아무튼 평소보다 일찍 하교해서 우리 집과 가게가 있는 매일시장통(지금은 매일올레시장으로 이름도 바뀌고 장소도 바뀐)으로 왔더니, 뭔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주위 아주망들이 장사를 할 생각은 안 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뭔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가게 안쪽에서 들어서는 날 발견한 어머니가 달려오더니 와락 나를 껴안았다. 억척같이 일만 하고 애정표현은 거의 없는 전형적인 제주 여자인 우리 어멍이 이렇듯 딸을 껴안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얼떨떨한 내게 어머니는 지폐 한 장을 쥐여 주었다. 백 원도 징징거려야 시절에 지폐 한 장은 아이들에겐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 뭔가 큰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겅해도 우린 다 살아시난. 아무도 안 죽어시난.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게. 이 돈으로 친구들이영 먹고 싶은 거 다 사먹으라이.“

​그 돈을 갖고 당장 친구들과 어울려 분식집으로 직행하기에는 왠지 찜찜했다. 그래서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몰래몰래 엿들었다. 그랬더니 대강의 퍼즐이 맞춰졌다. 서귀포항에서 출발한 남영호가 부산을 향해서 가던 중 목포 근처 어떤 바닷가에서 한밤중인지 신새벽인지 캄캄한 시간에 멈춰 서서 가라앉았고,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삼백 명도 넘는데 거의 다 죽었다는, 재난 영화에나 나옴직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내용이었다.

​아니, 남영호라니. 그 배라면 나도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 부산에 사는 외삼촌을 만나기 위해 혼자 타봤던 그 배 아닌가. 게다가 울 어멍이 한 달에 한두 번은 부산 자갈치 시장에 건어물을 떼러 가기 위해 늘 탔던 배 아닌가. 어멍이 감기 몸살로 이번은 부산 가는 배 못 타니 옆집 가게 주인에게 대신 건어물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아, 그래서 우리 어멍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내게 달라고도 안 한 용돈을 쥐여 주었구나 싶었다.

허나 불운이 비껴간 우리 집과는 달리, 시장통에는 가족이 그 배를 탄 경우가 제법 많았다. 누구누구네 가게, 누구누구 어멍, 아방, 삼촌이 그 배를 탔다는 이야기가 하루하루 더 보태지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중에는 초등학교부터 같이 다닌 내 이웃 친구 해란이 어멍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산 도매시장에 물건을 떼러 배를 탄 것이었다. 우리 식료품 가게 바로 맞은편에서 예단 이불가게를 하던, 곱디고운 아주망이었다. 난 고운 비단옷을 차려입고 우아하게 줄자로 치수를 재는 아주망과 찬물에 산더미 같은 콩나물을 다듬고 씻느라 손등이 불어 터진 우리 어멍을 은근히 비교하면서 우리 집도 저런 고급 진 가게를 하면 좋을 텐데 부러워하곤 했었는데....

​그러다가 방학을 맞았고, 슬픈 크리스마스가 지났고, 며칠인가가 흘렀다. 어느 날 시장통 사람들이 또 한 번 웅성거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부둣가로 달려갔다. 나도 달려가는 사람들 뒤로 따라붙었다. 남영호가 떠났던 그 부두에 수습된 시신들이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하지만 해경과 경찰이 입구에서 희생자 가족들만 들여보내서 우리는 먼 발치에서 동동거리다가 항구 위의 기정(절벽) 위로 올라갔다. 무언가 위에 엎어져서 우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고, 먼 그곳까지도 사무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헤드라인제주
사진= 사단법인 제주올레. ⓒ헤드라인제주

​어른이 되고 난 뒤에야, 그리고 삼십여 년 만에 고향 서귀포로 돌아오고 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날 그 남영호 사건이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의 해상 조난 사고였고, 갖가지 요인이 총망라된 종합형 인재 사고였다는 것을. 그리고 이날 이때까지도 정확한 탑승자 수와 희생자 수가 밝혀지지도 그 어떤 보상이나 위령 사업도 제대로 이뤄지거나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뿐 아니라 그때 탑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몇 안 되는 생존자들도 한평생 그날 한밤중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살 떨리는 추위에 떨던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를 졸지에 잃은 친구 해란이는 유명한 여성 목사가 되고 난 뒤에도 인생에서 힘든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14살 그 나이로 돌아가곤 한다는 것을.

그나마 한 가닥 위안이 되는 소식은 50주년을 맞는 올 12월 15일, 그때 그 자리에서 서귀포 시민단체들의 주도 주관 아래 남영호 희생자 추모예술제가 제대로 처음으로 거행된다는 점이다. 이 첫걸음을 시작으로 부디 생존자나 희생자나 그 가족들이 그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새로운 날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이 떠났던 그 부두 그 자리에 추모비가 다시 세워질 수 있게 되기를. <서명숙 /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

최악의 해상사고 ‘남영호 사건’

1970년 12월 14일 오후 4시 제주 서귀포항에서 출발해 성산포항을 거쳐 338명의 승객과 543톤의 화물을 싣고 부산항으로 향하던 남영호가 15일 새벽 2시 5분경 여수 소리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건이다.

​건국 이래 해상참사 중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최악의 사고로 323명이 사망하고 겨우 15명만 구조되었다(1971년 부산지방해난심판원 재결문). 그러나 남제주군 조난수습 대책일지에는 사망 326명, 생존자 12명으로 기록되는 등 조난자 규모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선령 2년의 남영호는 362톤급으로 선체도 큰 편이었지만 무리한 과적, 정원초과, 불법 선박개조, 항해 부주의, 감독 소홀 등 안전불감증과 선주와 권력의 유착, 정부의 늑장대응이 빚은 전형적인 인재였다. 연말 성수기를 앞두고 감귤, 배추 등 정량의 4배가 넘는 화물을 제대로 결박도 하지 않은 채 마구 실었고 성산포항을 떠날 때부터 좌현으로 10도 기운 상태였다. 승객 64명은 승선자 명부에도 없었다. 선장과 통신사는 무자격자였다.

​사고 직후 남영호가 발신한 긴급구조신호를 국내에서는 단 한곳도 포착하지 못했다. 그나마 신호를 수신한 일본 어선들이 자국 순시선에 알리면서 조난 사실이 전해졌다. 일본 측은 오전 9시부터 낮 12시 30분까지 한국에 계속 무전을 쳤지만 응답이 없었다. 일본 해상보안청은 순시선을 현장에 급파했다. 교도통신이 특종으로 전 세계에 사고소식을 타전했고, 국내에서는 오전 11시에서야 라디오방송을 통해 긴급뉴스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교도통신 뉴스가 나온 후에도 한국 해경 등은 ‘연락 받은 바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결국 한국 해경이 출동한 시각은 오후 1시로 일본의 순시선 파견보다 4시간이나 늦었다. 골든타임을 한참 넘기고 사고해역에 도착한 한국 해경이 구조한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 일본 측이 8명, 한국 어선이 1명을 구조한 뒤였다.

​한국 정부는 열흘도 안돼 시신 선체의 인양을 포기하고 12월28일 서귀포에서 시신 없는 합동위령제를 지내 유족들의 분노를 샀다. 당시 인양된 시신은 고작 18구였으며 나머지 300여 명은 시신 없이 장례를 치렀다.

​이듬해인 1971년 서귀포항에 위령탑이 건립되었지만 항만 확장공사로 1982년 중산간인 상효동으로 옮겨져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유족들의 요구로 2014년 정방폭포 해안에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으로 다시 세워졌다. 2020년이며 50주기를 맞는 남영호 사건은 아직까지 정확한 탑승자 확인이나 희생자 보상, 위령 사업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명숙 저 <서귀포를 아시나요> 중 301p-3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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